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정치인, 군인, 국무총리, 국회의원, 당 총재,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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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해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지내며 군사정권 수립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국무총리를 두 차례 역임하고 9선 국회의원을 기록하며 '삼김' 중 한 명으로 한국 현대 정치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한일협정 체결에 기여했고, 3당합당과 DJP연합 등 독특한 정치 행보로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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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출생]

충청남도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김해 김씨 안경공파 16세손으로, 철종 때 선릉참봉을 지낸 할아버지 김현택과 토지측량사이자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45

[대전사범학교 졸업]

일본 유학 중 주오대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을 폭행한 사건으로 산간벽지 학교 발령 후 2개월 만에 사퇴했습니다.

일본 유학 중 일본인 선배와의 마찰로 주오대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교생 실습을 하다가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교감을 폭행, 산간벽지 학교로 발령받았고, 2개월 만에 교사직을 사퇴했습니다.

1946

[경성사범학교 입학 및 부친 사망]

광복 이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단체 위원장이던 형 때문에 서북청년단이 집을 습격하여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재산과 집을 빼앗겼습니다.

광복 이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좌익 단체였던 충남교육연맹 위원장이었던 둘째 형 김종익을 잡으러 서북청년단이 그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구타당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재산과 집 역시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1948

[서울대 휴학 및 군 입대]

부친 작고 후 경제적 어려움으로 서울대 사범대학을 휴학하고 택시 기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낸 뒤 모병소에 원서를 내고 군에 입대했습니다. 이후 탈영했으나 육사 교도대와 만나 재입대했습니다.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이었으나 부친 작고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몰려 택시 기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이후 군 입대를 결심하고 모병소에 원서를 내 육군 제13연대에 배속되었으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탈영했습니다. 탈영병 신분으로 숨어 지내던 중 극장에서 육사 교도대와 만나 기간병으로 재입대했습니다.

1949

[육사 졸업 및 소위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여 소위로 임관한 뒤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어 주로 참모직을 역임했습니다.

1951

[박영옥 여사와의 결혼]

박정희 대통령의 셋째형 박상희의 장녀인 박영옥과 결혼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셋째형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하여 평생의 반려를 맞았습니다.

1960

[장면 총리에게 정군 요구]

소령에서 중령 진급이 늦었던 동기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항명 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0년 8월 24일, 동기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석정선과 함께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 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61

[군사 정변 시도 실패]

박정희와 함께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해 군사 정변을 기도했으나, 장면 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 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5.16 군사 정변 주도 및 초대 중앙정보부장 취임]

5.16 군사 정변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여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고, 군사혁명위원회가 신설한 중앙정보부의 초대 부장에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정변 성공 후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에서 대령,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동시에 신설된 중앙정보부의 초대 부장에 임명되어 권력의 핵심에 섰습니다. 이후 박정희가 정변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자 자신이 기획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5.16 정변 목적 발표]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이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고 혁명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6월 5일 오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5.16 군사 정변은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거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 발표는 반혁명 세력과 기성 정객들의 정치 참여 꿈을 깨우고 유언비어를 일소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사상계> 장준하 사장 취조]

잡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 비판 칼럼을 문제삼아 <사상계> 사장 장준하를 중앙정보부로 소환하여 취조했습니다.

1961년 7월호 <사상계>에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으로 5.16 군사정변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 장준하를 중앙정보부로 불러 취조했습니다. 김종필은 장준하에게 칼럼을 실은 경위와 목적을 추궁했고, 장준하는 이를 군사혁명에 대한 충언으로 반박했습니다.

1962

[김-오히라 메모 합의]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본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와 비밀 접촉하여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 한일협정 체결의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는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식민지배에 대한 문제들을 종결지어 후일 논란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일본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한일협정의 핵심 내용을 합의했습니다. 이 '김-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3억 달러, 장기 저리 차관 3억 달러 등의 조건을 포함했으며,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나 약탈 문화재 반환 등의 현안을 배제한 채 경제적 보상으로 모든 문제를 종결하려 하여 후일 '굴욕외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맥아더 원수 면담]

미국 방문 중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를 방문하여 한국 통일에 대한 맥아더의 희망과 한국전쟁 휴전에 대한 견해를 들었습니다.

1962년 10월 31일 미국을 방문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만났습니다.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는 의사를 피력했으며, 한국전쟁의 휴전에 있어 미국의 잘못과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63

[군인 신분 종료 및 정계 입문 준비]

중앙정보부장직에서 사퇴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군인 생활을 마쳤습니다. 이후 정계 입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습니다.

1963년 1월 6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함으로써 1949년부터 이어온 군인 신분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전념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민주공화당 창당 주도]

중앙정보부장 사퇴 후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하고, 정구영,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습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맡아 재건당을 창당하고, 직접 윤일선, 임영신 등 여러 야당 인사들을 설득하며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구 정치인들에게 정치 정화법으로 참여를 제한하면서 자신들만의 정당을 비밀리에 결성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1971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제11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5년 6개월간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웠습니다. 대덕연구단지, 민속촌 등의 기획에 참여하며 유신 체제의 실세 2인자로 활동했습니다.

1971년 6월 4일 박정희 정권의 제11대 국무총리에 취임했습니다. 1975년 12월 18일까지 5년 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내며 대덕연구단지, 민속촌 등을 기획하고 유신 체제 하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정권의 2인자로 활약했습니다.

1975

[국무총리직 경질]

정권의 2인자로서 박정희 대통령과 끊임없이 갈등하던 중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그의 정치적 입지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로 재직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과의 미묘한 권력 갈등이 계속되었고, 결국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되었습니다. 박정희는 그의 둘째 형을 대신 국회의원으로 내보내며 그를 견제했습니다.

1979

[민주공화당 총재 선출]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며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하며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되었습니다.

1980

[5.17 쿠데타로 체포]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신군부 보안사에 체포되어 감금당했습니다. 최규하 정권은 그를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하며 정치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되어 감금되었습니다. 최규하 정권은 관제보도를 통해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하며 그를 정치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신군부 압력으로 강제 정계 은퇴]

신군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운정재단'을 운영하며 야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 9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습니다. 이 강제 은퇴 이후 그는 운정재단을 운영하며 사회사업에 종사하는 야인 생활을 했습니다.

1987

[정계 복귀 및 신민주공화당 창당]

정치 활동 금지가 해제되면서 정계에 복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듬해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적 재기를 알렸습니다.

1980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1987년 정치 금지가 해제되자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구 한국국민당을 흡수하며 세를 확장했습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출마]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4위로 낙선했습니다.

1987년 12월, 신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된 공무원과 공직자들의 복직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나, 최종적으로 4위로 낙선했습니다.

1990

[3당합당 참여]

민주정의당 노태우의 3당합당 제의를 수용하여 통일민주당, 민주정의당과 통합해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하고,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며 집권여당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1990년 초, 민주정의당 노태우로부터의 3당합당 제의를 수용했습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했고, 2월에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되며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995

[민주자유당 탈당 및 자유민주연합 창당]

김영삼 대통령과의 내각제 개헌 주장 등 정치적 견해 차이와 당내 불화로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탈당했습니다. 이후 독자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습니다.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는, 김영삼과의 내각제 개헌 주장 등 정치적 견해 차이와 당내 불화 끝에 1995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했습니다. 이후 독자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습니다.

1997

[DJP연합 결성 및 김대중 대통령 당선 기여]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 차이가 있는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고 'DJP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이는 김대중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자유민주연합 총재였던 그는 이념적 차이가 컸던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고 'DJP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이 연합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 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1998

[국무총리 서리 임명]

DJP연합을 통해 출범한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약 5개월간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DJP연합을 통해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1998년 3월 3일 임명되었습니다. 약 5개월간 서리직을 수행한 뒤 정식 국무총리로 취임했습니다.

[제31대 국무총리 취임]

'국민의 정부'의 제31대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습니다. DJP연합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국민연금' 등 주요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국무총리 서리 임명 후 1998년 8월 18일, '국민의 정부'의 제31대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습니다. DJP연합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하였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에서도 그 권한을 드러내었습니다.

2000

[국무총리직 사퇴]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을 겪다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박태준이 임명되었습니다.

1998년 8월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국무총리로 재임했지만,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 대통령과 갈등을 겪다 결국 총리직에서 사퇴했습니다. 그의 사퇴 후 박태준이 후임 총리가 되었습니다.

2001

[DJP연합 붕괴 선언]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이 가결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하며 'DJP연합'이 최종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이후 소수 야당 총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이 가결되자 이를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하며 'DJP연합'은 사실상 붕괴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소수 야당인 자유민주연합의 총재로 남아 정치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2004

[제17대 총선 낙선 및 정계 은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가 이끌던 자유민주연합이 참패하고 본인 역시 10선에 실패하며 낙선했습니다. 이에 총재직을 사퇴하고 43년간의 정치 생활을 마감하는 정계 은퇴를 선언, '삼김시대'의 막을 내렸습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은 지역구 4석 획득에 그쳤고, 그를 포함한 비례대표 전원이 낙선했습니다. 10선에 실패한 그는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43년 만에 정치계에서 퇴장함으로써 '삼김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2008

[뇌졸중 발병]

정계 은퇴 후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했습니다. 이후 초인적인 재활운동을 통해 건강을 거의 회복했으나, 노환으로 고생했습니다.

정계 은퇴 후 2008년 12월 1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했습니다. 이후 치료와 재활을 반복하며 2010년 무렵 거의 정상을 회복했지만, 건강이 악화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2018

[사망]

서울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로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92세의 나이로 병원 도착 전에 사망했습니다.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으며, 충청남도 부여군의 종중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2018년 6월 23일,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으며,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 후 충청남도 부여군 종중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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