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작곡가, 대중음악가, 기타리스트, 영화감독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4:5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작곡가, 대중음악가, 기타리스트, 영화감독
report
Edit

한국 대중가요의 기틀을 다진 전설적인 작곡가이자 다재다능한 음악인입니다. 〈애수의 소야곡〉, 〈신라의 달밤〉 등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습니다. 다양한 악기 연주, 영화 음악 및 연출까지 소화하며 폭넓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 가요 작곡으로 후대에 논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박시춘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13

[박시춘, 밀양에서 출생]

경상남도 밀양에서 박순동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하며 자랐습니다.

박시춘은 1913년 10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본명 박순동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기생 양성소인 권번을 운영한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하며 지냈다.

1929

[트럼페터 겸 작곡가 데뷔]

트럼페터로 데뷔하여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트럼펫 연주곡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를 작곡하며 작곡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29년 트럼페터로 데뷔했으며, 트럼펫 연주곡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를 작곡하여 작곡가로도 데뷔했다. 이후 1930년 바이올리니스트, 1931년 색소포니스트, 1932년 기타리스트로도 데뷔하며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1935

[히트곡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로 부상]

〈희망의 노래〉를 시작으로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등을 발표하며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35년 〈희망의 노래〉를 발표한 후,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등을 연이어 내놓으며 인기 작곡가로 부상했다. 유랑극단 활동 중 시에론레코드의 이서구, 박영호를 만나 작곡가로 본격 입문했다.

1937

[〈애수의 소야곡〉 발표, 전국적 히트]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하여 대중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얻었으며, 일제 강점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대표적인 명곡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37년 남인수가 불러 큰 반향을 얻은 〈애수의 소야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박시춘이 양복 차림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기타를 연주하고, 남인수가 애절한 곡조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상징되며 서민의 애환을 잘 표현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 잡았다.

1941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 가요 작곡]

태평양 전쟁 시기,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등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작곡하여 발표했습니다. 이는 후일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시기(1941년~1945년)에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내용의 〈혈서지원〉을 비롯해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 다수의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 이 중 조명암 작사의 〈혈서지원〉은 군국가요 중에서도 친일성이 짙은 것으로 평가된다.

1943

[영화 음악감독 데뷔]

영화 《조선해협》의 음악을 담당하며 영화 음악감독으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1943년 영화 《조선해협》을 통해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하며 음악적 재능을 다양한 분야로 확장했다.

1946

[〈가거라 삼팔선〉 발표]

해방 후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한 〈가거라 삼팔선〉을 발표했습니다.

1946년 민족의 분단 현실을 애통하게 노래한 〈가거라 삼팔선〉을 발표했다.

1948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발표]

〈비 내리는 고모령〉과 〈신라의 달밤〉을 같은 해 발표하며 또다시 국민적인 히트곡을 만들어냈습니다.

1948년에 〈비 내리는 고모령〉과 〈신라의 달밤〉을 발표, 두 곡 모두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한국 대중가요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1949

[〈낭랑 십팔세〉 발표]

청춘들의 감성을 담은 명곡, 〈낭랑 십팔세〉를 발표했습니다.

1949년 청소년들의 감정을 노래한 〈낭랑 십팔세〉를 작곡하여 발표했다.

1950

[한국 전쟁 참전 및 전중가요 〈전우여 잘 자라〉 작곡]

한국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하여 전중가요 〈전우여 잘 자라〉를 작곡하며 전장의 병사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했다.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전투와 국군의 북진 과정을 묘사한 전중가요 〈전우여 잘 자라〉를 이때 작곡하며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1953

[〈굳세어라 금순아〉 발표]

전쟁의 아픔과 이별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를 발표하여 전쟁 중 국민들에게 큰 위로를 전했습니다.

1953년 한국 전쟁의 상흔과 피난민의 애환을 담은 대표곡 〈굳세어라 금순아〉를 발표했다.

1954

[〈이별의 부산정거장〉 발표]

피난 수도 부산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1954년 이별의 슬픔을 담은 명곡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하여 대중의 큰 공감을 얻었다.

1956

[영화배우 데뷔]

영화 《청춘쌍곡선》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1956년 영화 《청춘쌍곡선》의 단역으로 출연하여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58

[영화감독 및 제작자 데뷔]

영화 《삼등호텔》로 영화감독에 데뷔하며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같은 해 《딸 칠형제》는 직접 연출까지 맡아 다양한 영화 활동을 펼쳤습니다.

1958년 영화 《삼등호텔》을 통해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했으며, 같은 해 제작된 《딸 칠형제》는 직접 연출까지 맡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1961

[한국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취임]

한국연예협회가 조직될 때 초대 이사장을 맡으며 한국 연예계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가 조직될 당시 초대 이사장직을 맡으며 한국 대중문화계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2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으며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았다. 이는 대중가요 작곡가에게는 처음 서훈된 문화훈장으로, 그의 한국 가요계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996

[향년 84세로 별세]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큰 별이 졌습니다.

1996년 6월 30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장의 삶을 마감했다.

2008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포함]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그를 기념한 가요제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그의 친일 행적을 둘러싼 논란은 그를 기념하는 가요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09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발표]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어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기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