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천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포츠 행정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5:43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공격수로,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했습니다. 국가대표팀에서 89경기 36골을 기록하며 1970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이끌었습니다. 클럽에서도 다수의 우승을 차지하며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은퇴 후에는 여러 고등학교 및 U-20 대표팀 감독, 프로팀 기술 고문 및 부단장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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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박이천 출생 및 정착]
북조선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나 6.25 전쟁 후 서울 영등포에 정착하며 한국 축구의 전설적인 공격수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습니다.
박이천은 북조선인민위원회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1.4 후퇴 때 부모님과 함께 서울특별시 영등포에 정착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8
[양지 축구단 입단 및 활약]
양지 축구단에 입단하여 2년간 주축 공격수로 활약하며 전국축구선수권대회와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기여했습니다.
양지 축구단에 입단한 박이천은 2년 동안 팀의 주축 공격수로 활약하며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도 크게 공헌하며 선수 경력의 시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69
U-20 대표팀에서 활약한 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첫 발탁되어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A매치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1970
[상주 상무 활약 및 우승]
상주 상무에서 군 복무하며 전국축구선수권대회와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우승 청부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상주 상무에서 군 복무를 수행한 박이천은 이 기간 동안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우승과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거머쥐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1970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축구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국제 대회에서의 뛰어난 기량을 입증했습니다.
박이천은 아시안 게임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팀의 금메달 획득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의 국가대표 경력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72
[국민은행 축구단 이적 및 우승]
국민은행 축구단에서 4년간 활약하며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우승 청부사'로서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군 제대 후 고양 KB국민은행 축구단에서 4년간 활동한 박이천은 이 기간 동안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팀의 핵심 선수이자 '우승 청부사'로 명성을 떨쳤다.
[5년 연속 베스트 11 및 올해의 선수 선정]
5년 연속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올해의 축구 선수로 뽑히며 개인 기량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박이천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년 연속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며 개인 수상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1972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
AFC 아시안컵에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하며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박이천은 AFC 아시안컵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 대회는 그의 국가대표팀 활약 중 주요 성과 중 하나이다.
1976
[홍콩 리그 진출 및 현역 은퇴]
홍콩으로 진출하여 해봉 체육회와 사우스 차이나 AA에서 활약했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홍콩으로 건너간 박이천은 해봉 체육회와 사우스 차이나 AA에서 1980년까지 활약하며 통산 56경기 18골을 기록했다. 이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박이천은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시작으로 선수에서 지도자로 변신하여 새로운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6
[정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 역임]
정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17년간 재직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고, 배우 조한선과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정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아 약 17년간 후배 선수들을 지도했다. 특히 1997년부터 약 3년간은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조한선 선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1996
[U-20 대표팀 감독 부임 및 월드컵 출전]
U-20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7년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으나 아쉽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습니다.
정명고 감독 재직 중이던 박이천은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듬해 FIFA U-20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1무 2패의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경험했다.
2005
[인천 유나이티드 기술 고문 부임]
인천 유나이티드의 기술 고문직을 맡아 K리그 시즌 준우승에 기여하며 프로팀에서의 행정가 경험을 시작했습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기술 고문직을 맡아 K리그 2005 시즌 팀의 준우승에 일조하며 프로 축구단에서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2007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대행 역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대행을 맡아 팀의 공격력을 강화하며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K리그 2006 시즌 이후 장외룡 감독이 유학을 떠나자 인천 유나이티드의 감독 대행을 맡아 팀의 전술과 공격력을 효과적으로 개선시키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임기는 1월 4일부터 12월 20일까지였다.
K리그 2007 시즌 종료 후 인천 유나이티드의 부단장으로 승진하여 구단의 전반적인 행정 및 운영에 참여하며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확대했다.
2018
2010년대 중반 이후 청주 FC의 단장을 지내며 지역 축구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인포박스에 따르면 2018년에 청주 시티 FC 단장, 2019년에 청주 FC 단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