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군인, 외교관, 사회운동가, 미국 육군 원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11-22- 21:32:33
더글러스 맥아더는 격동의 20세기를 살다 간 미국의 전설적인 군인입니다. 웨스트포인트 수석 졸업 후 1차, 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 군정을 이끌며 일본 사회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전세를 뒤바꿨습니다. 만주 폭격 주장 등 과감한 전략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 끝에 해임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논란과 함께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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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출생]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이민자인 군인 집안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유년기를 뉴욕주 올버니에서 보냈으며, 훗날 뉴욕 시티에서 성장했습니다. 위로 두 형이 있었으나, 둘째 형 맬컴은 5세 때 사망했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 2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유년기부터 그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3
[미 육군 장교 임관]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 후 미 육군 장교로 임관하며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4년 동안 역대 최고 점수인 98점대의 우수한 성적으로 수석 졸업했습니다. 1903년 3월 2일 미 육군에 정식으로 복무하기 시작했습니다.
1918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최연소 사단장]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제42사단 참모장으로서 프랑스에 파병되어 복무했으며,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미군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미군의 참전 당시 제42사단 참모장이자 대령이던 맥아더는 프랑스로 파병하여 복무했습니다. 1918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프랑스 주둔군 84보병 여단장, 42사단 임시 사단장이 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미군 최연소 사단장이었습니다.
1930
[미국 육군 참모총장 취임]
후버 대통령 시절, 미국 13대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하며 미 육군의 최고 지휘관 자리에 올랐습니다.
1930년 후버 대통령 때 미국 13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1932년에는 '노병 보너스 군대'를 무력으로 해산하라는 지시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1941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및 극동군 최고사령관 복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현역으로 복귀하며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1937년 퇴역하여 필리핀 육군 원수가 되었던 맥아더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참전을 자원했습니다. 1941년 7월에 예비역에서 소집되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함과 동시에 필리핀 주재 미국 극동군 최고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42년 3월 서남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944년에는 미국 육군 원수로 진급했습니다.
1945
[일본 군정 시작 및 탈군국주의 정책 추진]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디며 일본 군정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쇼와 천황을 통해 '천황은 인간'이라는 선언을 이끌어내고 탈군국주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945년 일본군을 격파하고 필리핀에 상륙했으며, 이후 대일(對日) 점령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8월 30일 일본 땅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그는 1945년부터 1946년까지 1년간 쇼와 천황 대신 일본의 권력을 잡으며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 되었습니다. 천황의 “천황은 인간” 발언을 이끌어 냈고, 성서를 대량 유포하는 등 종교를 통해 일본을 순응시키고자 했습니다. 또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합법화, 교과서 내 천황 신격화 금지, 재벌 해체, 전쟁 책임 공직자 추방, 농지개혁 등 탈군국주의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발발과 유엔군 총사령관 취임]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한국 전선에 미군 투입을 지시하고 한국군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에 관한 맥아더의 최초 보고는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5시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 당일부터 합참 지시 없이 한국군 지원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해군 및 공군 지원 명령을 받았으며, 6월 29일 수원 시찰 후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6월 30일,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당시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있는 상황에서 미 해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성공적으로 이끌어 전세를 역전시키고 서울을 수복했습니다.
국군이 부산까지 후퇴해 있던 상황에서 맥아더는 인민군 점령 지역 중심부를 타격하여 보급로를 끊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 해군이 인천항의 간만의 차, 좁은 접안 지역 등으로 작전 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완강히 반대했으나,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하여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9월 15일,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작전이 시작되었고, 월미도 점령에 이어 인천 장악에 성공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 데 15일이 걸릴 정도로 크나큰 성과였습니다.
1951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해임]
한국 전쟁 확전 방침을 주장하며 만주 폭격을 계획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으로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1951년 3월 10일 한국 전선 시찰 후 성명을 발표하며 만주 폭격을 해도 민간인 피해는 없을 것이라고 언명했습니다. 4월 19일 상하양원 합동회의에서는 '침략자 중공을 응징'하고 한국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기 위해 압록강 피안의 적 보급기지 폭격, 중공 경제 봉쇄, 미 해군의 중국 본토 연안 봉쇄, 공군을 이용한 중국 본토 공격, 타이완 국부군 지원 제한 해제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과 확전 주장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1951년 4월 16일 유엔군 최고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그의 유명한 은퇴 연설은 이 시기에 나왔습니다.
1962
[김종필과의 면담 및 통일 염원]
말년에 김종필과의 면담에서 한국의 빠른 통일을 바란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한국 전쟁 휴전과 만주 폭격 주장에 대한 소신을 밝혔습니다.
1962년 10월 31일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종필을 만났습니다. 이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습니다'는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또한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 사태가 발전된 것입니다'라고 답하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습니다.
1964
[영면]
85세를 일기로 워싱턴 D.C.에서 타계했으며, 버지니아주 노퍽에 매장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했습니다.
만년에 기업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4월 5일 워싱턴 D.C.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버지니아주 노퍽에 매장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서울에 정부 주도로 빈소를 차리고 조문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사후 1964년 4월 7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고, 같은 해 9월 17일 수여식이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