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룡
희극인, 배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5:13
대한민국 1세대 코미디언이자 배우 배삼룡은 '비실이'라는 별명과 독특한 '개다리 춤'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군사정권의 탄압과 사업 실패, 복잡한 가족사, 병마 등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선사하며 코미디계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말년에 힘든 투병 생활을 보냈지만,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영원한 코미디 황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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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거성, 배삼룡 출생]
강원도 양구군에서 본명 배창순으로 출생했습니다. 초기 자료에서는 출생 연도가 1925년으로 기록되기도 하여 정확한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전설적인 희극인 배삼룡이 1926년 12월 27일 일제 강점기 강원도 양구군에서 본명 배창순으로 태어났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1925년 출생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주요 공식 기록은 1926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춘천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49
[가극단 활동 시작 및 한국전쟁 후 복귀]
1940년대 말부터 가극단 활동을 시작하며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으나,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연예계로 돌아왔습니다.
배삼룡은 1940년대 말 가극단 활동을 시작하며 대중과의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년간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연예 활동을 재개하며 그의 웃음 바이러스는 계속되었습니다.
1960
[유랑극단 시대의 끝과 극장 쇼 사회자로 전환]
1960년대 초, 유랑극단이 사라지자 극장 쇼의 사회자로 활약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 다양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이후 코미디언으로서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며 유랑극단이 점차 사라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배삼룡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그는 극장 쇼의 사회자를 맡아 특유의 재치와 입담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으며, 코미디언으로서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1969
[MBC 코미디언 데뷔, '비실이'와 '개다리 춤'으로 국민적 사랑]
문화방송(MBC) 개국과 함께 전속 코미디언으로 데뷔하며, '웃으면 복이와요' 등의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1세대 코미디언의 대표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바보 연기와 '개다리 춤'은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으며 '비실이'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1969년 문화방송(MBC)이 개국하자 배삼룡은 MBC 소속 코미디언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그는 '웃으면 복이와요'와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구봉서, 송해 등과 함께 1세대 코미디언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그의 어눌한 바보 연기와 독창적인 '개다리 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이로 인해 '비실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기는 방송사 간 영입 경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1975
[코미디계를 넘어 영화계로, 배우 활동 시작]
1970년대 중반부터 '배삼룡의 나는 울었네'를 시작으로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도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스크린에서도 특유의 코믹 연기로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배삼룡은 코미디 무대를 넘어 영화계에도 진출했습니다. '배삼룡의 나는 울었네'를 시작으로 '형사 배삼룡', '출세 작전', '맹물로 가는 자동차'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재능도 선보였습니다. 그의 스크린 연기는 특유의 코믹함과 인간미를 담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80
[군사정권의 탄압과 개인적인 불운, 활동 하강곡선]
1980년대 초, 코미디를 '저질'로 몰아세운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방송 출연이 금지되는 등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잇따른 사업 실패와 두 번의 사별, 한 번의 이혼 등 개인적인 불운까지 겹쳐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코미디는 저질 문화로 치부되며 배삼룡은 방송 출연 금지 조치를 당하는 등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사업 실패가 이어지고, 첫 번째와 두 번째 아내와의 사별, 그리고 세 번째 결혼마저 파경을 맞으면서 개인적인 삶 또한 큰 고난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어려움 속에서 그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983
[개인적인 시련 속 미국으로 이민]
잇따른 실패와 불운으로 지쳐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약 3년여간의 미국 생활 후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연이은 사업 실패와 개인적인 불운, 그리고 방송 활동의 제약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배삼룡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도피하듯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3년여간의 타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95
1990년대 중반부터 배삼룡은 천식으로 인해 건강에 이상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이 천식은 이후 흡인성 폐렴과 같은 다른 질병으로 이어지며 그의 삶을 점차 힘겹게 만들었습니다.
1996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 발전 공로상 수상]
제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에서 연예 발전 공로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96년, 배삼룡은 제3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에서 연예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가 평생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쌓아온 업적에 대한 공식적인 찬사였습니다.
2001
2001년, 배삼룡은 문화방송(MBC) 명예의 전당 코미디언 부문에 헌액되었습니다. 이는 MBC 개국과 함께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여 수많은 인기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방송사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기리는 것이었습니다.
2002
[흡인성 폐렴으로 위독, 장례식 준비까지]
천식과 흡인성 폐렴이 겹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장례식 준비위원회'까지 마련될 정도로 위독한 상황에 처했으나,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2002년 11월, 배삼룡은 오랜 천식 투병 끝에 흡인성 폐렴까지 겹쳐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시 '장례식 준비위원회'가 꾸려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병마를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03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 수훈]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에서 문화훈장을 수훈하며,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2003년, 배삼룡은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에서 문화훈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 특히 코미디 분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을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2004
[처조카의 재산 사기 및 건강 악화]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던 처조카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중국으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충격으로 인해 같은 시기 쓰러지며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2004년 10월, 배삼룡의 재산을 관리하던 세 번째 부인의 처조카 기씨가 그의 차까지 팔아 모든 재산을 탕진한 채 중국으로 도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배삼룡은 같은 시기 쓰러지며 건강이 다시 악화되었고,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배삼룡 부부는 처조카를 고소했습니다.
2006
[세 번째 부인의 이혼 요구]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던 세 번째 부인 기영숙 씨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부인의 오빠가 대리인을 자처하여 이혼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2006년 12월,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던 세 번째 부인 기영숙 씨가 배삼룡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부인의 오빠가 대리인으로 나서서 이혼 절차를 추진했으며, 배삼룡은 심각한 건강 문제와 더불어 이혼의 아픔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2007
[서울아산병원 장기 입원 시작]
서울 양천구 목동 행사장에서 쓰러진 후, 6월 30일부터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오랜 투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병원비 체납 문제가 불거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2007년 6월 30일, 배삼룡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행사장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길고 힘든 투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1억 3천만 원에 달하는 진료비를 체납하여 병원 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대중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세 번째 부인과의 이혼]
병상에 누워있던 중 세 번째 부인과 공식적으로 이혼했습니다. 이후 세 번째 부인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2007년 10월 5일, 배삼룡은 병상에서 세 번째 부인 기영숙 씨와 이혼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였던 세 번째 부인은 이혼 후 미국으로 떠났고, 배삼룡은 홀로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2008
[재산 사기 후 도피했던 처조카 체포]
2004년 재산을 탕진하고 도피했던 처조카 기씨가 3년 만에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씨는 이미 모든 재산을 탕진한 상태였고 심한 폐 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2008년, 배삼룡의 재산을 가로채고 도피했던 처조카 기씨가 3년 만에 공항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재산을 탕진한 상태였고, 본인 또한 심한 폐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배삼룡은 재산을 돌려받기 어려워졌습니다.
[병원비 체납으로 인한 소송 및 후배들의 온정]
서울아산병원이 배삼룡에게 1억 3천만 원에 이르는 진료비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습니다. 그는 체납된 진료비와 소송 비용을 부담하게 되었으나, 엄영수, 유재석, 김용만 등 후배 코미디언들이 성금을 전달하며 따뜻한 위로를 전했습니다.
2008년 12월 16일, 서울아산병원은 배삼룡에게 약 1억 3천만 원의 진료비 체납을 이유로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체납 진료비와 소송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엄영수, 유재석, 김용만 등 많은 후배 코미디언들이 따뜻한 마음을 모아 성금을 전달하며 선배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9
[병상에서 팬들에게 마지막 핸드 프린팅]
병상에 누워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핸드 프린팅 행사에 참가하며 대중에게 근황을 알리고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2009년 10월 15일, 배삼룡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핸드 프린팅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병상에 누워서도 대중과 소통하고 팬들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병세 악화로 인한 의식불명 상태]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상태는 매우 위중했으며, 이는 결국 마지막 순간으로 이어졌습니다.
2009년 11월 23일, 배삼룡은 지병인 흡인성 폐렴이 급격히 악화되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생사의 기로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으며, 그의 위중한 상태는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습니다.
2010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거성, 배삼룡 영면]
오전 2시 23분경, 오랜 투병 끝에 흡인성 폐렴으로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대한민국 코미디계의 큰 별이 진 순간이었습니다.
2010년 2월 23일 오전 2시 23분경, 배삼룡은 서울아산병원에서 오랜 투병 끝에 흡인성 폐렴으로 인해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대한민국 코미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거성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슬픔과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발인 및 영면, 코미디언협회장으로 장례 진행]
성남시립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경기도 광주시 분당 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장례는 코미디언협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2010년 2월 25일, 고(故) 배삼룡의 시신은 성남시립화장장에서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시 분당 추모공원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장례는 코미디언협회장으로 3일간 진행되었으며, 많은 동료와 후배, 팬들이 참석하여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유재석, 김용만 등 후배 코미디언들은 해외 일정 중에도 사람을 보내 조의를 표했습니다.
[장지 이중계약 문제로 유족 피소]
장지 계약과 관련하여 아들 배동진 씨가 아름다운추모원으로부터 춘천경찰서에 고소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후에도 가족 간의 복잡한 문제가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2010년 3월 5일, 배삼룡의 아들 배동진 씨는 장지 이중계약 문제로 춘천시 아름다운추모원으로부터 춘천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당했습니다. 아름다운추모원은 2007년 배삼룡의 유골 안치를 조건으로 치료비 및 간병비 명목으로 1천470여만 원을 지원했으나, 아들 배동진 씨가 분당 추모공원 납골당과 이중 계약을 한 후 지원금을 돌려주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