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 국문학자, 작가, 시인, 소설가, 화가, 평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21:08:10
연세대학교 국문학 교수이자 저술가였던 마광수는 한국 문학의 교훈성과 위선을 비판하며 파격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다. 특히 《즐거운 사라》 외설 논란으로 구속과 해직을 겪었으나 복직 후 정년퇴임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와 문학의 상상력을 강조하며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2017년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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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출생]
종군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한국 전쟁 중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하며, 화성군 발안에서 태어나 병약하고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
1951년 1·4 후퇴 당시 피난 중 화성군 발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본래 서울에 거주하였다. 종군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한국 전쟁 중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정착, 병약하고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다. 독서를 즐겼으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1977
잡지 《현대문학》에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고구려〉, 〈당세풍(當世風)의 결혼〉, 〈겁(怯)〉, 〈장자사(莊子死)〉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 박두진 시인에 의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
1983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윤동주 연구" 논문으로 1983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 해부터 연세대학교로 돌아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민국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로 재직하였다.
1991
[《즐거운 사라》 출간 및 외설 논쟁]
장편 소설 《즐거운 사라》를 출판하면서 외설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작품은 보수 언론과 문인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했다.
1991년 작품 《즐거운 사라》를 출간하면서, 외설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즐거운 사라》의 내용 중 여대생이 자신의 대학 교수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보수적 언론과 문인들, 대학 교수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대학교수들 중에는 마광수가 현직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쓴 책이라 하여, 대학 교수의 자질 여부를 문제삼기도 했다.
1992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구속]
작품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로 분류되어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강의 도중 전격 구속되었으며, 이는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일으켰다.
1992년 10월 29일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로 분류되어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검찰은 작가의 표현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나,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나고, 특히 청소년 독자들에게 모방심을 부추겨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법학자 출신의 국무총리 현승종이 그를 잡아 넣으라는 특별지시하여 영장도 없이 강의실에 체포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밝혔다.
1995
[연세대학교 교수직 해직]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고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되면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면직 조치되었다.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그의 상고심을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에 1995년 8월 8일 연세대학교는 마광수 교수를 면직조치하였다. 이후 1998년 특별사면을 받아 다시 교수직에 복직하였다.
2017
[별세]
등단 40년을 맞아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냈으나,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홀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6세.
2017년 등단 40년을 맞아 《광마집》(1980)부터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2012)까지 시집 여섯 권에서 고른 작품들과 새로 쓴 10여 편을 합해 119편을 묶은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냈다. 2017년 9월 5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6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