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 민주 항쟁

민주화 운동, 항쟁, 시위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8:53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민주화 운동, 항쟁, 시위
report
Edit

부마 민주 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유신 체제 저항 운동입니다. 박정희 유신정권의 장기 독재와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 등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습니다. 학생 시위로 시작되어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며 확산되었으나,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여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 항쟁은 10.26 사태를 촉발하며 유신 체제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9년에는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부마 민주 항쟁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79

[신민당 김영삼 총재 당선]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강경파 김영삼이 대표로 당선되어 유신 정권에 대한 야당의 투쟁이 본격화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79년 5월 3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온건파 이철승을 꺾고 강경파 김영삼이 대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유신 정권에 맞서는 야당의 입지를 강화하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YH 무역 사건 발생]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강제 진압되는 사건이 발생, 이는 유신 정권의 노동 탄압과 야당과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1979년 8월 11일,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에 항의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노동자가 사망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 등 야당 인사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등 유신 정권의 야당 탄압과 노동권 침해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김영삼,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미국의 결단 요구]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에 대한 비판과 한국 민주화를 위한 결단을 요구하며 유신 정권과의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1979년 9월 16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미국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유신 정권 지지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 발언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김영삼 총재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직 제명]

집권 민주공화당이 날치기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였습니다. 이는 부마 민주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4일, 집권 민주공화당은 국회에서 날치기로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습니다. 이는 YH 사건 당시 신민당사의 농성 진압 과정에서 정부를 비판한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야당의 강력한 반발과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 확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부마 민주 항쟁 시작, 부산대 학생 시위]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유신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시위를 시작, 저녁에는 시내로 진출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과 유신 독재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저녁에는 시내로 진출하여 부산역, 국제시장 등으로 시위가 확산되며 부마 민주 항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부산 시위 시민 계층으로 확산 및 시설 파괴]

전날 시작된 학생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며 충무파출소, KBS 부산방송국, 부산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되고 경찰차량이 전소 또는 파손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17일, 부산 지역의 시위는 학생들을 넘어 시민 계층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충무파출소, KBS 부산방송국, 부산 서구청, 부산세무서 등 공공기관을 파괴하고 경찰 차량을 전소 또는 파손시키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는 유신 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뿌리 깊은 불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정부, 부산에 계엄령 선포 및 계엄군 투입]

정부가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하여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며 시위 진압에 나섰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0시를 기해 박정희 정부는 부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 등 계엄군을 투입하여 시위를 강제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058명이 연행되었고, 이 중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등 대규모 인명 피해와 인권 침해가 발생했습니다.

[마산 지역으로 시위 확산, 대학생들 합류]

부산의 시위가 마산 지역으로 확산되어 마산대학교(현 창원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며 민주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 등을 타격했습니다.

1979년 10월 19일, 부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인접한 마산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마산대학교(현 창원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시위대는 민주공화당사, 파출소, 방송국 등 유신 정권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타격하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마산에 위수령 선포 및 근로자·고등학생 시위 참여]

마산 지역에 근로자와 고등학생 시위가 합세하며 규모가 커지자, 정부는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켜 시위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1979년 10월 20일, 마산 지역의 시위에 근로자와 고등학생까지 합세하면서 시위 규모가 더욱 커지고 격화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추가로 출동시켜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으며,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부산·마산 통금 환원, 평온 되찾음]

부마 민주 항쟁이 진압된 후 부산과 마산 지역에 적용되었던 통금이 서서히 환원되며 지역이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10월 23일, 부마 민주 항쟁이 정부의 계엄령 및 위수령 선포와 군 투입으로 진압된 이후, 부산과 마산 지역에 내려졌던 통금 조치가 서서히 해제되며 지역 사회가 점차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부산 지역 계엄군 철수]

부마 민주 항쟁 진압을 위해 부산 지역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이 철수하며 사태가 종결 수순을 밟았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부마 민주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계엄군이 부산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이는 항쟁으로 인한 혼란이 마무리되고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가 해제되는 과정으로, 사태가 공식적으로 종결되는 수순을 밟았음을 의미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10.26 사건)]

부마 민주 항쟁의 여파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유신 체제의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부마 민주 항쟁의 확산과 강경 진압 방식에 대한 갈등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18년간 이어졌던 박정희 유신 체제를 종식시키고 한국 현대사의 큰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2014

[부마 민주 항쟁 진상규명·보상위원회 공식 출범]

부마 민주 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보상하기 위한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며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2014년 10월 13일, 부마 민주 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고 항쟁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관련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하기 위한 진상규명·보상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습니다. 이는 부마 민주 항쟁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그 역사적 의미가 재조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5

[부마 민주 항쟁 관련 법안 국회 통과]

부마 민주 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여 항쟁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지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015년 5월 18일, 부마 민주 항쟁 관련자들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 법률 제정을 통해 항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국가 차원의 지원과 보상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2019

[10.16 부마 민주 항쟁 국가 기념일 지정]

10.16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한민국 국가 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항쟁의 역사적 가치와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가 인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9년 9월 17일, 10.16 부마 민주 항쟁이 대한민국 국가 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유신 독재에 맞서 싸운 항쟁의 역사적 중요성과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미 있는 조치였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