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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외교관, 교육자, 종교인, 민주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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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주미 대사, 제2대 및 제7대 국무총리, 제4대 부통령을 지낸 장면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이끈 핵심 인물이다. UN의 대한민국 승인과 한국전쟁 시 UN군 파병을 성사시키며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4.19 혁명 이후 민주주의 정부를 이끌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하는 비운을 겪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청렴하고 원칙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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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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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서울 종로구에서 태어나다]

죽정 장잠의 후손인 장기빈과 황 루시아의 7남매 중 맏이로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죽정 장잠의 후손인 장기빈과 황 루시아의 7남매 중 맏이로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나 본가가 있는 인천에서 성장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성장했기에 그를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그의 아버지가 평남 출신이기 때문에 평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유아세례를 받으며 천주교 신자가 되다]

부모를 따라 경성부 종현본당으로 가서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고, 죽을 때까지 천주교 교리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는 부모를 따라 경성부 종현본당으로 가서 종현본당 주임신부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 뒤로 그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천주교 교리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8

[인천 박문학교에 입학하다]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부 전동으로 이사 후, 인천성당 부설인 사립 박문학교에 입학하여 한학 등을 수학했다.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부 전동으로 와서 살다가 인천부 인천항 화촌동 8통 6호로 이사했고, 1920년 미국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인천에서 생활했다. 장면은 천주교 인천교구 부설인 사립 박문학교(현재 박문초등학교)에 입학, 한학(漢學)과 수학 등을 수학하였다.

1910

[박문학교 보통과 최우등 졸업]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 보통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박문학교 고등과에 진급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 보통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박문학교 고등과에 진급하였다.

1912

[박문학교 고등과 졸업]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학창 시절 내내 공부와 신앙활동에 전념했다.

인천성당 부설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 내내 공부와 신앙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인천 심상소학교 6학년 편입]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여 심상소학교 6년 과정을 마쳤다.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에 6학년으로 편입하여 심상소학교 6년과정을 마쳤다.

1913

[인천 심상소학교 고등과 진학]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로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로 진학하였다.

1914

[심상소학교 고등과 수료]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 과정을 수료했다.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진학]

당시 15세의 나이로 받아주는 중등교육기관이 없어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진학했다.

그가 농림학교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당시 15세였던 그를 받아주는 중등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원농림학교는 매월 5원씩 급여(훈련수당)로 지급되었으며, 그는 기숙사에 3원 50전을 내고 1원 50전씩을 용돈으로 사용하였다.

1916

[김옥윤과 결혼하다]

중등학교 재학 중 집안 소개로 김옥윤과 결혼하였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 가문에서 온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에서 평생 외도하지 않았다.

중등학교 2학년 1학기에 재학 중 집안의 소개로 김옥윤(金玉允)과 만나 결혼하였다. 처가는 이름도 있고 재력도 있는 집안이었다. 김상집(金商集)의 딸 김옥윤은 당시 15세로, 중림동 성당 부설 가명학교(加明學敎)를 졸업했으며, 처가 역시 모태 천주교 신앙인 가문이었다. 수업 중 연락을 받고 아버지 장기빈과 처가의 중매로 한 중매결혼으로 중림동 성당에서 올렸으며, 임종 전까지 한 번의 외도도 하지 않았다.

1917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다]

관리가 되기 싫어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금테 모자를 쓰고, 칼을 차’고 활동하는 관리가 되기 싫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용산천주교신학교 강사 활동 시작]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 재학 중 서울 용산에 있는 용산천주교신학교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 재학 중 그해 서울 용산에 있는 용산천주교신학교(龍山天主敎神學敎)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 영어과에 진학하다]

미국 유학을 위해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 영어과에 진학하여 영어 실력을 다졌다.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경성 중앙크리스트교 청년학관(현 서울 YMCA) 영어과에 진학했다.

1918

[용산 예수 성심신학교 강사가 되다]

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 강사가 되었다. 이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인 노기남이었다.

용산의 예수 성심신학교(聖心神學敎) 강사가 되었는데, 이 신학교에서 장면에게 신학 및 영어를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인 노기남(盧基南)이었다.

1919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기독교 청년학관 졸업반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체포 위기에서 극적으로 모면했다.

기독교 청년학관 졸업반 재학 중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의 위기에 몰렸으나, 총독부 헌병이 변장한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덕에 극적으로 체포를 모면하였다.

1920

[경성 중앙기독교 청년회관 영어과 졸업]

경성 중앙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추진했으나 가정형편으로 포기했다.

경성 중앙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를 졸업하고 장면은 대학교 진학을 위해 미국 유학을 추진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하게 되었다.

[메리놀 선교회 후원으로 미국 유학]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으로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 영어실력을 다졌다.

한국에 천주교회를 설립하고 전교활동을 하던 메리놀 선교회에 그의 딱한 처지가 알려져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하에 그의 동생 장발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같은해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 영어실력을 다듬었다.

1921

[버나드 고등학교 입학]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 진학 예비과정인 버나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메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 진학 예비과정(비정규 고등학교 과정)인 버나드 고등학교(Bernards High School)에 입학하였다.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 진학]

미국 뉴욕의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로 진학하여 영문학 외에 교육학을 부전공했다.

미국 뉴욕의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英文學科)로 진학해, 영문학 외에 부전공으로 교육학(敎育學)을 전공하였다.

1925

[메리놀센터 하우스 어학교수 부임]

귀국 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로 부임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평안남도 소재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교수로 부임하였다.

[맨해튼 대학교 졸업]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가톨릭 선교 사목에 뜻을 두어 귀국을 결심했다.

맨해튼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국내에 가톨릭 선교 사목에 뜻을 둔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이탈리아에 도착하다]

맨해튼 대학교 졸업 후 귀국길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한국인 순교자 시복식 참석]

로마 바티칸 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했다.

로마 바티칸 시티에서 열린 ‘한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했다.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다]

바티칸에서 당시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했다.

당시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했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거쳐 40일의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927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사목활동]

메리놀신학원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성당에 근무하며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했다.

메리놀신학원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성당에 근무하며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활동하였다.

1928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되다]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어 활발한 신앙 활동을 이어갔다.

평양 천주교회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맨하탄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

미국 맨하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맨하탄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9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 근무]

평양 시내 서포역전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며 교구 행정에 참여했다.

평양 시내 서포역전 평양천주교구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 출간]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탈고하고 출간하여 천주교 교리 보급에 기여했다.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탈고, 출간하였다.

1930

[소책자 《구도자의 길》 출간]

소책자 《구도자의 길》을 출간하며 자신의 신앙적 고뇌와 길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소책자 《구도자의 길》을 출간하였다.

1931

[평양대교구 사무직 사퇴 후 경성부로 이동]

천주교 평양대교구 사무직을 사퇴하고 경성부로 내려와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천주교 평양대교구 사무직을 사퇴하고 경성부로 내려왔다.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다]

천주교 교인들의 추천으로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천주교 교인들의 추천으로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1931년부터 동성상업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1936년에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서무주임(행정실장)을 겸하였다.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출간]

천주교 한국교구설정 백주년 기념으로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출간하여 한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했다.

천주교 한국교구설정 백주년 기념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출간하였다.

1933

[경성제국대학 예과 합격]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B조에 합격했으나, 재학 중 중퇴했다.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B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 문과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

[‘가톨릭 청년보’ 편찬위원으로 참여]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간한 잡지 ‘가톨릭 청년보’의 편찬위원으로 참여하여 칼럼과 기고문을 투고했다.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원 라리보 주교와 주간 윤형중(尹亨重) 신부를 중심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보’를 발간하자 장발(張勃)·이동구(李東九)·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6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다]

박준호 교장 별세 후 천주교재단의 추천으로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조선총독부 파견 일본인 교사를 축출했다.

동성상업학교 박준호(朴準鎬) 교장이 별세하자 동성상고 서무주임으로 있던 장면은 천주교재단의 추천으로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천거되어 취임하였다.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그는 조선총독부가 감시를 위해 파견한 일본인 교사 사이고를 축출했다.

1937

[혜화유치원 원장으로 취임]

경성 혜화유치원 원장이 되어 교육 활동을 확장했다.

경성 혜화유치원 원장이 되었다.

1938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 선출 (친일 논란)]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에 선출되었으며, 이는 훗날 친일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에 선출되었다.

[비상 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 활동]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의 비상 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명동천주교회를 연맹에 가입시키고, 천주교 경성교구연맹 간사로 참여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의 비상 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 44명 중 1인으로 선임되어 명동천주교회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시켰고 같은 해 5월 14일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의 간사로 참여하였다.

1939

[계성국민학교 교장 겸임]

경성 계성국민학교 제3대 교장을 겸임하여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경성 계성국민학교 제3대 교장을 겸임하였다.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 피선]

천주교서울교구 청년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어 천주교 청년 활동을 이끌었다.

천주교서울교구 청년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41

[창씨개명을 하다]

일제 당국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라 일본식 이름인 ‘다마오카 쓰토무’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며, 이 사실은 후일 친일의 오명을 낳았다.

일제 당국의 창씨개명 강요에 따라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때 창씨개명 사실과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초청을 받은 것과 이때 촬영한 사진으로 인해 후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2공화국 당시 친일의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1942

[계성국민학교 교장직 사임]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사임하며 교육 활동의 변화를 겪었다.

계성국민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1944

[번역서 『교부들의 신앙』 출간]

번역서 『교부들의 신앙』을 출간하며 종교 서적 번역 활동을 이어갔다.

번역서 『교부들의 신앙』을 출간하였다.

[계성국민학교 교장으로 재부임]

경성 계성국민학교의 제5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여 교육계에 복귀했다.

경성 계성국민학교의 제5대 교장으로 다시 부임하였다.

1945

[미군 환영 대회 참석]

순교 복자 축일을 기하여 명동 성당에서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하는 미군 환영 대회 개최에 참석하여 통역을 맡기도 했다.

순교 복자 축일을 기하여 명동 성당에서 시민사회단체가 주관하는 미군 환영 대회 개최에 참석하였다. 한국 가톨릭이 주최한 미군 환영 대회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다.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 참석]

서울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에 참석하여 광복 후 정치 활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노기남 대주교 만찬 참석]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여 종교계 인연을 이어갔다.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며 반탁, 반공 노선을 지지했다.

이승만, 김구 등이 주도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도연에 의하면 그는 '반탁운동 등의 선봉에 섰다'고 한다.

[임정 요인 환영대회 주관]

명동 성당 문화관에서 정일형, 안재홍 등과 함께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임정 요인을 환영하는 임정 요인 환영대회 및 축연을 주관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명동 성당 문화관에서 정일형, 안재홍 등과 함께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임정 요인을 환영하는 임정 요인 환영대회 및 축연을 주관하였다.

1946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선출]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영어 구사 능력으로 미군정과의 연락 및 통역을 담당했다.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영어 구사에 능했던 그는 민주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미군정과의 연락과 통역을 맡아보았다.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선출]

이승만·김구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광복 후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승만·김구에 의해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삼의사 유골 영접에 참석]

서울역에 마중나가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고,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했다.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동성상업학교 교장직 사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정치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선출되었고, 서울시 교육위원회 위원에도 피선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출마,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서울시 교육위원회 위원에도 피선되었다.

1947

[조선적십자사 고문으로 활동]

조선적십자사 고문이 되어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대한적십자사 조선적십자사 고문이 되었다.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임명]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미 군정청 군정장관 딘 미육군 소장으로부터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48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직 사퇴]

과도정부법률에 의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해산되면서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직을 사퇴했다.

과도정부법률 제12호에 의하여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해산하여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당선]

서울 종로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 취임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 취임하였다. 강원용은 이승만이 노골적으로 지원했던 사람으로 개신교계의 이윤영과 천주교계의 장면을 꼽았다. 강원용에 의하면 장면은 이박사의 지지자라 하였다.

[UN 위원의 대한민국 국회 승인 획득]

서울을 방문한 J. A 패터슨 등 UN 대표단을 설득하여 대한민국 국회가 합법적인 단체임을 승인받았다.

윤치영, 이훈구 등과 UN한국위원회 교섭위원의 한 사람에 선출됐다. 서울을 방문한 J. A 패터슨 등 국제연합 UN 대표단 을 상대로 대한민국 국회가 합법적인 단체임을 승인해줄 것을 설득, UN 위원의 승인을 얻어냈다.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단 대표 지명]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의 대표로 지명되어 국제사회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요청할 준비를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1948년 12월)에 대표단의 대표로 지명되었고, 9월 9일 대표단의 수석 대표로 선출되어 파견되었다.

[바티칸 특사로 교황 알현 및 후원 요청]

대통령 바티칸 특사로 임명되어 로마 교황청을 방문,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한국에 대한 정신적 후원을 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교황은 유엔총회 한국 대표단 지원을 지시했다.

대통령 바티칸 특사로 임명되어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고, 바티칸의 로마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한국에 대한 정신적 후원을 청하여 승락을 받았다. 교황 비오 12세는 제3차 유엔 총회 당시에 한국 대표단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교황청에 내렸다.

[UN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 연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며 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한국 수석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장면은 유엔 총회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유엔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 획득 (세계 최초)]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개국으로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얻는 데 성공,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제3차 유엔 총회 결과는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개국으로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는 데 성공했다.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은 곧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되었다. 바티칸과 각국의 천주교 지도자들이 그를 도왔고, 유엔 총회에 파견된 자국의 대표자를 설득하기도 하였고 일부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대한민국 정부는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회 대학 설립 건의]

로마에서 예수회 총장을 방문해 면담하고 한국에 예수회 대학 설립을 건의했으며, 이는 1960년 서강대학교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에서 예수회 총장 방문·면담하고 한국에 예수회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다. 이 부탁은 뒤에 성사되어 1960년 4월 서강대학교 설립에 바티칸의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초대 주미 한국대사로 임명되다]

미국 방문 중 현지에서 주미 한국대사에 임명되어 재외공관 설치 작업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방문 중 현지에서 주미 한국대사에 임명되었고,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두르게 된 이승만은 장면으로 하여금 미국에 그대로 머물러 주미 대사관 창설 작업을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맨해튼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미국 맨해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미국 맨해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49

[제4차 유엔 총회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

제4차 유엔 총회에도 한국 대표단으로서 조병옥과 함께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제4차 유엔 총회에도 한국 대표단으로서, 조병옥(단장)과 함께 참석하였다.

[미국, 대한민국 정부 공식 승인 발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으로부터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한다는 성명을 접했으며, 한국정부 특별대표로 주한미국대사관 개설 준비에 착수했다.

장면은 미국 체류 중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으로부터 미국은 한국 정부를 승인한다는 성명을 접하였다. 미국이 가장 먼저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적, 공식적으로 승인하자 그는 한국정부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에 임명되어 주한미국대사관 개설 준비에 착수하여 외교 업무를 시작하였다.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 지시 받음]

주미 한국대사관에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을 비밀리에 실천하라는 지시를 담은 편지가 전달되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서울의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을 비밀리에 실천하라는 지시를 담은 편지가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장면 대사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의회내 극우파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미국에 무기 원조 요청]

미국 국무 장관 서리 딘 애치슨과 회담하여 무기 원조를 요청하며 한국의 안보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미국 국무 장관 서리, 딘 애치슨과 회담, 무기 원조를 요청하였다.

[38선 이북 총선거 제안에 반박 성명 발표]

미국에서 조병옥과 함께 38선 이북 측이 제안한 총선거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하며 단독 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조병옥과 함께 38선 이북 측이 제안한 총선거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터키의 대한민국 승인 본국에 보고]

본국에 터키가 8월 13일에 대한민국을 승인했으며, 호주가 8월 14일에 정식 승인할 것이라고 통보받았음을 전문으로 알렸다.

본국에 전문을 보내, 터키는 8월 13일에 대한민국을 승인하였고 호주는 8월 14일에 정식 승인한 것이라고 당해(當該) 양국 대사관으로부터 각각 통지가 왔음을 알렸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의 친일 정책 우려 서한 받음]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철수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담은 편지를 받았다.

12월 중순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그에게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바티칸 교황청 방문]

과로로 혈새병이 발병한 상황에서도 바티칸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며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과로로 혈새병(血塞病)이 발병하였고 이후 바티칸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였다.

1950

[미국에 대한(對韓)원조 재검토 요청]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버터워스를 만나 경제협력처의 대한 원조 법안 부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재검토를 요청했다.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버터워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장면은 1월 19일 경제협력처의 대한(對韓)원조에 우호적인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점이 한국내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국무부에서 이에 대해 재검토해 줄 수 있는가를 질문했다.

[유네스코 가입 신청 및 승인]

UN특사 자격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유네스코 가입을 신청하였고, 즉시 가입이 허락되었다.

UN특사 자격으로 파견 중이던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유네스코 가입을 신청하였고, 바로 가입이 허락되었다.

[태평양 동맹 체결을 위한 대통령 특사 파견]

“태평양 동맹” 체결에 관련된 사항을 의논하기 위해 호주·뉴질랜드·필리핀 파견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었다.

호주·뉴질랜드·필리핀 파견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태평양 동맹” 체결에 관련된 사항을 의논하였다.

[순방 외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필리핀 방문을 마치고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대한민국에 입국, 서울에 도착했다.

필리핀을 떠나 일본 도쿄를 경유하여 대한민국에 입국, 서울에 도착하였다.

[부인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

부인 신병 치료를 위해 자녀 2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인 신병 치료차 자녀 2인을 동반하여 출국, 미국에 건너갔다.

[한국 전쟁 발발 즉시 미국 국무성에 긴급 상황 전달]

미국 체류 중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했다.

미국에 체류 중인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전 참전 호소 연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군의 불법 남침을 규탄하고 국제 사회의 즉각적인 개입과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하였다. 북괴군의 대규모 침공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괴뢰 정권 치하에 몰락시키려는 야망에서임이 분명하며, 이런 불법 공격은 인도와 민심을 거스르는 죄악일 뿐 아니라, 국제 평화와 안전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니 만큼 안보 이사회에서 침략자들로 하여금 일체 공격을 즉각 중지케 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도록 강력히 조처해 줄 것을 호소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군 파병 요청]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며 한국 전쟁 참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재차 참석]

UN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여 한국 전쟁 관련 회의 내용을 청취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UN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였다.

[미군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 이끌어냄 (세계 최초)]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으며, 이는 한국 전쟁의 국제적 개입을 촉발했다.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UN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UN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소련의 UN 안보리 결의 무효 선언에 반박]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리크가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자, 이에 반박하여 소련의 불참 중 통과된 결의안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인 소련 대표 말리크가 이사회에 출석했다. 의장석에 앉은 소련측 대표 말리크는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 이사회의 그동안의 모든 결의가 모두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이에 장면은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 전쟁 참전 부상자를 위한 헌혈 참여]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한국 전쟁 참전 부상자를 위한 헌혈에 참여하여 인도주의적 정신을 보여주었다.

유엔 본부에서 열린 한국 전쟁 참전 부상자를 위한 헌혈에 참여하였다.

[UN 안보리에서 소련의 역선전 논파]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을 때 착석 및 발언권을 얻어 소련 대표 말리크가 주장한 ‘한국군의 북침’설과 ‘소련의 불개입’설을 노획한 소련제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며 논파했다.

영국이 안보 이사회 의장국이었다. 글랜드윈 접 영국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자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여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나는 “그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 소련 대표 말리크는 “이번 싸움은 한국 사람끼리의 싸움이지 소련은 전혀 아랑곳이 없다”며 “소련군은 이미 1947년에 완전히 북한에서 철수했고, 이번 동란에 소련서는 총 한 자루 보내 준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 미국측 대표 오스틴은 장면이 한국 전선에서 가져온 ‘1950년 소련제라는 철인’이 찍힌 소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고, 남한의 북침 주장과 소련의 불개입 주장은 논파당하였다.

[서울 수복 후 경향신문 상임고문 추대]

서울 수복 직후 경향신문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언론계와도 인연을 맺었다.

서울 수복 직후 그는 경향신문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누님 장정온 수녀 납북 소식 접함]

누님 장정온 수녀가 북한 인민군에 납치된 후 행방불명된 소식을 접하며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누님 장정온 수녀가 북한 조선인민군 인민군에 납치된 후 행방불명된 소식을 접하였다.

[제5차 UN 총회 한국대표단 수석대표로 소환]

주미 한국 대사 재직 중 제5차 UN 총회 한국대표단의 수석대표로 선임되어 서울에 소환되었다.

주미 한국 대사로 재직 중 제5차 UN 총회 한국대표단의 수석대표로 선임되어 서울에 소환되었다.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다]

주미 한국대사 재직 중 이승만 대통령의 높은 평가를 받아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주미 한국대사 재직 중 제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그가 UN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은 것과 한국 전쟁 직후 미군과 UN군의 파병설득에 성공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한편으로 이승만은 개각의 필요성을 느끼고 새로운 국무총리를 임명하여 반(反)이승만 분위기를 개선하려 했다. 이때 무임소 장관 오위영(吳緯泳)은 장면을 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제 생각으로는 장면 박사가 제일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6.25 당시의 성공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끄러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라고 말했다.

[포덤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수여]

미국에 체류 중 포덤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미국에 체류 중 포덤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1

[제2대 국무총리 취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UN 총회 문제로 귀국이 지연된 뒤, 이듬해 2월에 귀국하여 정식으로 총리직에 취임했다.

장면은 귀국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951년 2월에 귀국한 후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귀국 전까지는 사회부장관 이윤영이 부재중인 국무총리를 대신하여 국무회의를 주재하였다.

[자유당에 입당하다]

자유당이 창당되자 입당했으나, 이후 원외 자유당과 원내 자유당으로 나뉘는 시기에 원내 자유당에 속하게 되었다.

자유당이 창당되자 자유당에 입당했다. 12월에는 원외 자유당이 결성되면서 장면이 속한 자유당은 원내 자유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제6차 유엔 총회에 수석 대표로 참석]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이승만의 권유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 총회에 수석 대표로 참석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으나 “대한민국을 새로 수립하고 유엔의 승인을 받을 때에도 임자가 활약했고, 유엔 사정에도 다른 사람보다 정통하니, 이번에도 국무 총리 현직을 가진 채 수석 대표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라”는 이승만의 간곡한 권유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1952

[프랑스 파리에서 간염 치료]

간염이 발병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간염이 발병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입원 치료를 하고 귀국했다.

[간염 재발로 미군병원 입원]

귀국했으나 간염이 다시 발병하여 미군병원에 입원했으며, 이는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귀국하였으나 다시 발병하여 미군병원에 입원했다. 이때 그가 미군 병원선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귀국 후 이 대통령을 만나지도 않고 병원선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제2대 국무총리직 사퇴]

간염 치료 중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 등으로 이승만의 견제를 받게 되자, 병세 악화를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신병으로 요양 중 국무총리에서 사퇴할 뜻을 내비쳤고, 장면이 미군 병원에 입원하여 지병을 치료받고 있는 사이,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서 이승만을 실권없는 대통령으로 만든 후 장면을 내각책임제 하의 국무총리로 추대한다는 등의 소문이 파다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장면과 이승만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귀국 시에 비행장에 내려 대한민국 국무총리 서리로 있던 허정과 함께 바로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 귀국 보고를 하고, 그 후 국무 회의와 국회에서 경과 보고와 기자 회견후 장기 치료를 요한다는 미군의 진단을 이승만에게 제시하고 그 동의를 얻어 미군 병원에 입원, 국무총리를 사퇴하게 되었다.

[국무총리 사표 수리]

국무총리직 사표가 수리되며 공식적으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국무총리직 사표 수리되어 사퇴하였다.

[부산정치 파동 중 미군 병원 입원]

부산정치 파동 당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부산정치 파동 당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군 병원에 입원하였다.

1954

[민의원 선거 낙선]

서울 종로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서울특별시 서울 종로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다]

3대 국회 이후 추진된 신당운동의 일환으로 결성된 호헌동지회에 참여했다.

3대 국회이후 서서히 신당운동이 추진되면서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자 장면은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호헌동지회 참여 당시 그는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곽상훈 등과 함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를 반대했다.

1955

[김성수의 천주교 영세와 임종을 지키다]

김성수의 위독 소식을 듣고 찾아가 천주교 입신을 권유했고, 영세를 받은 김성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김성수가 수일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깨어났다. 그의 위독소식을 듣고 장면이 찾아왔다. 장면은 김성수를 찾아갔으나, 의사의 지시로 만나지 못했고 이아주를 통해 천주교에 입신하도록 권고하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성수는 이아주로부터 장면의 권유를 전해듣고 수긍하였다. 장면은 가회동 성당의 박병윤 신부와 함께 계동으로 찾아갔다. 김성수는 신부에게서 조상봉사를 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영세를 받고 바오로라 세례하고 종부성사를 하였다. 그날 장면은 서울 계동의 김성수 사저에서 김성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민주당 창당에 참여, 신파 지도자로 활동]

민주당이 창당되자 곽상훈, 박순천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

민주당이 창당되자 그는 곽상훈,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과 민주당 신파의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였다.

1956

[민주당 최고위원 선출]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당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다]

신익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신익희의 급사에도 불구하고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5.15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 구파(구 한민당 계열)에서 지지하는 김도연을 누르고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반발이 있었으나 구파인 조병옥이 같은 구파라고 김도연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는 무난히 부통령 후보로 낙점될 수 있었다. 신익희의 급서로 선거전이 이승만과 신익희의 대결에서 갑자기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로 맞상대가 바뀐 만큼 그 대결에 정면 승부를 걸기로 작정하였다. 선거에서 41.7%(401만 2654표)로 39.6%(380만 5502표)를 얻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4대 부통령 취임]

정·부통령 당선자 취임식에서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이승만의 노골적인 견제로 취임사 발표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정·부통령 당선자 취임식에서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내각책임제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하여 취임식장에서 장면이 앉을 좌석을 부여하지 않았고, 취임사 발표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장면은 간단한 성명서로 취임사를 대신하였다.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발생 (9·28 사태)]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제2차 전당 대회 연설 후 내려오던 중 최훈, 김상붕 등이 쏜 총에 왼손 관통상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서울 종로구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제 2차 전당 대회에 참석했고 연단에서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던 중에 복도에서 최훈, 김상붕 등 5인이 쏜 총에 왼손을 관통상당하였다. 손에서는 피가 흘렀으나 장면은 괜찮다고 손을 흔들며 내려왔다. 현장에 있던 김상붕 등은 “유석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고, 다른 공범들은 “해공 만세”를 외쳐서 민주당 내부의 소행인 것처럼 몰고가려 하였다. 김상붕 등 5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57

[시튼 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취득]

미국 시튼 홀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받으며 학자로서의 명예를 이었다.

미국 시튼 홀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를 받았다.

[부통령으로서 불상사에 대한 고충 피력]

각종 불상사에 대한 고충을 피력하자 다음날 자유당에서 대중을 선동하지 말라는 반박 성명을 냈다.

각종 불상사에 대한 고충을 피력하자 다음날인 2월 27일 자유당에서는 대중을 선동하지 말라고 반박성명을 냈다.

[피격 사건 관련 법정 출석 및 선처 호소]

9·28 피격 사건의 피해자 겸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으며, 저격범들에게 사형 구형이 확정되자 이승만에게 선처를 호소하여 감형을 주선했다.

3월부터 11월까지 부통령 피격 사건의 피해자 겸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였다. 그러나 최종 심리에서 장면은 저격범들에게 사형구형이 확정되자 선처를 호소하여 저격범들의 감형을 주선했다.

1958

[자유당의 부통령 계승권 삭제 개헌 추진에 반발]

자유당이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 계승권 삭제를 위한 개헌을 추진하자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자유당은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 계승권 삭제를 위한 개헌을 추진하였고, 장면은 반발하였다.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국가보안법이 국회에 통과되자 민주당 등 야당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원내 투쟁을 벌였다.

국가보안법이 국회에 통과되었다. 민주당 등에서는 보안법 개정에 반대하였고, 25일 국가보안법 반대 원내투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국회 보안법 반대투위 방문]

국회 보안법 반대투위를 방문하여 보안법 반대에 대한 대안을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국회 보안법 반대투위를 방문, 보안법 반대에 대한 대안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59

[경향신문 폐간 비난 기자회견]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자 이에 대한 비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유린이라고 논평했다.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자 경향신문 폐간에 대한 비난 기자회견을 하고, 다음날 5월 12일 CBS 기자와의 방송인터뷰 중 경향신문 폐간 조치는 인권유린이라 논평하였다.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당선]

민주당 전당대의원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어 당을 이끌게 되었다.

민주당 전당대의원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조병옥에게 아쉽게 패배하여 다시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조병옥에게 석패하여 다시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대통령 후보자 지명 경선에서 불과 세 표 차이로 패하는 바람에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서지 못하고 부통령 후보자로 결정되었다.

1960

[친일 경력 허위 전단지 및 벽보 유포로 정치적 공격 받음]

새벽 서울 시내와 각지에 '구국철혈동지회' 명의로 자신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는 허위 전단지와 벽보가 뿌려져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새벽, 서울 시내와 각지에 ‘구국철혈동지회’라는 우익단체의 명의로 지방 주요 도시 곳곳에 장면이 일제강점기에 삭발하고 국민복을 입은 채 일본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장면 박사의 일제시대 행적”이라는 제목과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라는 창씨개명이 적힌 전단지와 벽보들이 뿌려졌다.

[서울에서 대규모 정견발표회 개최]

서울에서 20여만 명의 청중 앞에서 정견발표회를 가졌고, 무개 지프를 타고 가두 퍼레이드를 벌였다.

서울에서 그는 20여만 명의 청중 앞에서 정견발표회를 가졌다. 서울에서 정견발표회를 가진 뒤 무개 지프를 타고 가두 퍼레이드를 벌였다.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 재선 실패]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3.15 부정선거로 인해 낙선하였고, 이는 전국적인 시위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3.15 부정선거로 낙선하였다. 3·15 부정선거로 전국에서는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민주구국운동 선두에 서겠다는 언명]

3.15 부정선거 후 민주구국운동의 선두에 서겠다는 언명을 했으나, 새로 당선된 정·부통령 인정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민주구국운동의 선두에 서겠다는 언명을 했다. 민주구국운동의 선두에 서겠다는 언명만 했을 뿐, 새로 당선된 정·부통령을 인정하겠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였다.

[부통령직 사임 발표]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인한 국민의 울분을 통감하며, 잔여 임기를 4개월 남기고 부통령직 사임 담화문을 발표했다.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민주당 신파 내부에서도 이승만이 퇴진하면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라며 사퇴를 만류했지만 그는 사퇴를 고집했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과 두 번째로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세 번째로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하였다.

[제5대 민의원 선거 출마]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구 을구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다.

제5대 민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구 을구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였다.

[민주당 총선 과반수 획득 자신감 표명]

기자회견에서 총선에서의 민주당의 과반수 획득은 땅짚고 헤엄치는 격이라고 자신감을 표현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총선에서의 민주당의 과반수 득은 땅짚고 헤엄치는 격이라고 언명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탈출 경위 규명 요구]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과도정부에 이승만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며 무책임한 행동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과도정부에 이승만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인책·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를 비난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자 비공식 회담을 가져 한미 관계 및 한국의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자 비공식 회담을 하였다.

[70만 대군 40만으로 감군 언명]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으로 언론 발표에서 70만 대군을 40만으로 감군할 것을 언명했으나, 군부의 반발로 취소되었다.

언론 발표에서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으로, 70만 대군을 40만으로 감군할 것을 언명하였다. 감군 발표를 하면서도 사전에 한국군이나 미국측과 사전 논의, 내부조율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주한 유엔 평화유지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미국 국방부 군사지원담당관 윌리스턴 팔머는 공식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정군을 외치는 소장파 장교들도 반대했다. 장면이 임명한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도 감군은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린다며 원칙적으로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감군 정책은 취소되었다.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다]

서울 용산 갑구에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 외교분과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5대 국회에서 그는 국회 외교분과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국토건설사업 직접 기획 및 발의]

한국 전쟁 이후 고학력자 실직 문제 해결을 위해 국토건설사업을 직접 기획, 발의하여 고학력 실직자들을 국토건설요원으로 배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 전쟁 이후 고학력자들의 실직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했고 국토건설사업을 직접 기획, 발의하였다. 이에 따라 고졸 혹은 대졸 이상의 당시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건축, 토목 등의 기술을 2주~4주간 교육한 뒤 국토건설요원으로 각지에 배치하여 국토개발 사업과 건축, 도로 공사 등의 임무를 전담하게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개혁의 중요성 역설 서한 발송]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보내 정치 경제적 개혁이 긴요함을 역설하고 경제성장이 새로운 정부의 핵심 정책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보냈다.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장면은 정치 경제적 개혁이 긴요함을 역설하면서 경제성장은 새로운 정부의 핵심정책이 될 것이라 주장하였다.

[제7대 국무총리에 선출되다]

의원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뀐 제2공화국 국회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어 대한민국 정치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내각제 의원 내각제로 권력 구조가 바뀐 대한민국 제2공화국 국회에서 국무총리에 선출되어 제2공화국의 두 번째 국무총리를 지냈다. 총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 반대 107, 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피선되었다.

[내각 조각 착수와 민주당 신·구파 갈등]

국무총리로서 내각 조각에 착수했으나, 민주당 내 신·구파간 갈등에 휘말려 윤보선 대통령과의 마찰을 겪었다.

국무총리 취임 이후 그는 반도호텔 8층에서 집무를 보았는데, 8층이 총리실이고 그 옆에 출입기자실이었다. 국무총리 취임 초부터 총리직을 아쉬워하던 민주당 구파와 갈등이 생겨 8월 21일 장면은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구파인사의 내각 입각을 요청하였으나 8월 22일에 윤보선, 김도연 등 구파와의 민주당 신·구파 조각 협상은 결렬되었다.

[신·구파 갈등 속 내각 명단 발표]

신파 10명, 구파 1명, 원외인사 2명으로 구성된 내각 명단을 발표했으나, 구파의 반발로 인한 내각 인사개편 요구에 직면했다.

신파 10명, 구파 1명, 원외인사 2명으로 구성된 내각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틀 뒤인 8월 24일 한 기자가 이 내각이 얼마나 오래 갈것 같으냐고 반문하자 그는 각료 13명의 명단을 훑어본 뒤 이 내각은 잠정적인 것이며 언제든 거국내각을 구성하겠다고 언명하였다.

[보도연맹원 희생자 유족에게 지원금 지급]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이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자, 민의원 의장 곽상훈의 주선으로 그들과 만나 면담하고 5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했다.

국민보도연맹 보도연맹원 희생자의 유족 송모씨 등이 국회의장 곽상훈을 찾아가 피해사실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민의원 의장 곽상훈의 주선으로 그들과 만나 면담하고 50만원의 지원금을 지급해 주었다.

[내각 인사 개편]

구파측의 요구를 수용하여 교통, 체신, 보사, 국방 등 4석을 구파 인사에게 주는 등 내각인사를 개편했다.

내각인사를 개편하였다. 구파측의 요구대로 교통에 박해정(朴海楨), 체신에 조한백(趙漢栢), 보사에 나용균(羅容均), 국방에 권종돈(權鐘敦) 등 4석을 주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는 계속 반발하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지방 자치 제도 전면 도입 및 민선 선거 천명]

미국식 지방 자치 제도의 도입을 선언하고 각 시의 특별시장, 직할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읍장, 면장 등을 민선으로 선출할 것을 천명하며 선거를 실시했다.

미국식 지방 자치 제도의 도입을 선언하여 선거를 실시하여 각 시의 특별시장, 직할시장, 도지사 및 시장, 군수, 구청장과 읍장, 면장까지 민선으로 선출하게 할 것을 천명하고, 선거에 들어간다. 또한 서울시의회, 직할시의회, 도의회, 시·군·구의회와 읍의회, 면의회도 두어 지방기초자치단체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민족통일연맹으로부터 통일 문제 논의 요청 받음]

민족통일연맹으로부터 통일 문제 논의를 위해 미국과 소련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민족통일연맹으로부터 통일 문제 논의를 위해 미·소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받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식 통일한국론에 반대 담화 발표]

오스트리아식 통일한국론에 반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며 대한민국의 통일 방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오스트리아식 통일한국론에 반대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한반도 중립화 통일안 반대 서신 발송]

미국의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한반도 중립화 통일안에 대한 반대의사를 피력한 서신을 발송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입장을 전달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한반도 중립화 통일안에 대한 반대의사를 피력한 서신을 발송하였다.

[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조직]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정보기관 설치를 요구하는 미국 중앙정보국 측의 요청을 수용하여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창설하였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

[공무원 기강확립 특별지시]

공무원 기강확립을 위하여 양담배 흡연금지 등 4개 특별지시를 각부에 조치하여 공직 사회의 기강을 다잡으려 했다.

공무원 기강확립을 위하여 양담배 흡연금지 등 4개 특별지시를 각부에 조치하였다.

[대규모 국토건설사업 계획 발표]

대규모 공공사업인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하여 댐, 발전소, 도로 건설 등을 목표로 하는 연 예산 400억 환 규모의 계획을 추진했다.

대규모 공공사업인 국토건설사업 계획을 발표, 댐, 발전소, 도로건설 등을 목표로 하는 연 예산 400억 환 규모의 계획을 발표했다.

[군 통수권은 내각에 있다는 의견 발표]

대통령 윤보선이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자 군 통수권은 내각에 있다는 의견을 발표하며 내각의 권한을 강조했다.

대통령 윤보선이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군 통수권은 내각에 있다는 의견을 발표하였다.

[자유당 정권 관련 경찰관 대거 해고 및 인사 개혁]

정권 인수 3개월 안에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거나 문제점이 있는 경찰관 4천500명을 해고하고, 다른 경찰관의 80%를 전출시키는 등 대대적인 인사 개혁을 단행했다.

정권 인수 3개월 안에 자유당 정권에 협조했거나 다른 문제점이 있는 경찰관 4천500명을 해고했다. 또한 다른 경찰관의 80%를 다른 지위,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켰고, 이승만 정권의 고위 공무원 5천명도 해임했다.

[9·28 사태 저격범들 옥중 면회 및 위로]

마포형무소를 방문하여 9·28 사태 저격범들을 옥중 면회하고 털옷과 영치금을 지급하며 위로했으며, 이에 감화된 암살자들은 출감 후 신앙인이 되었다.

직접 마포형무소를 방문하여 저격범들을 옥중 면회하였다. 그는 직접 털옷과 영치금을 지급하고 “추운데 고생이 많다”며 “모범수로 형기를 빨리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위로하였다.

1961

[정치의 자유 전면 허용 선언]

대국민 공개 담화에서 정치인을 풍자하거나 예술 작품의 소재로 허용해도 좋다고 선언하며 표현의 자유를 전면 허용했으나, 북한 찬양은 금지시켰다.

공개 담화에서 정치의 자유 허용을 선언했다. 대국민 공개 담화에서 그는 정치인을 풍자하거나 예술 작품의 소재로 허용해도 좋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찬양이나 긍정적인 평가는 금지시켰다.

[공민권 제한법 시행령 공포]

반민주행위자에 대한 공민권 제한 법률이 통과되어 5년 또는 7년간의 공민권 제한 조치가 취해졌으며, 자동 대상자 658명의 공민권이 박탈되었다.

공민권 제한법은 시행령이 공포되어 효력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동대상자 658명의 공민권이 박탈되었고, 전국적으로 14,000명이 심사대상자로 분류되어 특검의 심사를 받았다.

[남북 인사교류 주장에 경고]

참의원 의원 여운홍의 평화통일과 남·북한 인사교류 주장에 대해 정치인의 의견이라면 모르나 정식 제안이면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참의원 의원 여운홍이 평화통일과 남·북한 인사교류의 첫단계로서 북한의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전직 북한의 국가수반)인 김두봉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내각 부총리 홍명희 등을 남한에 초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장면은 “북한의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전직 북한의 국가수반)인 김두봉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건, 내각 부총리 홍명희 등을 남한에 초청하자는 참의원의원 여운홍의 주장은 정치인의 의견이라면 모르나 정식으로 제안한 것이면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쌀값 억제정책 공포]

쌀값 억제정책을 공포하여 서민 경제 안정에 노력했다.

쌀값 억제정책을 공포하였다.

[국토건설단 관계관 회의 주관]

국토건설단 관계관 회의를 주관하며 국토개발 사업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국토건설단 관계관 회의를 주관하였다.

[한미경제원조협정 체결]

미국과의 한미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여 경제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한미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장도영을 후임 참모총장으로 발탁]

민주당 신파의 추천을 거절하고 후임 참모총장으로 장도영을 발탁했으나, 이는 군부 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민주당 신파 인사들은 최경록의 후임으로 육군 중장 이한림을 재차 천거했으나 장면은 후임 참모총장으로 장도영을 발탁했다. 한편 로마 바티칸에 주의대사로 파견되었던 이종찬은 장면에게 박정희를 참모총장으로 기용하면 반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건의를 하였으나 장면은 이를 거절하였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 면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여 양국 간 현안과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면담했다.

[국토건설단 종강식 참석]

국토건설단 종강식에 대통령 윤보선과 함께 참석하여 국토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토건설단 종강식에 대통령 윤보선과 함께 참석하였다.

[총리 직속 시국정화단 조직]

총리 직속으로 또 하나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을 조직하여 정보 수집 및 국가 안보 강화에 나섰다.

자신의 직속으로 또하나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을 조직한다.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사퇴 권고 받음]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사퇴하라는 권고가 들어왔으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대통령 윤보선으로부터 호출, 사퇴하라는 권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장면은 화를 내며 “나의 총리직은 헌법에 의해 보장된 직책이므로 사퇴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부정축재법 관련 재계 대표들과 회담]

부정축재법에 관련 재계 대표들과 회담하여 경제 정책 및 부패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부정축재법에 관련 재계 대표들과 회담하였다.

[이후락 견제를 위한 이기호 부실장 임명]

이후락의 성품을 불신하여 이기호를 행정 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중앙정보위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 감시하도록 했다.

이기호(李岐鎬)를 행정 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하게 한다.

[민주당 총재에 선임되다]

민주당 총재에 선임되어 당내 리더십을 강화했다.

민주당 총재에 선임되었다.

[주한미국대사로부터 국토건설사업 추가 지원 약속 받음]

주한미국대사 마셜 그린을 면담하여 한국의 국토건설사업에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지원받기로 약속받았다.

장면은 매카나기의 후임으로 주한미국대사에 부임해온 마셜 그린을 면담했다. 면담에서 마셜은 한국의 국토건설사업에 1억 5천만 달러를 추가지원해주기로 약속하였다.

[일본 천황 탄신 기념일 축전 발송 (최초)]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탄신 기념일 축전을 발송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공식 축전으로 논란을 야기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탄신 기념일 축전을 보냈다. 한국의 정부 수반이 일본 천황에게 보낸 공식 축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일이다. 일본 천황 생일 기념 축전을 보낸 일로 극우 단체에서는 순회동 공관과 민주당 당사에 몰려가 장면은 친일파라며 항의 집회를 개최했다.

[5·16 군사정변 발생, 총리관저 떠나 피신]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총리관저를 떠나 미국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박정희 등이 일으킨 5·16 군사 정변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붕괴하면서 그는 4시 30분 총리관저를 떠나 미국대사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였으나 대사관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가지 못하였다. 장면은 아내와 자녀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뒤 새벽 6시경 홀로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내각총사퇴 의사 발표 및 총리직 사퇴]

3일간의 은신 후 대통령 윤보선의 군사정변 추인 소식을 접하고 수녀원을 나와 기자회견에서 내각총사퇴 의사를 발표하며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새벽 수녀원에 있던 장면은 주한 미국대사관에 계속 연락했다. 그러나 장면은 주한미국대사관에도 자신의 은신처를 밝히지 않았다.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미국 본국에 지원요청을 했으나 미국 국무부는 불개입 의사를 나타냈다. 미국 측과의 통화에서 미국의 불개입 의사를 전달받은 장면은 전화를 끊고, 오후 카르멜 수녀원을 나왔다. 대통령 윤보선이 5·16 군사 정변을 추인했다는 소식과 “올 것이 왔다”고 하는 그의 발언 소식을 접한 뒤 3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각총사퇴서를 발표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주당 정부 용공 정책 진상 발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민주당 정부의 용공 정책 진상이 발표되었고, 자신은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되어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과 합동 수사 본부에서 민주당 정부의 용공 정책 진상을 발표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지정되어 정치활동에 금지조치를 당하였다.

[용공주의 혐의 반박 인쇄물 배포]

용공주의 혐의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인쇄물 《나의 심경을 말한다》를 배포하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용공주의 혐의에 대해 그는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인쇄물 《나의 심경을 말한다》를 배포하였다.

[군사혁명재판소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

군사혁명재판소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증언했으며, 불기소 연금되었다가 11월 10일 해제되었다.

군사혁명재판소 군사 재판에 출두하여 증언하였으며 불기소연금되었다가 11월 10일 불기소 연금에서 해제되었다.

1962

[구 이주당계 사건 배후로 지목되어 법정 구속]

구 이주당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공산주의 혐의를 받고 법정 구속되었으며, 사형이 구형되었다.

구 이주당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았고 구 이주당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공산주의 혐의를 받고 재판을 받고 법정 구속, 사형이 구형되었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 선고]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감형되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보석으로 출감했다.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감형되어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나 10월 15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보석 출감]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보석으로 출감하여 일시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8월 10일 군정으로부터 입건·송치되었으나 이후 10월 15일에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63

[민주당 재건에 참여]

박순천, 오위영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며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박순천,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구 이주당계 사건 재기소 및 항소심 판결]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다시 기소되어 공산주의 혐의와 반혁명 음모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항소심에서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구 이주당계 사건으로 다시 기소되었으며, 공산주의 혐의와 반혁명 음모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 항소심 판결을 받았다.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미해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정치정화법 해당자 일부를 해제했으나, 장면은 미해제 대상에 남아 정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치정화법 해당자 192명을 추가 해제하였으나 장면 등 74명은 미해제시켰다.

1964

[번역서 『성 원선시오』 출판]

M.V. 우드게이트의 저서 《성 빈센트 바오로》를 한글로 번역한 『성 원선시오』를 출판했다.

M.V. 우드게이트(M.V.Woodgate)의 저서 《성 빈센트 바오로(St.Vincent de Paul)》의 한글 번역한 『성 원선시오』를 출판하였다.

1965

[천주교 혜화동 교회 평의회 회장 피선]

천주교 혜화동 교회 평의회 회장에 피선되어 종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천주교 혜화동 교회 평의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동료 정치인인 박순천, 현석호, 조재천 등을 전도하여 천주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김포공항에서 이승만 시신 영접에 참석]

김포공항에서 비행기편을 통해 운구되는 이승만 시신 영접에 참석했으며, 7월 27일 국민장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김포공항을 방문, 비행기편을 통해 운구되는 이승만 시신 영접에 참석한 뒤, 7월 27일 ‘이승만 박사 국민장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66

[지병 악화로 성모병원에 입원]

지병인 간염과 당뇨병 등의 악화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지병인 간염과 당뇨병 등의 악화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였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치정화법 대상자 해제]

병세가 악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장면을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제시켜 주었다.

박정희 정권은 장면을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제시켜 주었다.

[서울 자택에서 지병 합병증으로 사망]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염, 당뇨병 등의 합병증이 악화되어 향년 68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과 달리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염, 당뇨병 등의 합병증이 악화되어 향년 68세로 숨졌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례에 따라 조촐한 가족장을 할 것을 유언했으나 장례는 정부에 의해 국민장(國民葬)으로 정해졌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장례 거행]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이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천보산의 천주교 혜화동교회 포천묘원에 안장되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고, 6월 12일 서울시에서 시가행렬과 노제를 거쳐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3리 산14-1(현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3리 산 14-1) 윗용산골 천보산의 천주교 혜화동교회 포천묘원에 안장되었다.

1999

[김대중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대중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으며, 이는 그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의 의미를 지닌다.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대중 정부에 의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운석 장면선생 탄신100주년 기념미사’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직접 미사에 참여해 “장 박사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고 혼란했다는 말은 5·16 쿠데타 세력이 쿠테타 정당화를 위해 국민의 머리를 세뇌시킨 결과”라며 “장 박사님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오늘 건국훈장 추서로 말끔히 씻겨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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