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연표
1893
[마오쩌둥 탄생]
청나라 후난성 샹탄현의 부유한 농가에서 농부 마오이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 두 형제가 요절하여 사실상 맏이가 되었고, 유모와 하인을 두었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 유년기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접했습니다.
1905
[학업 중단 및 가출]
12세 때 아버지의 강요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으나, 학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조혼을 거부하고 집을 나와 현립 둥산 고등소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11
[신해혁명 참여]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에 가담하여 후난성 혁명군 소속의 한 부대에서 사병으로 6개월간 복무했습니다.
이는 그의 첫 군사 경험이자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였습니다.
1918
[베이징 대학 사서 근무]
후난 성립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 대학 도서관 사서보로 취직했습니다.
스승 양창지의 추천과 리다자오와의 교분으로 가능했으며, 이곳에서 천두슈, 리다자오 등 당대 지식인들의 강의를 접하고 수많은 사상 서적을 탐독하며 훗날 '마오 사상'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1919
[창사 항일운동 주도]
여름, 창사에서 농민을 제외한 학생, 상인, 노동자들의 연대단체를 결성하고 조직하여 당시 국민 정부에 항일운동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하는 5.4 운동과 맞물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21
[중국 공산당 창립 참여]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에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중국 공산당에 남아있던 창립 멤버는 마오와 둥비우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1925
[농민운동고찰보고 발표]
국민당 선전부장 대리로 임명된 후, 후난성 농민운동의 동향을 관찰하고 그 혁명성을 주목한 《후난농민운동고찰보고》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공산 혁명의 동력으로 농민을 주목한 마오 사상의 핵심적인 특징이 시작된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1927
[국공합작 결렬]
장제스가 국민당의 상하이 입성을 도왔던 노동자들을 학살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은 도시에서 거의 전멸했고, 마오쩌둥은 후난의 추수봉기에서 살아남은 농민운동가들을 이끌고 피신했습니다.
[추수 봉기 및 징강산 퇴각]
창샤에서 추수 봉기를 이끌었으나 토벌군에 진압당해 패잔병을 이끌고 장시성 징강산으로 퇴각했습니다.
이곳에서 지역 토비와 주더의 군대가 합류하여 '중국공농홍군'(홍군)을 구성하고 농민부대를 재정비하며 게릴라전 전략을 수립했습니다.
1931
[중화소비에트 주석 취임]
홍군의 영향력을 넓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과도정부를 건설하고 주석 겸 중국 공산당 중앙집회위원회 주석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 마오는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주더의 도움을 받아 효율적인 부대를 조직하고 엄정한 군율로 농민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1934
[대장정 시작]
국민당군의 제5차 토벌전으로 장시 소비에트가 붕괴하기 시작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성 근거지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시작했습니다.
1935
[쭌이 회의: 지도권 장악]
장정 도중 열린 쭌이 회의에서 소련 유학파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붕괴하고, 마오에게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도권이 넘어왔습니다.
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마오쩌둥의 권력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36
[대장정 완료]
장정 중이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부대는 티베트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산시성 목적지에 도달했으며, 이듬해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피해 이동을 개시한 나머지 부대들도 합류하며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완료했습니다.
[시안 사태 및 2차 국공합작]
장제스가 시안을 방문했을 때 장쉐량에 의해 체포되는 시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장제스는 풀려나는 조건으로 항일을 위한 공산당과의 휴전과 제2차 국공합작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홍군은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형식상 국민당군에 소속되었으나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942
[정풍운동 개시]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마오쩌둥의 당에 대한 지도권을 재확인하고 당내 반대파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왕밍 등 당내 주요 인사들이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일부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1945
[공산당 중앙위 주석 취임]
일본 제국이 패망한 이후 국민당과의 공동정부 구성 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본격적인 내전이 재개되었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중국의 운명을 좌우할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 정부를 패배시켰습니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초대 국가주석에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중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국가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1950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체결 및 이념적 동맹 강화]
사회주의권의 수장이자 선대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력하여 중국 혁명의 이념적,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동맹을 맺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긴밀한 회담 끝에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를 통해 소련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며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공통의 사상적 토대 아래 동방 블록의 핵심 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국 전쟁 개입 논의]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과 베이징에서 면담하며 한국 전쟁 개입 가능성을 논의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의 3단계 통일 계획을 설명했고, 마오쩌둥은 미군 참전 시 중국 병력을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하며 한국 전쟁 개입을 결정했습니다.
1956
[백화제방·백가쟁명 발표]
공산 체제가 안정되자 공산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사태가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데 이르자 돌연 방침을 전환, 이듬해 '반우파운동'을 전개하여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를 숙청했습니다.
1958
[대약진 운동 시작]
제2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며 중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빠르게 전환시키고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목표로 대약진 운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러나 기술 미비, 농업 경시, 기후 이상 등으로 인해 1,500만~5,500만 명이 사망한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제사해 운동]
마오쩌둥은 참새가 벼를 먹는 모습에 분노하여 '해로운 새'라 칭했고, 이로 인해 제사해 운동이라는 대대적인 참새잡이 광풍이 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참새의 씨가 말라 해충이 창궐하면서 대흉년이 더욱 심해져 4천만 명이 굶어 죽는 대재앙으로 이어졌습니다.
1959
[루산 회의 및 주석직 사임]
대약진 운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펑더화이 자신이 해임당했고,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사임했습니다.
후임 류사오치는 대약진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며 경제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1964
[핵실험 성공]
중소 관계 균열과 서방으로부터의 안보적 위협이 증가하자, 마오쩌둥은 중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여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하며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안보 역량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1965
[남한 무장봉기 강요]
베트남,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한의 최용건이 참석한 '아시아 지역 혁명 논의'에서 북한 김일성에게 남한에서의 무장 게릴라 봉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남한의 지형적 한계와 미군 주둔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1966
[문화대혁명 시작]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실권자로 떠오르자, 마오쩌둥은 다시 한번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전국에서 마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이 '공산주의의 적'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사회 원로와 종교인들에게 무자비한 폭행과 숙청을 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추정 사망자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1971
[린뱌오 쿠데타 실패]
문화대혁명 중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떠올랐던 국방부장 린뱌오가 승계 시기를 두고 마오와 갈등하다 쿠데타 음모를 꾸몄습니다.
하지만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린뱌오는 아들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마오쩌둥의 의심 증세가 강화되었습니다.
1972
[닉슨과 미·중 정상회담]
냉전 기류 해소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의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한 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닉슨 대통령과 역사적인 미·중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이는 냉전 시대 국제 외교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76
[제1차 천안문 사태]
와병 중이던 마오쩌둥의 통치 말기에 제1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저우언라이 사망 이후 대규모 민중 봉기로 이어졌고, 시위대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사인방을 비판하며 마오쩌둥의 퇴진까지 요구했습니다.
[마오쩌둥 사망]
베이징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시위가 격화되고 군의 진압 협조를 얻지 못한 채 고립된 상황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언과는 다르게 시신은 베이징의 '마오주석기념관'에 보존되어 안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