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가수, 연극배우, 대중음악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1:28
대한민국 트로트의 전설적인 가수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오빠 이봉룡, 남편 김해송과 함께 한국 가요계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남편 김해송의 납북과 자녀 김시스터즈, 김보이즈의 해외 진출 이후 고독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삶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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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가수의 탄생: 이난영 출생]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본명 이옥례(호적명 이옥순)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남순, 어머니는 박소아였고, 두 살 터울의 오빠 이봉룡이 있었습니다. 가정 형편은 넉넉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16년 6월 6일, 이난영은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이옥례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습니다. 호적명은 이옥순이었고, 아버지는 철공업을 하던 이남순, 어머니는 박소아였습니다. 두 살 많은 오빠 이봉룡이 있었으며, 가정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고 아버지는 술을 자주 마셔 가정에 소홀했다고 전해집니다.
1923
[음악적 재능의 싹: 초등학교 입학]
현재의 목포북교초등학교인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적부에는 본명 이옥례가 아닌 이옥순으로 기재되어 있었으며, 가정 형편으로 인해 1학년과 3학년 때 휴학하여 다른 과목 점수는 좋지 못했지만, 음악 과목인 창가에서 9점을 받아 어릴 때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대정(다이쇼) 12년인 1923년 4월 2일, 이난영은 현재의 목포북교초등학교인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의 여자부에 입학했습니다. 학적부에는 이옥순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널리 알려진 본명 이옥례와 달랐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1학년과 3학년 때 휴학을 했고, 대부분의 교과목 점수는 낮았으나, 유일하게 창가(음악) 과목에서 3학년 때 9점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29
[제주에서의 새로운 시작: 막간가수 활동]
4학년 때 거주지 이전을 이유로 자퇴한 이난영은 오빠 이봉룡과 함께 솜공장에 취직했으나, 이후 아버지와의 불화를 피해 제주도로 떠났던 어머니를 따라 제주도로 가게 됩니다. 제주에서 어머니는 극장 집 식모살이를 했고, 이난영은 창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노래를 부르다 막간가수로 발탁됩니다.
이난영은 4학년이 되어서 거주지 이전을 이유로 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자퇴원서의 보호자 란에는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도장은 오빠 이봉룡의 것이 찍혀 있었습니다. 이후 오빠와 함께 조선면화공장이라는 솜공장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아버지와의 불화로 먼저 제주도에 가 있던 어머니를 따라 오빠와 함께 제주도로 이주합니다. 제주도에서 이난영의 어머니는 제주 최초의 극장인 창심관에서 일본인 가정의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고, 이난영은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를 극장 주인에게 인정받아 막간가수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빠 이봉룡은 영사기사로 일했습니다. 극장에 영화 필름이 도착하지 못할 경우 유랑극단이 공연되었고, 그 막간에 이난영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극장 화재로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극장 주인의 추천으로 삼천리가극당의 특별 단원이 되어 제주를 떠납니다.
1933
[한국 가요계의 샛별: 공식 데뷔]
태양극장에서 '이난영'이라는 예명으로 막간가수 활동을 시작한 후, 오사카 공연 중 태평레코드와 계약하며 데뷔곡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오케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10월에 '향수'를 발표, 11월에는 '불사조'로 첫 히트를 기록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가을 무렵 태양극장에 가입하여 박승희 극단장으로부터 '이난영'이라는 예명을 받고 막간가수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오사카에서 공연 중 흥업사에 발탁되었으며, 오사카에서 이난영의 소문을 들은 오케레코드 사장 이철에게 스카우트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당시 태평레코드 전속작곡가 김준영의 주장에 따르면, 태평레코드가 춘향전 전집 취입을 위해 오사카에서 공연 중이던 태양극장과 이난영의 계약을 진행했으나, 이봉룡이 나타나 미성년자 계약 해지를 요구하며 오케레코드와 계약이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난영의 공식 데뷔곡은 1933년 9월 태평레코드 신보로 발표된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이었습니다. 이후 1933년 10월에는 오케레코드에서 '향수'를 발표했으며, 11월에 '불사조'가 크게 히트하면서 이난영은 한국 가요계의 샛별로 떠오르게 됩니다. 데뷔 직전인 1933년 8월, 이난영의 아버지 이남순이 사망했습니다.
1935
[영원한 명곡: '목포의 눈물' 발표]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협업한 '제1회 향토노래 현상'에서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후에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고, 작곡가 손목인의 멜로디에 이난영이 노래를 부르며 발표되었습니다. '삼백년 원한' 가사가 검열에 걸렸으나, 녹음은 원본대로 진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한 달 만에 '삼천리'지 10대 가수에 3위에 올랐으며 5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오케레코드와의 전속 계약 후 '불사조'와 '봄맞이'의 연이은 히트로 유명해지던 이난영은 1934년 가을 도쿄 히비야 공회당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유일한 한국인 가수로 출전했습니다. 1935년 초,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공동 주최한 '제1회 향토노래 현상'에서 목포 거주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원래 제목, 후 이철 사장이 '목포의 눈물'로 변경)이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등으로 당선됩니다. 원래 고복수가 취입하려던 손목인의 '갈매기 우는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붙여 목포 출신 가수인 이난영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1935년 9월 신보로 발표된 '목포의 눈물'은 2절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가 일제 검열에 걸려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로 개사되었으나, 녹음은 개사 전 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발매 한 달 만인 10월 '삼천리'지 10대 가수에 3위로 선정되고 5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일본에서도 큰 반응을 얻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난영은 이 곡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1936
[음악계 스타 부부의 탄생: 김해송과 결혼]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이난영은 우리나라 최초 음악 영화 '노래 조선'에 출연하고, 같은 가수 김해송과의 로맨스 끝에 경성 요릿집 식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전 이미 임신 중이었으며,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서둘러 결혼을 진행했습니다.
'목포의 눈물' 이후 스타덤에 오른 이난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인 '노래 조선'에 출연했습니다. 영화는 1936년 4월 개봉했습니다. 이 시기, 이난영은 같은 가수였던 김해송과 사랑에 빠져 결혼 전에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서둘러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했고, 1936년 12월 24일 오후 네 시, 경성(서울)의 요릿집인 식도원(食道園)에서 연극인 이기세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이난영은 1936년 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아버지는 어데로'를 취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목포의 눈물'의 영향으로 '오카 란코(岡 蘭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1938년까지 일본 활동을 이어갔으며, 1937년에는 오빠 이봉룡과 함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고향은 부른다'를 불렀습니다. 같은 해 12월경에는 '해조곡'을 취입하여 다시 한번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1938년에는 오케레코드에서 배우 심영이 노래 해설을 덧붙인 '이난영걸작집'이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1939
[대중가요의 새로운 지평: '다방의 푸른 꿈'과 악극단 활동]
김해송이 오케레코드로 복귀하며 이난영을 위한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했고, 이 곡은 한국 최초의 블루스 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또한 오케그랜드쇼단이 '조선악극단'으로 이름을 바꿔 일본 순회공연을 떠났고, 이난영은 저고리시스터즈의 리더로 활동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1937년부터 2년간 콜럼비아레코드에 있었던 김해송은 1939년 오케레코드로 복귀하여 이난영을 위한 '다방의 푸른 꿈'을 작곡했습니다. 이 곡은 우리나라 최초의 블루스 곡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난영은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를 1942년에 불러 히트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일본은 미국의 창법(블루스, 재즈 등)을 금지했고, SP 레코드 제작의 주재료인 셸락이 군수물자로 지정되어 레코드 산업 전체가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이에 가수들은 연극 활동 등으로 순회하며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오케레코드는 당시 '오케그랜드쇼단'이라는 공연단을 운영했는데, 1939년 3월 일본 순회 공연을 체결하며 '조선악극단'으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이난영도 이 악극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일본 영화 『사려 깊은 부인』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악극단은 규모가 커 '저고리시스터즈', C.M.C악단, 아리랑보이즈 등 여러 팀으로 나뉘었는데, 이난영은 장세정과 함께 저고리시스터즈의 대표 멤버이자 리더로 활동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는 민요를 부를 때는 저고리와 족두리를, 서양 노래를 부를 때는 하얀 드레스를 입는 등 다채로운 무대를 선보였습니다. 1943년 말부터는 김해송과 함께 약초가극단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에는 만타 악극단에서도 활동했습니다. 1941년에는 오케레코드 주최로 이난영의 가수 생활 10년 기념 표창장과 공연이 열렸습니다. 1942년 1월에는 군국가요 모음집 '오케- 가요극장'의 '신춘엽서'를, 1943년 11월에는 군국가요 '이천오백만 감격'의 후렴구를 취입하여 후일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1945
[해방 후 재도약: KPK 악극단 활동]
광복 후 김해송이 이철의 조선악극단을 이어받아 'KPK 악극단'을 조직했습니다. 이난영은 이 악극단의 주요 단원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칼멘 환상곡 등 대표 공연에서 로미오 역과 돈 호세 역을 맡아 배우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미군 위문공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47년에는 해방 후 최초 음반으로 알려진 '흘러온 남매'를 취입했습니다.
광복이 되던 날, 박시춘은 무료 공연을 열고 금지되었던 재즈를 연주했습니다. 이때 김해송은 1944년 이철 사장 사망으로 흐지부지되었던 '조선악극단'을 이어받아 'KPK 악극단'을 조직했습니다. KPK는 김해송, 백은선, 김정환(김정항)의 이니셜을 따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미군들의 위문공연을 자처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난영, 장세정, 심연옥, 신카나리아, 윤부길, 백설희, 계수남, 홍청자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대표 공연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칼멘 환상곡', '천리춘색', '천국과 지옥' 등이 있었는데, 이난영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기까지 했으며, '칼멘 환상곡'에서는 돈 호세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한편 1947년 이난영은 남인수, 심연옥, 노명애, 계수남과 함께 해방 이후 최초로 나온 음반으로 알려진 '흘러온 남매'를 고려레코드를 통해 취입했습니다. 이 노래를 취입한 인물들은 모두 KPK 소속이었고, 이 곡이 KPK 악극단의 주제곡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1948
[남편과의 갈등: 자살 시도]
KPK악극단 활동 중, 김해송의 불화설에 시달리던 이난영은 춘천 소양강 백사장에 '나는 갑니다 김해송'이라는 말을 남기고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순찰 중이던 박영훈 순경에게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김해송은 같은 악극단원 홍청자와의 염문설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1948년 8월 18일, KPK악극단이 춘천에 머무르던 중, 이난영은 밤 11시경 소양강 백사장에 '나는 갑니다 김해송'이라는 글을 남기고 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순찰 중이던 소양로파출소의 박영훈 순경이 그녀를 발견하고 구출했습니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자살 동기는 김해송과의 사소한 언쟁 때문이라고 보도되었으나, 김해송은 같은 KPK 악극단 단원이었던 홍청자와 염문설이 돌고 있었으며, 일부 기사에서는 홍청자가 김해송의 부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1950
[비극적 이별과 새로운 도전: 김해송 납북과 김시스터즈 육성]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남편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습니다. 이후 이난영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김해송을 찾으려 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강제로 헤어지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이난영은 자녀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미군 위문공연을 다니며 자녀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김시스터즈를 키워냈습니다. KPK악극단은 이난영악단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했습니다.
K.P.K 악극단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칼멘 환상곡' 공연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미처 남쪽으로 피난하지 못했던 남편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KPK 소속의 한 후배가 김해송이 미군 위문 공연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고발했던 것입니다. 이후 이난영은 서대문형무소 주변을 계속 돌며 김해송을 만나려 애썼으나, 결국 만나지 못한 채 강제로 헤어지게 됩니다. 김해송은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간 이난영은 미군 위문공연을 다니면서 자녀들을 혹독하게 교육시키기 시작했습니다. KPK 악극단은 '이난영악단'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1년을 넘기지 못한 채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이난영은 이 난관 속에서 세 딸(영자, 애자, 숙자)과 조카(민자)를 훈련시켜 한국을 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김시스터즈를 키워내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1953
[자녀들의 세계 무대 진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
이난영의 세 자녀와 조카 이민자로 구성된 김시스터즈가 미 8군 부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이들은 1959년 미국에 진출하여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 출연하는 등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61년에는 아들들도 김보이즈로 미국에 진출하며 이난영은 자녀들의 해외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이난영의 혹독한 훈련 끝에 김시스터즈는 1953년 미 8군 부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습니다. 원래는 이난영의 세 자녀인 영자, 애자, 숙자로 결성될 예정이었으나, 데뷔 과정에서 맏언니 영자가 빠지고 조카 민자가 합류했습니다. 이렇게 결성된 김시스터즈는 1959년 미국에 진출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에 무려 22번 출연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주급 1만 5천 달러를 받는 등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뒤이어 1961년에는 이난영의 맏아들 영조를 제외한 아들 영일, 상호, 태성이 각각 영일, 영호, 영성이라는 예명으로 '김보이즈'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미국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을 잃고 자녀들마저 미국으로 떠나면서 외로움이 깊어졌고, 동료 가수 고복수의 은퇴 공연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 이난영은 오랜 동료였던 남인수와 사랑이 싹텄으나, 남인수의 심각한 폐결핵으로 인해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남인수는 이난영을 향한 마음을 담아 '눈 감아 드리오리'를 취입했고, 결국 이난영의 무릎을 벤 채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난영은 더욱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1965
[한국 대중음악계의 거성, 영원히 잠들다: 이난영 사망]
남인수 사망 후 자녀들의 권유로 1962년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김시스터즈와 함께 미국 TV쇼에 출연하고 하와이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도 했지만, 1963년 김밥을 만들어주며 뒤치다꺼리를 하다 귀국했습니다. 이후 몇몇 행사에 참여했으나 활동이 크게 줄었고, 1965년 3.1절 기념 가요 40년제를 마지막으로 4월 11일 새벽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 혹은 자살로 추정됩니다.
남인수가 사망한 후, 자녀들은 계속해서 미국으로 오라고 권유했고, 이난영은 1962년 12월 22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김시스터즈와 함께 미국 TV쇼에 출연하고 하와이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도 했지만, 미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한 김시스터즈에게 김밥을 만들어주며 뒷바라지를 하다가 1963년 8월 24일 다시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이난영은 몇몇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예전처럼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1965년 3.1절 기념 가요 40년제 출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5년 4월 11일 새벽 6시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 혹은 자살로 추정됩니다. 영결식은 4월 15일 한국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수많은 동료 가수들이 참석하여 그녀를 애도했습니다. 광복 후 북으로 건너갔던 가수 왕수복은 판문점을 찾아 이난영의 사망 소식에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당시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는 공연 일정과 비자 문제로 한국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1970년이 되어서야 묘소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1964년에는 이난영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가 방영되었습니다. 사후 1968년에는 제1회 난영가요제가 개최되었고, 1969년에는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유달산에 건립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사후 21년 만에 목포시 시민의 상(교육문화부분)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목포 양동 이난영 생가에 흉상이 있는 소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경기도 파주에 있던 이난영 묘지가 삼학도 난영공원으로 이전되었고, 같은 해 난영공원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건립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