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호 (한국 전쟁)
군인, 정치인, 빨치산파, 한국 전쟁 참전 용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5: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입니다. 한국 전쟁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으로 참전했습니다. 빨치산파 소속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에서 복무했습니다. 민족보위성 부상, 해군 사령관, 주 중국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60년대 후반 군부 강경파로 숙청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리영호 (한국 전쟁)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09
1909년, 경상도(경상북도인지 경상남도인지는 불명)에서 태어났습니다.
1936
1936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4군 2사 교통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38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7군 제2사 제7단 정치위원이 되었습니다.
1940
1940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2지대 제2대대 정치위원이 되었습니다.
1940년 12월,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에 들어가 하바로프스크 근처 북야영(北野營, A야영)에 배속되었고 당 임시위원회 홍보 위원을 하였습니다.
1942
1942년 제88특별여단 제3대대 5중대 부중대장·소위로 배속되어 군정훈련과 소부대 정찰활동을 했습니다.
1945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조선으로 귀국했습니다.
1948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인민군 제6연대장을 거쳤습니다.
1950
[한국 전쟁 참전 및 제3사단장]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에 취임하여 한국 전쟁 개전과 함께 동두천 방향으로 남침했습니다. 그의 제3사단은 당시 최정예 사단으로 국경 개전, 대전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 등에 참전했습니다.
1950년에 제3사단장에 취임했으며 한국 전쟁 개전 당시에는 동두천 방향으로 남침했습니다. 제3사단은 당시 조선인민군 최정예 사단이었으며 국경 개전과 대전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제3사단 괴멸 및 제7군단장 역임]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제3사단이 괴멸되었고, 이후 제7군단장 등을 역임하며 전열을 재정비했습니다.
1950년 9월의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제3사단은 괴멸되었고 이후 제7군단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1953
1953년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취임했습니다.
1954
1954년에는 해군 사령관에 취임했습니다.
1954년 3월 조선인민대표단 부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하였습니다.
1956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제3차 당대회)이 되었습니다.
1957
1957년 5월, 주 중국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59
1959년 12월 조선인민군 중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961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위원(제4차 당대회)을 역임했습니다.
1962
1962년 4월 중국 대사를 사임했습니다.
1962년 5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을 역임했습니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당선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1965
1965년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1967
196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1970
1970년경에 군부 강경파였기 때문에 숙청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