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부통령, 정치인, 군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6- 00:08:19
해리 S. 트루먼은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이자 제34대 부통령입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성공적으로 종결시켰습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무기 사용을 명령한 국가 원수이며, 냉전 초기 반공 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고 한국 전쟁에 유엔군 참전을 주도하며 서방 세계의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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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미국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 해리 S. 트루먼 출생]
미주리주 라마에서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이 될 해리 S. 트루먼이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시력이 나빠 사관학교 진학은 포기했지만, 역사책을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습니다.
1884년 5월 8일, 해리 S. 트루먼은 미국 미주리주 라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졌고, 이 때문에 사관학교 진학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력 검사표를 외워 미주리주 소위 방위군에 임관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대위로 제대했습니다.
1919
[사랑과 도전: 트루먼의 결혼과 사업 실패]
해리 S. 트루먼이 베스 트루먼과 결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야심 차게 시작한 남성복 가게는 3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으며 첫 사업에서 쓴맛을 보았습니다.
1919년, 해리 S. 트루먼은 베스 트루먼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남성복 가게를 열며 사업가로서의 길을 모색했으나, 3년도 채 되지 않아 가게가 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정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1922
[사업 실패 딛고 정치 입문: 트루먼의 판사 시절]
사업 실패 후 트루먼은 정치계에 뛰어들어 1922년부터 1934년까지 판사로 봉사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했고, 이는 훗날 연방 상원의원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남성복 가게 사업 실패 후, 해리 S. 트루먼은 정치계에 투신하여 1922년부터 1934년까지 판사로서 지역 사회에 봉사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가 연방 상원의원의 길을 걷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4
[지방 정치인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트루먼, 새로운 도전]
트루먼은 1934년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습니다. 이후 국방위원장까지 맡는 등 꾸준히 활동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1934년, 해리 S. 트루먼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첫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습니다. 그는 1944년까지 연방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국방위원장까지 맡았지만,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는 상원의원은 아니었습니다.
1945
[미국의 34대 부통령, 해리 S. 트루먼 취임]
해리 S. 트루먼이 미국의 제34대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부통령의 임기는 불과 82일,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1945년 1월 20일, 해리 S. 트루먼은 미국의 제34대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는 격동기였으며, 그의 부통령 임기는 단 82일에 불과했습니다.
[부통령에서 대통령으로: 루스벨트 서거 후 트루먼, 미국의 운명 짊어지다]
부통령 취임 82일 만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해리 S. 트루먼이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그는 전시 상황에서 급변하는 세계 질서 속 미국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습니다.
1945년 4월 12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는 부통령이 된 지 불과 82일 만이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연합국을 이끌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핵무기 사용: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명령]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의 조속한 종결을 위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핵무기를 전쟁에 사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투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사건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에 수많은 인명 피해와 방사능 고통을 야기하며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두 번째 핵무기 사용: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명령]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결국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45년 8월 9일, 일본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에도 항복하지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습니다.
[미군정, 한반도 남부 통치 시작]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군은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을 수립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까지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에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미군정)을 수립하고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은 자체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남한 사회에 이식하려 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및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는 등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까지 이어졌습니다.
1947
[공산주의 확산 저지: 트루먼 독트린 선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공산 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수호하려는 모든 국가를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반공 외교 정책을 공식화한 것으로,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며 미국의 외교 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목적은 한 사람이 독재정치를 하는 공산 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선언은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봉쇄 정책을 공식화했으며,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대규모 경제 지원을 시작으로 냉전 체제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는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1948
[모두의 예상을 뒤엎다: 트루먼, 대통령 재선 성공]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해리 S.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이 소식은 시카고 트리뷴이 '공화당 후보 듀이, 트루먼에 승리하다'라는 역사적인 오보를 내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습니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해리 S. 트루먼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열세였으나, 다음날 아침 자신의 승리를 알리는 소식에 잠을 깼습니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은 '공화당 후보 듀이, 트루먼에 승리하다'라는 역사적인 오보를 내기도 했습니다. 이 선거 승리로 트루먼은 미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33대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50
[한국 전쟁 발발, 트루먼의 결단으로 유엔군 참전 주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적인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군 조직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편에 참전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냉전 시대 세계 안보의 주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안보와 자유 세계의 수호를 위해 즉각적인 군사적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이끌어내 유엔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트루먼은 이 과정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의 정치적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이는 냉전 시대 국제 관계와 동아시아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53
[서방 세계의 거인: 트루먼, 8년간의 대통령 임기 마치다]
해리 S. 트루먼은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퇴임 후 그는 키가 작아 '리틀 맨'으로 불렸지만, 서방 세계를 공산주의로부터 막아낸 '리틀 빅 맨'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역사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1953년 1월 20일, 해리 S. 트루먼은 8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냉전의 시작, 그리고 한국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퇴임 후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를 '그 누구보다 서구 문명을 잘 지켜냈다'고 평가했으며, 그는 작은 키와 대비되는 '리틀 빅 맨(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1972
[미국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해리 S. 트루먼 서거]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생을 조국과 자유 세계를 위해 헌신하며 20세기 가장 중요한 시기에 미국을 이끈 지도자로 기억됩니다.
1972년 12월 26일, 해리 S. 트루먼은 향년 89세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핵무기 사용 결정, 냉전 초기 반공 정책 수립, 한국 전쟁 참전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끌었으며, 그의 결단은 현대 세계 질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