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독립운동단체, 군사단체, 독립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24
조선의용대는 1938년 김원봉 주도로 창설된 독립군으로, 중일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대항했습니다. 주로 선무공작을 펼치며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분열을 겪으며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중국 공산당과 연대했고, 김원봉이 이끄는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하며 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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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조선인 독립 활동 방향 모색]
중일전쟁 이전,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했으나, 박건웅은 이러한 활동 방식을 전면적, 공개적, 지속적인 형태로 전환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 정책을 세우도록 국민당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중일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구 또는 김원봉 진영에 들어가 국민당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박건웅은 부분적, 비밀적, 단속적 형태의 활동을 전면적, 공개적, 지속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조선의용대 국민당 후원 및 초기 편성]
국민당 정부의 후원 하에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와 제2지대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원봉, 최창익 등이 정치부원으로 참여했으며, 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위동맹 출신 대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제1지대와 제2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했다. 제1지대는 박효삼이, 제2지대는 이익성이 맡았다.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창설되었다. 최고기관은 지도위원회로 이춘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 그리고 정치부원 2인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의용대, 국민당 지원부대로 활동 개시]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통일된 후원 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와 공작비를 지급받았습니다.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정부의 통일된 후원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 씩을 중국 측으로부터 지급받았다. 조선의용대는 큰 틀에서는 한중 평등 합작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개석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인사들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조선의용대 조직 계획 수립]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가 100명 규모의 조선인 독립부대 창설 계획을 작성했고, 장개석 등 국민당 고위 인사들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 조직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가 조선의용대조직계획방안을 작성하여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하여 '일본, 조선, 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조선의용대 창설]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주도로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현 우한)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 독립군으로, 국제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현 우한)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었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 단체로 분류되며, 국제주의 이념을 가졌다. 조선의용대 또는 조선항일의용군, 국제여단으로도 불렸다.
1939
[조선의용대, 선무공작으로 일본군 교란]
조선의용대는 정규 전투부대가 아니었으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들을 활용하여 게릴라전과 함께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로 방송하는 선무공작을 주로 수행했습니다.
의용대는 정규전투부대가 아니었다.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후에도 변치 않았고, 1945년 8월에 가서야 전투부대로 재편성되었고, 1945년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서 규모가 커졌다.
[광저우 조선인 부대 반란 및 의용대 합류]
국민당 정부가 좌익혁명가로 판단한 조선의용대를 최전선에 배치한 가운데, 약 7,000명의 조선인 부대가 중국 광저우 부근에서 일본인 장교들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 징병자 일부가 의용대에 합류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의용대를 좌익혁명가들로 판단했으며 최전선에 이들을 배치했다. 1939년 2월 약 7,000명의 조선인 부대가 중국 광저우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인 장교들을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징병자들이 의용대에 합류하였다.
1940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1941
[조선의용대 내부 분열 및 공산주의자 세력 확장]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김원봉과 경쟁 관계에 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김무정 등을 내세워 화북 지역 의용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이는 의용대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을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김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뤄양에서 타이항산으로 이동]
조선의용대는 뤄양을 떠나 베이징 남서쪽 화북성 산서성 경계에 위치한 타이항산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활동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 뤄양에서 타이항산(베이징 남서쪽 화북성 산서성 경계위치)으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개편되었다.
1942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개칭]
화북 지역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한 세력은 부대 명칭을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했으며, 이들은 북조선 성립 후 연안파로 불리며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된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에 연안파로 일컬어지며, 대다수가 6.25 전쟁에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하였다.
[김원봉,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의용대의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은 1942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장에 취임했으며, 의용대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의용대의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이 1942년 7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45
조선의용대는 그들이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후에도 선무공작 활동을 변치 않았고, 1945년 8월에 가서야 전투부대로 재편성되었고, 1945년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서 규모가 커졌다.
1945년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서 규모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