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군사 사건, 무장 충돌, 대남 공작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0:44
1968년 10월 말부터 약 두 달간 북한 무장 공비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입니다. 한국전쟁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도발로, 북한 공비 113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으며, 한국군과 민간인 포함 40명 이상 사망, 30명 이상 부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규모 간첩 침투의 변화를 가져왔고, 한국의 반공 태세 강화 및 향토예비군 창설, 군 현대화를 촉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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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1960년을 전후하여 북한의 간첩들은 이전과 달리 간단한 무기를 휴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대남 공작 방식의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대량 무장간첩 남파 주창]
경찰 당국은 대한민국 정국의 혼란을 틈타 북한이 대량의 무장간첩을 산악지대나 해상으로 남파하여 학원 등 각계각층에 침투 공작을 시도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 당국은 대한민국 정국의 혼란을 기회로 북한이 대량의 무장간첩을 산악지대나 해상으로 남파시키고 각계각층, 특히 학원 내에 침투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남한 사회에 큰 불안감을 조성했습니다.
[군인 복장 간첩 목격]
가평군에서 대한민국 군인 복장을 한 무장간첩 5명이 목격되어, 간첩들의 위장 침투 수법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가평군에서 대한민국 군인 복장을 하고 계급장을 단 무장간첩 5명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이는 북한 간첩들이 남한 사회에 혼란을 주기 위해 다양한 위장 전술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61
[김일성의 대남 공작 평가]
김일성은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4·19 혁명 이후의 사회 혼란 시기에 공산 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를 전위적 공산당 조직 부재로 평가하며 대남 공작 전술 변화를 시사했습니다.
1961년 9월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4·19 혁명 이후의 사회 혼란 시기에 공산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한 주된 원인이 전위적 집단 공산당 조직의 부재에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북한의 대남 공작 전술이 점차 게릴라전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965
[무장간첩 침투 방식 고도화]
1960년대 중반을 전후로 무장간첩 수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주로 중무장한 소형 쾌속정이나 잠수정을 타고 침투하며 위조 신분증을 소지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을 전후로 무장간첩의 수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 시기의 무장간첩들은 통상 어선으로 위장한 중무장한 소형 쾌속정이나 소형 잠수정을 타고 침투했으며, 대한민국 국군이나 민간인 복장에 위조된 신분증과 명함을 소지하는 등 침투 수법이 더욱 고도화되었습니다. 무기로는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단검 등을 사용하고 무전기를 휴대했습니다.
1967
[삼척 무장간첩 출몰 및 교전]
새벽 삼척 지역에서 무장간첩선과 20여 명의 무장간첩이 발견되어 경찰과 교전, 2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었습니다.
1967년 6월 3일 새벽, 삼척 지역에 무장간첩선과 20여 명의 무장간첩이 출몰하여 경찰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장간첩 2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었으며, 이는 당시 무장간첩 침투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67년 6월 19일 오전, 울진 지역에서도 무장간첩이 출몰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이는 동해안을 통한 무장간첩 침투가 빈번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해당 지역의 긴장감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전국적 무장간첩 교전 발생]
전국 7곳에서 3~8명이 조를 이룬 무장간첩들이 경찰과 교전을 벌여 19명이 사살되고 3명이 생포되었으며, 민간인 포함 11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했습니다.
1967년 6월 한 달 동안 전국 7곳에서 3명에서 8명이 조를 이룬 다수의 무장간첩이 경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교전으로 무장간첩 19명이 사살되고 3명이 생포되었으며, 민간인을 포함한 11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하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여 당시의 심각한 안보 상황을 드러냈습니다.
[무장간첩 출몰 3백 명 이상]
8월까지 연 3백 명이 넘는 무장간첩이 출몰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며, 간첩들은 남한 협조자들에게 시계와 돈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1967년 8월까지 한 해 동안 3백 명이 넘는 무장간첩이 전국 각지에서 출몰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이들 간첩들은 남한 내 협조자들에게 시계나 돈을 제공하며 협력을 유도하는 등 다양한 대남 공작 활동을 펼쳤습니다.
1968
[1·21 사태 발생]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30여 명의 무장간첩이 서울에 침투하여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 대부분 사살되는 1·21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30여 명 무장간첩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서울에 침투하여 경찰과 격렬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간첩이 사살되었으며, 우리 측도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는 당시 북한의 대남 도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력 강화 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경전선 개통식에서 "금년 내 무기 공장을 세워 전국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겠다"고 밝히며 국방력 강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1968년 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전선 개통식에 참석하여 연설 중 "금년 내에 무기 공장을 세워 전국 250만 재향군인을 무장시키겠다"고 언급했습니다. 이는 당시 고조되던 북한의 대남 도발에 대응하여 대한민국의 자주 국방력을 강화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입니다.
[향토예비군 설치법 의결]
국무회의에서 향토예비군 설치법이 의결되면서 대한민국 전역에 걸쳐 예비군을 편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1968년 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향토예비군 설치법이 의결되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지속적인 대남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지역 방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법적 조치로, 향후 대규모 향토예비군 편성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M16 소총 도입 계획 발표]
국방부가 각 사단의 기동타격대에 M16 자동소총을 지급할 예정이며, 전군의 소화기를 M16 소총으로 교체하기 위한 교섭을 벌이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1968년 2월 24일, 대한민국 국방부는 각 사단의 기동타격대에 M16 자동소총을 지급할 예정이며, 나아가 대한민국 국군의 소화기를 M16 소총으로 전면 교체하기 위한 교섭을 미국 측과 진행 중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국군의 전투력 현대화와 무장간첩 침투에 대한 대응력 강화를 목표로 한 중대한 조치였습니다.
1968년 3월 29일, 220여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향토예비군 편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계속되는 무장간첩 침투와 대남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전 국민적인 방위 체제 구축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 관련 무장간첩 소탕]
간첩선을 타고 서귀포시에 침투하여 통일혁명당 사건을 일으키려던 무장간첩 14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습니다.
1968년 8월 21일, 간첩선을 타고 서귀포시에 침투하여 통일혁명당 사건을 일으키려던 무장간첩 14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습니다. 이는 1·21 사태 이후에도 계속되는 북한의 대남 침투와 공작 시도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968년 무장간첩 156명 사살 발표]
간첩대책본부는 1·21 사태 이후 남파되는 간첩의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해당 연도에만 총 156명의 무장간첩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1968년 8월 30일, 간첩대책본부는 1·21 사태 이후로 남파되는 간첩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당해에만 총 156명의 무장간첩이 사살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당시 북한의 대남 도발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무장 공비 1차 침투 (울진)]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의 시작점으로, 무장공비 2개 조 30명이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에 1차로 침투했습니다.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무장공비 2개 조 30명이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1차 침투에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이후 2개월간 광범위한 게릴라전을 벌이게 될 대규모 침투의 선봉대였습니다.
[무장 공비 2차 침투 (울진)]
무장공비 2개 조 30명이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2차 침투를 감행했습니다. 이는 생포된 공비의 진술에 따라 훈련 과정과 침투 경로가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1일, 1차 침투에 이어 무장공비 2개 조 30명이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2차 침투를 감행했습니다. 생포된 무장공비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1기지에서 3개월간 유격 훈련을 받고 10월 30일 원산에서 배로 출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무장 공비 3차 침투 (삼척) 및 민간인 피해]
무장공비 4개 조 60명이 삼척 원덕면 월촌리 고포 해안으로 3차 침투에 성공했으나, 해상 및 해안 경계병에게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울진에서는 우체부가 납치 후 살해당했습니다.
1968년 11월 2일, 무장공비 4개 조 60명이 삼척 원덕면 월촌리 고포 해안으로 3차 침투에 성공했습니다. 비록 해상 및 해안 경계병에게 발견되었으나 아군의 조치 미흡으로 침투를 막지 못했습니다. 같은 날 울진에서는 우체부가 무장공비에게 납치된 뒤 난자되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울진 주민 신고 및 공비 만행 발생]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했으며, 무장공비 30여 명이 고수동에 침입해 주민들을 강제 집결시키고 북한을 찬양하며 반항하는 주민을 살해했습니다.
1968년 11월 3일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했습니다.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 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하며,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신고 시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했고,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1968년 11월 3일에서 4일 사이 울진 지역에서 수색 작전을 벌이던 중 무장간첩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을종사태 선포 및 민간인 피해, 타 지역 공비 소탕]
대간첩대책본부는 11월 4일 정오를 기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여 대대적인 토벌 작전 돌입을 알렸습니다. 삼척에서는 볏단을 지고 귀가하던 민간인 1명이 기관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같은 날 중부전선 등 다른 지역에 침투한 공비 11명도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4일 정오, 대간첩대책본부는 북한 무장공비 침투에 대응하여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며 군대·경찰·향토예비군 합동 토벌작전이 시작되었음을 공식화했습니다. 같은 날 삼척에서는 볏단을 지고 귀가하던 민간인 1명이 무장공비의 기관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중부전선 3개 지역, 동부전선 1개 지역, 서부 해안지대인 서산에 침투한 무장공비 11명이 사살되었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첫 보도]
대간첩대책본부는 북한 무장공비 30명 내외가 11월 2일 밤 울진군 북면 마을에 침투하여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첫 공식 보도했습니다.
1968년 11월 5일 오후, 대간첩대책본부는 30명 내외의 북한 무장공비가 11월 2일 밤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마을에 동해안을 통하여 침투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대·경찰·향토예비군이 합동으로 토벌작전 중임이 국민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울진 교전: 공비 3명 사살, 한국군 2명 사망]
울진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고, 한국군 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 공비는 6명이 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6일, 울진 지역에서 무장공비 소탕 작전 중 공비 3명이 사살되었으나, 아쉽게도 한국군 2명이 전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6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울진 및 중동부전선 공비 소탕]
울진에서 무장공비 6명이 추가로 사살되었고, 중동부전선에 침투한 무장공비 5명도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8일, 울진 지역에서 무장공비 6명이 사살되었으며, 같은 날 밤 중동부전선에 침투한 무장공비 5명도 모두 사살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광범위하게 벌어지던 대간첩 작전의 일환으로, 침투 공비 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을 보여주었습니다.
[울진 공비 사살 및 삼척 예비군의 공비 생포]
울진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고, 삼척에서는 향토예비군 일행이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968년 11월 9일, 울진 지역에서 수색 작전 중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같은 날 삼척에서는 향토예비군 일행이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하며 대간첩 작전에서 향토예비군의 중요한 역할을 입증했습니다.
1968년 11월 10일, 울진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소탕 작전이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68년 11월 11일, 강추위가 몰아치는 삼척 지역에서 군경 합동 수색대가 무장공비 10명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험준한 산악 지형과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대간첩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삼척 공비 3명 사살 및 울진 공비 생포]
삼척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어 누적 사살 공비는 28명이 되었고, 울진에서는 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했습니다.
1968년 11월 12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어 누적 사살된 공비 수는 28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같은 날 울진에서는 수색대가 작전 중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하며 공비들의 침투 목적과 조직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국방부, 공비 규모 및 중간 피해 현황 발표]
국방부 장관은 강원도와 경상북도에 침투한 무장공비 규모를 약 60명으로 추정하며, 13일 오전까지 공비 28명 사살, 한국군 5명 사망, 민간인 4명 사망 등 중간 피해 현황을 발표했습니다.
1968년 11월 13일,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은 당시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가 15명 1조로 구성된 4개 조, 약 60명 정도라고 발표했습니다. 대간첩대책본부는 이날 오전까지 무장공비 28명을 사살했으며, 한국군은 5명 사망에 7명 부상, 민간인은 4명 사망에 2명 부상하는 등 중간 피해 현황을 발표했습니다.
[삼척에서 민간인 일가족 피살]
삼척에서 일가족 2명이 무장공비에게 돌과 칼에 피살되는 등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68년 11월 14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의 만행으로 일가족 중 2명이 돌과 칼에 의해 피살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총 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등 무고한 양민에 대한 공비들의 잔혹한 살상 행위가 이어졌습니다.
[공비 2명 사살 및 예비군, 민간인 사망]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2명을 사살했습니다. 명주에서는 예비군 1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습니다.
1968년 11월 15일, 합동수색대가 수색 작전 중 무장공비 2명을 사살했습니다. 명주 지역에서는 예비군 1명이 작전 중 사망하고 민간인 1명도 사망하는 안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명주 및 삼척 공비 사살]
명주에서 예비군이 무장공비 1명을 사살하여 누적 사살 공비는 31명이 되었습니다. 삼척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16일, 명주 지역에서 향토예비군이 무장공비 1명을 사살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31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같은 날 삼척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17일, 울진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는 등 소탕 작전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1968년 11월 18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면서 침투 공비에 대한 압박이 계속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19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에게 신고하려던 민간인 1명이 붙들려 끌려다니다가 결국 피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공비들의 잔혹성과 주민들의 두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명주 및 삼척 공비 사살]
명주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고, 삼척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누적 사살 공비는 39명이 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21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고, 삼척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는 등 대간첩 작전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39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삼척 공비 사살 및 국회 논의]
삼척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고, 신민당 김대중 의원은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울진·삼척 간첩 침투를 '제2의 월남화 작전 전초전'으로 보고 반공 태세 강화를 촉구했습니다.
1968년 11월 22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는 소탕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날 대한민국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신민당 김대중 의원은 울진·삼척 간첩 침투 사건을 '제2의 월남화 작전의 전초전'으로 보아야 한다고 언급하며, 농촌 경제의 몰락을 지적하고 정부에 반공 태세를 재정비·강화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1968년 11월 23일, 삼척 지역에서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하여 공비들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68년 11월 24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면서 공비 소탕 작전이 계속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영월 민간인 피살 및 공비 사살]
영월에서 민간인 일가족 중 일부가 기관총에 피살당하고 2명은 중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또한 무장공비 4명이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25일, 영월 지역에서 무장공비의 만행으로 민간인 일가족 중 일부가 기관총에 피살당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날 무장공비 4명도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1월 26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 수는 49명으로 집계되며 소탕 작전의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양양 공비 사살 및 삼척 공비 생포]
양양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었고, 삼척에서는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했습니다.
1968년 11월 27일, 양양 지역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같은 날 삼척에서는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여 대간첩 작전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선 공비 사살 및 삼척 공비 생포]
정선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고, 삼척에서는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했습니다.
1968년 11월 28일, 정선 지역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삼척에서는 합동수색대가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는 데 성공하며 공비들의 침투망과 동선 파악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정선 공비 사살, 평창 민간인 사망 및 중간 발표]
정선에서 무장공비 4명이 사살되었고, 평창 사찰에서 노파 1명이 난자되어 사망했습니다. 대간첩대책본부는 공비 58명 사살, 2명 생포, 한국군 및 예비군 33명, 민간인 16명 사망 등 중간 피해 현황을 발표했습니다.
1968년 11월 29일, 정선 지역에서 무장공비 4명이 사살되었습니다. 평창에서는 사찰에 침입한 무장공비에 의해 노파 1명이 난자되어 사망하는 잔혹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날 대간첩대책본부는 무장공비 58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며, 한국군과 예비군 33명, 민간인 16명 등 총 4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하는 중간 피해 현황을 발표하며 소탕 작전의 진행 상황을 알렸습니다.
1968년 11월 30일, 평창 지역에서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습니다. 명주 지역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는 등 공비들의 북상 저지를 위한 작전이 계속해서 펼쳐졌습니다.
1968년 12월 1일, 정선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64명으로 증가하며 소탕 작전의 막바지로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삼척 공비 사살 및 장성 예비군 오인 사격]
삼척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고, 장성에서는 예비군이 민간인 1명을 사살하여 경찰서에 구속되는 안타까운 오인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1968년 12월 3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같은 날 장성에서는 향토예비군이 민간인 1명을 오인 사격하여 사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해당 예비군은 경찰서에 구속되었습니다. 이는 긴박한 대간첩 작전 중 발생할 수 있는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삼척 공비 자수 및 공비 1명 사살]
삼척에서 무장공비 1명이 자수했고,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누적 66명 사살, 5명 생포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1968년 12월 7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자수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이 날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이 시점까지 누적 66명의 공비가 사살되고 5명이 생포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8일, 수색 작전 중 무장공비 1명이 추가로 사살되었습니다.
[이승복 일가족 학살 사건]
평창 한 민가에 침입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이승복 일가족 4명이 돌과 칼에 피살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무장공비들이 한 민가에 침입하여 이승복 일가족에게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이승복 군을 포함한 4명의 가족이 돌과 칼에 피살되었고, 2명은 중상을 입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며 반공 의식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주 공비 사살 및 군사정전위 공비 만행 규탄]
명주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어 누적 사살 공비는 69명이 되었습니다.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는 유엔군측이 무장공비 침투 행위를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야만적인 위반으로 규탄했습니다.
1968년 12월 10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69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같은 날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유엔군측 우드워드 소장은 무장공비 침투 행위를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야만적인 휴전 위반'이라고 강력히 비판하며, 사살된 공비의 사진, 위조지폐, 노동당 입당원서 등 증거물과 노획 장비를 제시했습니다.
[클레이모어 이용 공비 사살 및 M16·헬기 인수식]
무장공비 2명이 클레이모어 사용으로 사살되어 누적 7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서울 여의도에서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 계획에 따라 M16 자동소총 및 UH-1H 헬리콥터 인수식이 열렸습니다.
1968년 12월 12일, 무장공비 소탕 작전 중 클레이모어를 사용하여 무장공비 2명이 사살되었고, 누적 사살 공비는 71명이 되었습니다. 같은 날 서울 여의도에서는 한국군 장비 현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M16 자동소총 및 UH-1H 헬리콥터 인수식이 개최되었습니다.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에 수만 정의 M16 소총과 수 대의 UH-1H 헬리콥터를 넘기는 문서에 서명했으며, 이 장비들은 대간첩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1968년 12월 13일, 수색 작전 중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같은 날 인제 지역에서도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는 등 동시다발적인 소탕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14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소탕 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삼척 공비 자수 및 평창 공비 사살]
삼척에서 무장공비 1명이 자수했고, 평창에서는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민간인에게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1968년 12월 15일, 삼척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자수했습니다. 같은 날 평창에서는 무장공비 3명이 사살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고 민간인도 부상을 당하는 등 우리 측의 인명 피해도 발생했습니다.
[평창 무장공비 1명 사살]
평창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어 누적 78명 사살, 4명 생포, 2명 자수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1968년 12월 16일, 평창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이 시점까지 누적된 성과는 공비 78명 사살, 4명 생포, 2명 자수로 집계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17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 1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전 과정에서 한국군 1명이 중상을 입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명주 민간인 피살 및 삼척 공비 7명 사살]
명주에서 신고하려던 민간인 1명이 피살되고 1명이 총탄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삼척에서는 무장공비 7명이 사살되어 누적 86명 사살 기록을 세웠습니다.
1968년 12월 19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에게 신고하려던 민간인 1명이 붙잡혀 피살당하고, 다른 민간인 1명은 총탄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같은 날 삼척에서는 무장공비 7명이 사살되었으며, 이 중 1명은 향토예비군이 사살하는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로써 누적 사살된 무장공비는 86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명주 해병대·예비군 공비 소탕 및 추가 사살]
명주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병대와 예비군이 무장공비 3명을 사살했습니다. 또한 무장공비 8명, 1명, 1명이 추가로 사살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20일, 명주 지역에서 무장공비 출현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병대와 향토예비군이 합동 작전으로 무장공비 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날 전국 각지에서 무장공비 8명, 1명, 1명이 추가로 사살되는 등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진행되었습니다.
[양양 공비 6명 사살 및 누적 소탕 현황 발표]
양양에서 무장공비 6명이 사살되었고, 시체 1구가 추가로 발견되어 누적 사살 공비는 106명, 생포 5명, 자수 2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22일, 양양 지역에서 무장공비 6명이 사살되었으며, 추가로 공비 시체 1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로써 무장공비 소탕 작전의 누적 현황은 106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로 집계되며, 침투 공비 대부분이 소탕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을종 사태' 해제]
무장공비 침투로 인해 선포되었던 '을종 사태'가 0시를 기해 강원도 전역에서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25일 0시를 기해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으로 인해 선포되었던 '을종 사태'가 강원도를 포함한 모든 관련 지역에서 완전히 해제되었습니다. 이는 약 두 달간의 치열했던 대간첩 작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조치였습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120명 전원 소탕 작전 성공]
무장공비 4명이 추가 사살되어 침투했던 무장공비 120명 전원이 소탕되었음을 공식 발표하며 작전이 종료되었습니다.
1968년 12월 28일, 무장공비 4명이 추가로 사살되었습니다. 이로써 침투했던 무장공비 120명 전원이 약 두 달간의 치열한 소탕 작전 끝에 모두 사살 또는 생포되면서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측도 군인, 경찰, 일반인 등 20여 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습니다.
1969
[한국군 작전지휘권 일부 이양 교섭 시작]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단기 기습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유엔군 산하의 한국군 작전지휘권 중 '방위와 관련된 부분적인 작전권의 일부 이양'을 미국 측과 교섭 중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1969년 1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의 단기 기습공격에 '기동성 있고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유엔군 산하의 한국군 작전지휘권 중 '방위와 관련된 부분적인 작전권의 일부 이양'을 미국 측과 교섭 중에 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이는 한국군이 대간첩 작전장비 중 일부라도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무장 공비 소탕 유공자 포상]
정부는 무장 간첩을 사살 또는 생포한 44명에게 무공 훈장을 수여하는 등 총 146명의 장병에게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했습니다. 대간첩 작전을 도운 민간인 5명과 향토예비군 4명도 포상받았습니다.
1969년 1월 22일, 대한민국 정부는 무장 간첩 소탕 작전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유공자들을 포상했습니다. 무장 간첩을 사살하거나 생포한 44명에게는 무공 훈장이 수여되었고, 이를 포함해 총 146명의 장병이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또한 대간첩 작전을 적극적으로 도운 민간인 5명과 향토예비군 4명에게도 포상이 주어져 국가 안보에 대한 기여를 인정했습니다.
[수소 이탈 사병 사형 선고]
보통군법회의에서 무장 간첩 침투 중에 수소를 이탈한 사병 2명에게 수소이탈죄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1969년 2월 25일 열린 보통군법회의에서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당시 수소(守所)를 이탈한 사병 2명에게 수소이탈죄가 적용되어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의 군기 문란 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전사 장병 무공 훈장 수여 및 부대 표창]
무장 공비 소탕 중 전사한 장병 17명에게 무공 훈장이 수여되었고, 공수비행단과 구조비행대대가 부대 표창을 받았습니다.
1969년 3월 6일,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소탕 작전 중 전사한 장병 17명에게 무공 훈장이 수여되어 희생을 기렸습니다. 또한 공수비행단과 구조비행대대가 작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대 표창을 받았습니다.
[어린이 반공교육 보충교재 제작 발표]
문교부는 어린이들의 반공 정신 고양을 위해 국민학교 4·5·6학년용 반공교육 보충교재를 제작·발행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1969년 3월 19일, 대한민국 문교부는 어린이들의 반공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4·5·6학년용 반공교육 보충교재를 3월 중으로 제작·발행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무장 공비 침투 사건 이후 강화된 반공 교육의 일환이었습니다.
[미국의 대규모 특별군사지원 약속]
미국 정부가 한국의 대간첩작전장비 개선 및 강화를 위해 1·21 사태 이후 약속한 1억 달러 추가 군사지원 외에 1억 달러가 넘는 특별군사지원을 약속했습니다.
1969년 4월, 미국 정부는 한국의 대간첩작전장비 개선 및 강화책의 일환으로 1·21 사태 이후 약속했던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지원 외에 1억 달러가 넘는 특별군사지원을 약속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안보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미 군사 협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원 예비군 공무원 인정, 국가 배상 판결]
서울민사지방법원, 동원 기간 중 총기 오발로 사망한 예비군을 국가배상법상 공무원으로 인정하여 국가가 174만여 원을 배상할 것을 판결했습니다.
1969년 5월 23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열린 손해배상청구소송 선고공판에서, 동원 기간 중 총기 오발로 사망한 향토예비군을 국가배상법에 규정된 공무원으로 인정하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 판결에 따라 국가가 유가족에게 174만여 원을 배상할 것이 결정되어, 예비군의 희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민간인 부역 혐의 유죄 선고]
춘천지방법원에서 무장 간첩에 부역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민간인 11명에게 징역 1년에서 5년까지의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1969년 5월 27일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무장 간첩 침투 당시 부역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된 민간인 11명에게 징역 1년에서 5년까지의 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민간인들에게도 엄중하게 적용되던 반공법의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의 한국군 현대화 지원 계획 발표]
미국 국방차관은 한국 향토예비군의 무장을 위해 M1 소총 70만 정을 지원하고, 북한의 AK-47에 대비해 수년 내 M16 소총 공장을 지을 계획임을 언급했습니다.
1969년 6월 12일, 미국 국방차관은 대한민국 향토예비군의 무장을 위해 M1 소총 70만 정을 지원할 것이며, 북한군의 AK-47 무장에 대비하여 1천만 달러를 들여 수년 내에 M16 소총 공장을 한국에 건설할 계획임을 언급했습니다. 이는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방어력 강화를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발표였습니다.
[F-4D 팬텀 전폭기 인수 시작]
대한민국 공군이 미국으로부터 F-4D 팬텀 전폭기를 인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전폭기는 대한민국 공군의 전력을 대폭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9년 8월, 대한민국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F-4D 팬텀 전폭기를 인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성능 전폭기는 대한민국 공군의 제공권을 강화하고 대북 억지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공군 팬텀 대대 창설]
대한민국 공군에 팬텀 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는 최신예 F-4D 팬텀 전폭기를 운영할 전문 부대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1969년 9월, 대한민국 공군에 F-4D 팬텀 전폭기를 운영하는 팬텀 대대가 창설되었습니다. 이는 공군의 현대화와 전투력 강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북한의 공중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해군 고속함 도입 예정 발표]
대한민국 해군이 해상 및 연안 경비 강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3인치 포로 무장한 250톤급 PGM 고속함 수 척을 연내 도입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1969년 9월, 대한민국 해군이 해상 및 연안 경비 강화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3인치 포로 무장한 250톤급의 PGM 고속함 수 척을 연내 도입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이는 무장간첩선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해군력 증강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북한 대남 전술 변경 및 침투 증가]
북한에서 민보상, 총참모장, 대남공작책 등이 숙청되고 대남 침투 형식이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변경되었으나, 침투 횟수와 간첩 수는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1968년 11월, 북한에서는 울진·삼척 사건의 책임으로 민보상, 총참모장, 대남공작책 등이 숙청되었고, 그 전후로 대남 침투의 형식이 대규모에서 소규모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침투 횟수는 증가하고 전체 남파 간첩의 수도 늘어나면서 북한의 대남 도발 기조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69년 북한 간첩 침투 현황 발표]
대간첩대책본부는 1969년 한 해 동안 총 153건 367명의 북한 간첩 침투가 있었고, 이 중 93명이 사살되고 79명이 생포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 경찰, 민간인 등 총 46명이 사망했습니다.
1969년 12월 29일 대간첩대책본부 발표에 의하면, 1969년 한 해 동안 총 153건에 367명의 북한 간첩이 침투했으며, 그중 93명이 사살되고 79명이 생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군인 23명, 경찰 7명, 민간인(예비군 4명 포함) 16명 등 총 46명이 사망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울진·삼척 사건 이후 북한의 대남 침투가 소규모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강도가 약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70
[수소 이탈 사병 무기징역 확정]
무장 간첩 침투 중 수소를 이탈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던 사병 2명에 대한 상고심 판결 공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1970년 1월 27일 열린 상고심 판결 공판에서, 무장 간첩 침투 중 수소를 이탈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던 사병 2명에 대한 형이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군 형법의 엄중함을 보여주면서도, 최종심에서 감형된 사례였습니다.
[민간인 부역 혐의 3명 무죄 확정]
대법원 판결에서 무장 간첩들에 부역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민간인 3명에게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1970년 2월 10일 대법원 판결에서 무장 간첩들에게 부역 행위를 한 혐의로 기소되었던 민간인들 중 3명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이는 간첩의 위협에 못 이겨 편의를 제공한 경우를 고려한 판결로 해석됩니다.
1971
[1971년 북한 간첩 침투 현황 발표]
대간첩대책본부는 1971년 1월부터 11월 말까지 총 59회에 걸쳐 177명의 북한 간첩이 침투했으며, 이 중 68명이 사살되고 35명이 생포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군경과 민간인 총 39명이 사망하고 76명이 부상했습니다.
1971년 12월 20일 대간첩대책본부는 1971년 1월부터 11월 말까지 총 59회에 걸쳐 177명의 북한 간첩이 침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중 68명이 사살되고, 자수 4명, 귀순 3명을 포함하여 35명이 생포되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군인 30명, 경찰 3명, 민간인(예비군 2명 포함) 4명 등 총 39명이 사망했으며, 군인 54명, 경찰 2명, 예비군 2명, 민간인 18명 등 총 76명이 부상하는 등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