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생물학자, 곤충학자, 언어학자, 박물학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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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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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 곤충학자, 언어학자, 박물학자,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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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연구를 통해 생물분류학에 새 지평을 연 한국의 대표적인 곤충학자. 75만 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고 분류하며 한국 나비 분류 체계를 확립했다. 제주도 연구,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남긴 박물학자이자 교육자. 한국 전쟁 중 불의의 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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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평양에서 나비 박사의 탄생]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열정적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훗날 그가 민족 문제와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1908년 10월 17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양 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으며, 독립 운동을 지원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석주명이 민족 문제와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1921

[학문 탐구의 시작, 일본 유학까지]

어린 시절부터 동물을 좋아했으며,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이후 대구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서 전문 학사 과정을 마쳤다.

어릴 때부터 토끼, 비둘기와 같은 동물을 좋아해 집에서 길렀으며, 1921년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세운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며, 경상북도 대구 고등농림학교로 전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 이후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 학교 중 하나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서 공부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재학 시 끈기 있게 곤충 채집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0

[75만 마리 나비 채집, 세계적인 한국 나비 학자로 우뚝 서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하여 일본 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는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 이론'을 창안했다. 1940년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통해 한국 나비를 248종으로 재분류했으며, 전국에서 75만 마리 이상의 나비를 채집하고 연구하여 '한국산 접류 분포도'를 구상,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인정받았다.

1931년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았다. 생물분류학의 새 장을 연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 이론’을 창안해 내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 동물학자들은 조금만 다른 특징이 있으면 새로운 종류라고 주장하여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과장하고 있었는데, 석주명은 영국 왕립아시아협회 조선지부에서 발간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접류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았다. 그는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하여 같은 종류라도 성, 계절에 따라 몸의 크기와 무늬가 다르다는 결론을 얻었다.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그의 저서는 현재 영국 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는 세계에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나비학회 회원이 되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75만여 마리나 되는 나비를 채집하여 분류하고 연구했으며, 그 성과를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한국산 접류 분포도》)했는데, 이것은 세계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1943

[제주도학의 선구자, 나비 넘어 언어학까지]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 소장으로 부임하여 제주도 방언과 생명, 문헌 등 제주도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제주도총서' 6권을 발간하여 제주도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43년 4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서귀포에 있던 경성제국대학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에서 근무하면서 <제주도방언집>, <제주도생명조사서>, <제주도관계문헌집> 등 6권(<제주도수필>, <제주도곤충상>, <제주도자료집>은 유고집)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하여 제주도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기록하고 정리하여, 일명 제주도학(濟島學)의 선구자로 불린다. 또한 제주 방언에 대한 논문과 에스페란토어 교과서를 쓰는 등 언어학자로도 활동했다.

1945

[국립과학박물관의 동물학 수장, 독도 학술 조사 참여]

광복 이후 수원 농업시험장 병리곤충부장, 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을 역임하고 국학대학 강사직을 맡았다. 1947년에는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하여 국가의 영토 주권 확립에도 기여했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과 국학대학에서 강사직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에도 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활동했다. 1947년 한국산악회의 독도 학술 조사에 참가했다.

1950

[20년간의 노력이 잿더미로, 나비 표본 소실]

한국 전쟁 중 서울과학관이 폭격을 맞아 20여 년간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귀중한 나비 표본들이 모두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 충격으로 그는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상심이 컸다.

한국 전쟁 도중 1950년 9월 말 서울에 있던 서울과학관이 폭격을 맞으면서 그가 20여 년 동안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하여 만든 나비 표본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석주명은 너무 상심이 커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한국 전쟁의 비극, 불의의 죽음]

서울에서 술에 취한 한국 군인들의 총탄에 맞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 전쟁의 비극 속에서 한 위대한 과학자의 생애가 안타깝게 막을 내렸다.

석주명은 1950년 10월 6일에 술에 취한 한국 군인들이 쏜 총탄을 맞고 죽었다. 이후 제자들이 거적에 싸인 시체를 발견하였다. 그의 사망은 한국 전쟁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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