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군사 작전, 상륙 작전,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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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0: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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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감행된 대규모 상륙 작전입니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지형적 난관과 미 합동참모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이 작전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서울 수복의 발판을 놓아,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대담하고 성공적인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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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25 전쟁 발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한을 밀고 내려왔습니다. 압도적인 병력과 무기 우위를 바탕으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후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무기에서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을 압도하며 빠르게 남하했습니다.

[맥아더, 상륙 작전 구상]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던 중,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전세를 역전시킬 상륙 작전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인천 상륙 작전의 시발점이 됩니다.

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7월 22일 미제1기병사단과 미 해병대 연대전투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는 블루하츠 작전이 만들어졌으나 전황 악화와 미 본토 상륙부대 배치 지연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 구축 및 최후 방어전]

조선인민군의 거듭된 공세에 밀린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여 최후의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이곳에서 전선을 안정화하고 반격을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1950년 8월 초,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동해와 남해에 빠질 위기 속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부산 교두보 전투가 시작되었고, 유엔군은 북쪽과 서쪽의 두 면만 방어하며 병력과 물자를 부산항과 비행장을 통해 빠르게 보급받아 조선인민군에 대한 우위를 점차 상실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첩보 수집을 위한 X-ray 작전 시작]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해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함명수 소령 지휘)가 영흥도와 덕적도를 거점으로 하여 X-ray 작전을 수행하며 인천 지역의 중요 첩보를 수집했습니다. 이는 상륙 작전 계획 수립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1950년 8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함명수 소령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 17명이 영흥도와 덕적도를 근거지로 X-ray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이와 별도로 미국 해군 정보장교 유진 F. 클라크 대위가 지휘하는 첩보부대가 9월 1일 영흥도에 잠입하여 인천 앞바다에 관한 정보를 수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 계획 승인]

미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도쿄 미 극동군사령부에 방문하여 맥아더와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인천의 지형적 난관을 이유로 미 합동참모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필승의 의지를 피력하여 마침내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승인받았습니다. 이후 8월 30일, 상륙 작전일이 9월 15일로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미국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됴쿄 미국 극동군사령부까지 와서 1950년 8월 23일 맥아더와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의 조수, 수로, 해안 조건을 들어 반대했으나, 맥아더는 일본군과의 태평양 전쟁 중 87차례의 상륙작전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 상륙의 당위성과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결국 8월 28일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계획을 승인하고,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상륙작전일을 9월 15일로 정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 개시 및 함포 사격 시작]

맥아더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어,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인천 해안에 퍼부어졌습니다. 9월 15일 0시 50분에는 첩보부대가 팔미도 등대를 점등시켜 상륙 선단의 길을 밝혔습니다.

1950년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으며, 한국,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총 261척의 대선단이 동원되었습니다.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이틀이 지났습니다. 한편, 9월 15일 0시 50분에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수행하던 첩보부대가 팔미도 등대를 점등시켜 상륙 함대의 진입을 도왔습니다.

[유엔군 및 국군, 인천 상륙 및 탈환]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 및 육군 부대들이 맹렬한 함포 사격과 공습 엄호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도시를 탈환했습니다. 이 상륙으로 북한군의 보급로가 완전히 차단되며 6.25 전쟁의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날 동해안에서는 장사 상륙 작전이 양동 작전으로 실시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상륙하였고,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해병대 연대급 부대와 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된 대한민국 육군 17보병연대 역시 상륙하여 인천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이로써 조선인민군은 보급로를 차단당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날 동해안에서는 조선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 작전으로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습니다.

[서울 탈환 및 태극기 게양]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로 진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며, 6.25 전쟁 초기의 위기를 벗어나 반격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0,000명의 병력을 투입,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9월 20일 유엔군 수색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했으며, 23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이 서대문구 안산을 점령했습니다. 다음 날 마포를 통해 시내로 돌입했으며, 25일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17보병연대와 미 제7보병사단이 관악산 방면을 통하여 한강을 도하하고 서울 남쪽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해병대와 맹렬한 협공을 가했습니다. 조선인민군 병력 대부분이 섬멸되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9월 28일 제2차 서울 전투로 서울이 탈환되었으며,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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