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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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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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국제 분쟁, 냉전 + 카테고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다. 유엔군과 중공군 소련까지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실전이자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을 고착화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일단락되었으나 현재까지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막대한 인명 및 물적 피해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45

[한반도 분단]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미소 군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훗날 6.25 전쟁 발발의 주요 배경이 된다.

1948

[제주 4.3 사건]

제주도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6.25 전쟁 이전의 남북한 이념 대립 및 국지적 무력 충돌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여수·순천 사건]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발생한 군부대 반란 및 민간인 학살 사건.

이념 대립과 연관된 초기 충돌 중 하나다.

[소련군 한반도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의 요구에 따라 소련 주둔군이 시베리아로 철수했다.

이는 북한의 남침 계획에 대한 소련의 간접적인 준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49

[주한미군 철수]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이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한국에서 철수했다.

이는 북한에게 남침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50

[애치슨 선언]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북한의 남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있다.

[스탈린의 남침 승인]

김일성의 끈질긴 설득 끝에 소련의 스탈린이 김일성과의 면담을 통해 한반도 통일 과업(남침) 개시에 동의하였다.

이는 전쟁 발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마오쩌둥 면담]

김일성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남침 계획을 설명하고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미군의 개입 시 중국군 파병을 약속하며 남침에 동의했다.

[국군 비상경계 해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의 대규모 병력 집결 보고가 있었음에도 군 수뇌부가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병력 절반 이상을 휴가 보냈다.

이는 북한에게 남침의 유리한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군 기습 남침]

새벽 4시, 북한군이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서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며 6.25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당일 개성과 동두천, 포천이 함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전으로 비화될 전쟁의 서막이었다.

북한군의 '폭풍 작전' 계획에 따라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인악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 임원진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했다.

[이승만 평양 점령 호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이 국무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공언하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는 당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승만 미군 도움 요청]

밤 10시 30분경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미 극동군 사령관에게 전화로 미군의 긴급 개입을 요청하며,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한국 내 미국인 2,500명 전원 살해를 시사하는 강수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서울 피신]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고 독려하는 동시에 새벽 2시에 각료들과 함께 대전행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피신했다.

새벽 4시 비상 국무회의에서 수원 천도가 정식 의결되었다.

[UN 안보리 참전 결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회원국들에게 권고하는 결의안을 7대1로 가결했다.

해리 S.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해군 및 공군 지원을 명령했다.

[한강 대교 폭파]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 없이 한강 철교가 폭파되어 최소 500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는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정부의 실책으로 비판받는다.

[서울 함락]

북한군에 의해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6.25 전쟁 발발 3일 만의 일로, 한국군은 후퇴하고 정부는 대전으로 피신했다.

조선인민군 3개 사단 병력으로 구성된 '조선의용군'이 주요 방어선을 뚫고 서울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미 지상군 최초 참전]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며 미 지상군이 한국전에 최초로 참전했다.

이 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치렀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 조직]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군 지휘권 이양]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이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공식 서한을 통해 유엔군 총사령관 지휘 하에 편입시키겠다고 밝혔다.

[대전 전투]

미 육군 24사단이 대전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패주했다.

윌리엄 F.딘 사단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왜관 대규모 폭격]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유엔 공군 B29 폭격기 99대가 북한군 집결지인 왜관에 85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최대의 폭격 기록이다.

[영천 전투 승리]

한국군 제2군단이 영천지구에서 북한군 제15사단과 포병연대를 섬멸하고 15km 북진하며 북한군의 기세를 꺾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인천 상륙 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총지휘 하에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며 성공적인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261척의 군함이 동원된 세계 최대 규모의 상륙 작전 중 하나였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 2시간 만에 월미도를 장악했다. 미군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이어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져 인천 장악에 성공했다.

[서울 수복]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여 서울을 수복했다.

90여 일 만에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38선 돌파 북진]

유엔군 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한국군 제3사단이 이종찬 대령 지휘하에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이는 국토의 전역 수복과 통일을 목전에 두는 결정적 진격이었다.

[평양 점령]

한국군 제1사단이 선두로 북한의 수도 평양을 완전 점령했다.

김일성은 이미 10월 9일에 평양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압록강 초산 도달]

한국군 제6사단 7연대 수색대가 서북 국경의 중앙지점인 압록강 초산에 도달했다.

이는 한국군이 북진하여 도달한 한반도 최북단 지역이었다.

[혜산진 도달]

중부로 진격한 한국군 제7사단의 일부가 중부 국경 혜산진에 도달했다.

이로써 한반도 최북단 지역까지 진격하며 통일이 목전에 다다랐다.

[청진 돌입]

동부 전선의 수도사단이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 청진에 돌입했다.

이로써 국토의 거의 전역이 수복되고 통일이 목전에 다다랐다.

[중공군 개입 및 전세 역전]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지원군 약 28만 명이 아무런 통고 없이 한국전에 개입하며 전세가 급격히 뒤집혔다.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당시 중공군은 내전이 막 끝난 상황으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음에도 대규모 보병 병력과 소련의 무기 지원을 받아 참전했다. 이들은 주로 야간 이동과 지형지물 이용으로 미군의 압도적 화력을 회피하며 공격을 감행했다.

[흥남 철수 작전]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 모여 해상으로 철수하는 대규모 작전이 시작되었다.

몰려들던 중공군 3개 사단이 유엔군의 공습과 포격에 섬멸되었다.

1951

[1.4 후퇴 및 서울 재함락]

중공군 3차 대공세로 인해 서울이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평양과 원산을 철수하며 대규모 후퇴를 감행해야 했다.

1952

[미군 세균무기 사용 주장]

중국의 마오쩌둥과 북한 외무성이 미국이 항공기와 야포를 이용해 한국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백마고지 전투]

철의 삼각지대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백마고지에서 한국군 제3사단, 9사단과 미 제2사단이 공산군의 맹렬한 공격에 맞섰다.

1개월 동안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1953

[스탈린 사망]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6.25 전쟁 휴전 회담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

[반공포로 대규모 석방]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방해할 목적으로 수감된 반공포로들을 대규모로 석방했다.

이는 미국을 격분시켜 이승만 제거 작전까지 계획하게 만들었다.

[휴전협정 조인]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로써 3년 1개월간 참담했던 6.25 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매듭지어졌고, 한반도에 '제2의 38선'인 휴전선이 설정되며 민족 분단의 비운이 고착화되었다.

1965

[제2차 6.25 전쟁 계획]

김일성이 제2차 6.25 전쟁을 계획했으나 중국 공산당이 거부한 사실이 2013년 10월 24일 중국 외교부 기밀 해제 문서로 공개되었다.

1968

[1.21 사태]

북한 특수부대원 김신조를 앞세운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침투를 시도하며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이는 휴전협정 이후의 주요 무력 충돌 중 하나다.

1999

[제1연평해전]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 연평도에서 남북한 해상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2002

[제2연평해전]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연평도 부근에서 남북한 해군 함정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인명 피해가 있었다.

2007

[남북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 선언 추진을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2008

[금강산 관광객 피격]

금강산에서 대한민국 관광객 1명이 피격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었다.

2009

[대청해전]

서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남북한 해상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2010

[천안함/연평도 사건]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며 남북 관계가 급격히 경색되었다.

2013

[북한 3차 핵실험]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하여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추진을 촉발했다.

[북한 휴전협정 백지화]

한미 합동 군사훈련 '키 리졸브'에 반발하여 북한이 휴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했다.

2015

[서부 전선 포격 사건]

서부 전선에서 남북한 간의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2016

[북한 4차 핵실험]

북한이 최초의 수소탄 핵 실험을 강행하며 남북 관계를 더욱 경색시켰다.

2017

[북한 6차 핵실험]

북한이 6차 핵실험을 진행하고 미사일을 발사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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