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num_of_likes 187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전두환
연혁 피인용 수 3
대한민국의 대통령, 군인, 정치인 + 카테고리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으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비합법적으로 집권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하여 역사적 비판을 받았으나 재임 중 3저 호황과 물가 안정 88 서울 올림픽 유치 등의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권위주의 통치와 인권 탄압 논란 퇴임 후 사법 처리 및 사면 그리고 막대한 비자금 추징금 미납 문제로 사망까지 비난이 지속된 논란의 인물입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31

[전두환, 합천에서 태어나다]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 사이 6남 5녀 중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유년기를 보냈으며,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습니다.

1937

[대구 희도소학교 입학]

5세에 대구로 이주한 후 7세인 1937년 희도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4학년 때 휴학하고 낫토 배달 등 생계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950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창 시절 권투부 활동과 함께 밤에는 목총을 들고 교내 순찰을 자발적으로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1951

[육군사관학교 11기 입학]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에 합격하여 1951년 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재학 중 노태우, 정호용 등 훗날 군사 반란을 모의할 동기들과 인맥을 형성했습니다.

1955

[육사 11기 졸업, 육군 소위 임관]

육사 11기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2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보임되었습니다.

임관 성적은 156명 중 126등이었습니다.

1959

[미국 포트브랙으로 군사 유학 떠나다]

노태우를 포함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함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브랙 기지로 군사 유학을 떠나 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60

[미국 레인저 스쿨 및 유격훈련 교관 과정 수료]

이듬해인 1960년 6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을 수료하고, 유격훈련 교관 교육 과정까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통과하며 군사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1961

[5·16 군사쿠데타 지지 시위 주도하며 박정희 총애 받다]

5·16 군사쿠데타 발생 직후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육사 교장의 금족령에도 불구하고 상부에 동향을 밀고하여 육사 장악에 기여했으며, 이 공로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며 출세 가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및 중앙정보부 요직 겸직]

5·16 지지 공로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어서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정보과장, 인사과장 등 주요 보직을 겸직하며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습니다.

1962

[박정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 거부, 군부 내 충성심 강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로 거부했습니다.

이 발언은 박정희의 뇌리에 깊이 박혀 더욱 총애를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6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임명]

육군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에 임명되었고, 1967년 8월 11일에는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69

[육사 11기 중 최초로 육군 대령 진급]

육사 동기들 중 중령 진급은 늦었지만, 육사 11기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며 빠른 승진 가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1970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

백마부대 29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1971년 11월까지 참전했습니다.

전투 중 '박쥐 26호 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일각에서는 전공 조작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1971

[월남전에서의 전공으로 3개의 무공훈장 수훈]

베트남 전쟁 참전 중 화랑, 충무, 을지무공훈장 등 3개의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다만, 월남전에서의 직속 상관들은 그의 훈장 수여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1973

[임기제 준장 진급 및 제1공수특전여단장 부임]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윤필용 사건으로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가 적발되며 숙청 위기를 겪었으나, 대통령 경호실장의 비호로 위기를 모면하고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1976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임명, 중앙정계 복귀]

차지철의 발탁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에 임명되며 중앙정계로 복귀했습니다.

노태우 역시 행정차장보로 발탁되어 함께 중앙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1978

[육군 제1사단장 부임 및 제3땅굴 발견]

육군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0일, GP 근무자의 보고를 받고 주변 지역을 수색한 끝에 7월 4일 제3땅굴을 발견하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1979

[국군 보안사령관 임명, 권력 장악 준비 시작]

국군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취임 직후 부하에게 계엄 상황 시 보안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하며, 향후 권력 장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0·26 사태 발생,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박정희 암살 수사 주도]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이 발생하자, 다음 날인 10월 27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사건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김재규 등을 체포하고 언론에 수시로 브리핑하며 수사 결과를 공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등 다른 정보기관을 통제하며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12·12 군사 반란 주도, 군부 실권 장악]

보안사령관으로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불법 체포하고, 이에 저항하던 장태완, 정병주 등 군 수뇌부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군사 반란으로 기록되며, 전두환 등 신군부의 권력 장악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전속부관 등이 부상을 당하고, 특전사령관 정병주의 부관 김오랑 소령(사후 중령 추서)이 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등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보안사령관으로 중앙정보부 차장보 겸임]

12·12 군사 반란 성공 직후 보안사령관으로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겸임하며 정보기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로써 국내외 정보 흐름을 장악하고 집권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습니다.

1980

[언론 장악 위한 K-공작계획 실행]

보안사 정보처 산하에 언론반을 설치하고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K-공작계획'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론 장악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 국내 모든 정보 기관 장악]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중앙정보부 간부들을 대폭 물갈이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했습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정치 활동 금지 및 김대중 등 불법 체포]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의견을 내세워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폐쇄,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영장 없이 불법 체포하며 사실상 쿠데타를 실행했습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항거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가 거세지자,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을 투입하여 무력 진압을 주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으며, 이는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논란과 인권 탄압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 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정부 실권 장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후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군사혁명위원회와 유사한 성격으로, 사실상 전두환이 국가 최고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경제학자 김재익 등에게 특별 과외 시작]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된 직후부터 스탠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의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을 초빙해 매일 아침 경제학 과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경제를 배우려는 노력으로, 후일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이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앞두고 군 내부에서 최고 계급을 달성한 것으로, 그의 권력 승계 과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 정계 입문]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며 군복을 벗고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조치였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정권을 합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국가보안법 연좌제 및 야간통행금지 해제]

취임 초, 국가보안법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하고 오랜 기간 시행되었던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했습니다.

이는 국민적 불만을 완화하고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잠실체육관에서 제1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습니다.

취임 초 악화된 대미 관계 개선을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미사일 포기 각서'를 제출했습니다.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 및 기존 정당 강제 해산]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을 발표하고 기존의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신민당 등 모든 정당을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이는 제5공화국 헌법 공포(10월 27일)와 함께 '정의사회 구현'을 명분으로 구시대 정치 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81

[민주정의당 창당 및 초대 총재 추대]

민주정의당이 창당되자 초대 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12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기반 마련이자, 사실상 1당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 제의]

정권 안정을 위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습니다.

이는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는 등 유화적인 대북 정책을 시도했음을 보여줍니다.

[제12대 대통령 당선, 7년 단임제 시행]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 단임)에 당선되었습니다.

90%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민주정의당 당선자들에게 축전 발송]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며 당내 결속을 다지고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신체장애자 구걸행각 단속 및 보호 조치 지시]

국무총리에게 신체장애자 구걸행각 단속 및 보호 조치를 지시하며 부랑인 보호시설 급증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국정자문회의 발족]

전임 대통령 최규하 등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하며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습니다.

이는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참여의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국풍81 축제 개최, 광주민주화운동 관심 분산 시도]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시도로 대규모 '국풍81' 축제를 개최했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 외교]

아내 이순자와 함께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동남아시아 5개국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광복절 기념식 연설에서 국권피탈 책임 일부 인정]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 연설에서 한국의 국권피탈에 일부 책임이 있었다고 언급하며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이는 이전 대통령들과 대조적인 발언이었습니다.

[핵개발 포기 및 관련 기관 명칭 변경]

박정희 정부가 주도하던 원자력 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하고 '에너지 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하며 핵개발 포기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1982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제의]

북한과의 비정치적·비군사적 교류를 통해 점진적인 통일을 목표로 하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습니다.

이는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KBO 한국 프로야구 출범 시구자로 나서다]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 출범할 때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첫 개막전 경기 시구자로 나섰습니다.

이는 3S 정책의 일환으로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였습니다.

[광복절 기념식에서 맹목적 반일보다 '극일' 강조]

광복절 기념식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때, 맹목적인 '반일'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승복기념관 준공식 참석 및 반공 정신 강조]

강원도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하여 이승복의 용기를 칭송하며, 그의 반공 정신이 전 국민에게 파급되어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미 치료 청원 허락]

김대중으로부터 도미 치료차 미국 여행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받고 즉시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는 정권 초기 억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시도로 평가됩니다.

1983

[민주정의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 참석]

민주정의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당권은 노태우에게 위임하여 운영했지만, 주요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며 당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김영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맞아 단식 투쟁 시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아 김영삼이 전두환 정권의 야당 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저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발생, 주요 각료 사망]

버마(미얀마)의 랑군 아웅산 묘소 참배 도중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서석준 부총리 등 장관급 5명과 주요 인사 21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본인은 현지 방문 후 뒤늦게 도착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21명의 민·관 인사가 사망하고 46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북한의 소행임이 밝혀졌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대신 인내를 강조했습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 약속]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했습니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 확보와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1984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접]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자 김포공항으로 직접 나가 영접하고 회담을 가졌습니다.

특별 지시로 교황의 임시 경호원을 설정하는 등 예우를 갖췄습니다.

[북한의 수해 물자 지원 제안 전격 수용, 남북관계 물꼬 터다]

남한에 발생한 대규모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쌀, 천, 시멘트, 의약품 등의 지원을 제안했고, 그는 1년 전 아웅산 테러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격 수용했습니다.

이는 남북관계 경색을 해소하고 인도주의적 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덴마크, 기니비사우, 코스타리카 정상 연이어 방한]

덴마크 국무총리, 기니비사우 대통령,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아 외교 활동을 활발히 펼쳤습니다.

1985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 제의]

북한에 서울·평양 상주연락대표부 설치를 제의하며 남북 간의 소통 창구 확대를 시도했습니다.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 방문 성사]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동시 교환 방문을 대대적으로 성사시켰습니다.

65가족 92명이 상봉하며 인도주의적 교류의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86

[유럽 4개국 순방 외교]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 유럽 4개국을 순방하며 외교 지평을 넓혔습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성공적 개최]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 대회는 2년 뒤의 1988 서울 올림픽을 위한 시험 무대 성격이 강했으며, 27개국 3,345명의 선수가 참가하는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1987

[제12대 대통령 취임 6주년 기념 오찬]

제12대 대통령 취임 6주년을 맞아 이순자 여사와 함께 삼부요인, 국회 및 민주정의당 간부, 군 참모총장들에게 오찬을 베풀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공직자들에게 안정 기반 다지기를 당부했습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 묵살, 4·13 호헌 조치 발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 요구를 묵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는 국론 분열과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오히려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켜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13 호헌 조치에 항거하는 6·10 항쟁 발발]

4·13 호헌 조치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하며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6월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며 전두환 정권에 강력한 퇴진 압박으로 작용했습니다.

[6월 항쟁에 굴복, 6·29 민주화 선언 발표]

거세지는 6월 항쟁과 군대 동원에 대한 제약 요인(올림픽 개최, 미국의 압력) 속에서,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를 수용하며 정권 이양의 길을 열었습니다.

[민주정의당 총재직 사퇴, 명예총재로 물러나다]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노태우에게 넘겨주고 명예총재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후계 구도 정립과 6·29 선언에 따른 정국 변화의 일환이었습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발생, 북한 소행으로 밝혀져]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한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폭파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88 서울 올림픽 방해 및 대한민국 내 불신 조장을 목적으로 한 김정일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88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취임, 정치적 영향력 유지 시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하며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며 5공 청문회가 진행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로 천거되다]

재임 중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미수 사건, KAL기 폭파 추락 사건 등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 평화 유지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었습니다.

[전두환 구속 촉구 2차 궐기대회,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 압박]

약 1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의 형제들을 구속시키며 5공 청산에 대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대국민 사과 성명 후 백담사로 피신, 은둔 생활 시작]

5공 비리 및 광주 민주화 운동 책임 추궁으로 인한 압박 속에 이순자 여사와 함께 강원도 백담사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1월 29일 민주정의당을 탈당했습니다.

1989

[13대 국회 5공 청문회 증언대에 서다]

5공 청문회 마지막 회기에 국회 증언대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1990

[백담사 은둔 생활 끝내고 연희동 자택으로 귀가]

백담사 생활을 끝내고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습니다.

25개월간의 은둔 생활을 마감한 것이었습니다.

1993

[문민정부 출범 후 내란죄 등으로 검찰에 고발당하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만 명의 국민이 그를 포함한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습니다.

이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과거사 청산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94

[서석재, 박계동 의원에 의해 4천억 비자금 수뢰설 폭로]

총무처 장관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이 그에게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하며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응으로 일축했으나, 이후 검찰 수사로 비자금 조성이 확인되며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1995

[노태우 구속 계기로 5·18 특별법 제정, '역사 바로 세우기' 선언]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자,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며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습니다.

['골목 성명' 발표하며 검찰 소환 거부, 정치 보복 주장]

자신의 사저 골목 앞에서 성명문을 발표하며 검찰의 소환 요구에 불응하고 '정치 보복적 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2·12를 포함한 모든 사건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없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다음날 새벽 체포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1996

[내란 및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

검찰은 그와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습니다.

그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2·12, 5·18 재판 1심에서 사형 선고]

서울지방법원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5·18 진압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 세력의 공세'라고 비난했습니다.

[항소심에서 무기징역 및 2,205억 원 추징금 선고]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이 판결은 다음 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

1997

[김영삼-김대중 합의에 따라 특별사면으로 석방 및 복권]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합의에 따른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특별사면되어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논란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1999

[5공 출신 인사들과 함께 정계 복귀 시도]

그와 5공 출신 인사들이 정계 복귀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밝혀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사면 복권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김대중 정부에 대북 특사 파견 제의했으나 거절당하다]

김대중 정부에 자신이 북한에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음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남북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다'는 신념을 표명했으나,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거절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건립위원회 고문으로 추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광주 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그가 백범 선생을 모욕한다는 비판과 단식 농성까지 불렀습니다.

2001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 오찬 참석]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오찬에 참석했습니다.

김대중은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한 조언과 협력을 요청했으며, 이 자리에서 그는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2002

[제2연평해전 희생자 합동영결식 참석]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희생 장병 3인의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여 유가족들을 조문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 참석으로 불참했습니다.

[녹화사업 개입 의혹 제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착수]

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운동권 성향 대학생 강제 징집 및 사상 개조)에 청와대 고위 간부 개입설과 그의 직접 지시 의혹이 제기되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소환 조사를 거부했습니다.

2003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 전국민적 공분 유발]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라고 정의하며 전국민적인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자신의 추징금 미납 의혹에 대해서도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참석]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 노태우, 최규하, 김영삼 전 대통령 등과 동석하여 참석했습니다.

[재산명시 심리재판에서 "내 재산은 29만 1천 원" 망언, 국민적 조롱거리 되다]

서울지법 서부지원에서 열린 추징금 관련 재산명시 심리재판에 출석하여 "자신 명의의 재산은 예금과 채권을 합쳐 29만 1천 원밖에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이 발언은 이후 '29만원'이라는 유행어로 회자되며 국민적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005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서훈 박탈 의결]

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그와 노태우를 비롯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81명에 대한 서훈 박탈을 의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태극무공훈장 등 10개의 훈장을 박탈당했습니다.

2006

[재산 상속 관련 80억 원 증여세 취소 소송 제기]

차남 전재용과 함께 자신에게 부과된 80억 원의 재산 상속 관련 증여세에 대한 취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최규하 전 대통령 빈소 조문]

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사망하자 그의 빈소에 조문했습니다.

12·12 군사 반란과 최규하의 하야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는 우회적인 답변으로 피했습니다.

2007

[이명박 당시 후보 방문 시 "인질 대신 내가 갈까" 발언, 구설수 오르다]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방문 시, 아프가니스탄 인질 납치극과 관련하여 "나는 이제 많이 살았다.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발언하여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2008

[언론 인터뷰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 발언 등 구설수 오르다]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경제난 극복 위해 "하루 두 끼 먹기 운동" 이색 제안]

방문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등 정치인들에게 전 세계적인 경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에 두 끼만 먹기 운동을 하자"고 이색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이 발언은 '코미디 같은 제안'으로 비판받았습니다.

2009

[김수환 추기경 빈소 '뒷짐 조문' 논란]

서울 명동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으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 평소 습관대로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하여 '뒷짐 조문'이라는 결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시 빈소 불참, "조금만 더 버티지" 발언]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자살했을 때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습니다.

서거 소식에 대해 "전직 대통령이란 분께서 꿋꿋하게 버티시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발언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재임 시절 회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며 이희호 여사에게 위로를 전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발언하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습니다.

2013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참석]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여 김영삼 전 대통령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두환 추징법' 통과, 일가 재산 압류 및 미술품 경매]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전두환 추징법'이 통과되며 추징 시효가 연장되고 타인 명의 재산도 환수 가능해졌습니다.

검찰에 의해 일가 소유 수백여 점의 미술품이 압류되어 경매에 부쳐졌고, 모든 작품이 100% 완판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2017

[회고록 <혼돈의 시대> 5·18 관련 내용 삭제 명령 및 출판 금지]

법원은 그의 회고록 제1권 <혼돈의 시대>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표현 33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판매·배포를 금지하라는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습니다.

이를 어길 시 1회당 5백만원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2018

[회고록 '검은 잉크' 재출간 후 2차 출판 금지 가처분 인용]

2017년 10월, 문제가 된 33개 부분을 검은 잉크로 덮어 재출간했으나, 5월 단체들의 2차 소송으로 광주지방법원이 다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습니다.

36개 내용이 추가로 거짓 내용으로 인정되었습니다.

2019

[5·18 헬기 사격 증언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 재판 첫 출석]

회고록에서 5·18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서술하여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형사재판에 35년 만에 광주로 내려가 참석했습니다.

그는 알츠하이머 투병을 이유로 불출석을 시도했으나 강제 구인 논란 끝에 출석했습니다.

2020

[명예훼손 재판에서 불성실한 태도로 비난받다]

또다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으나, 재판 내내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여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혐의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선고]

3번째로 광주 재판에 참석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시위대에 폭언을 하고 말다툼까지 벌였습니다.

이날 재판에서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2021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향년 91세로 사망]

오전 8시 4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투병 중 대변을 보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향년 91세.

유족과 측근은 생전 유언에 따라 유해를 화장하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했습니다.

국가장은 박탈되어 가족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는 2017년 작성한 회고록에서 '화장 후 북녘이 보이는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는 문구를 남겼다. 그의 사망 후 국가장 추진 및 여야 대선 후보 간 조문 논란이 일었으나, 결국 모든 주요 정치인들은 조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전두환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