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

희극인, 배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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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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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미디의 황제로 불린 전설적인 희극배우 이주일.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등의 유행어와 독특한 오리춤으로 80년대를 풍미하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연예계 최고 인기를 바탕으로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말년에는 폐암 투병 중 금연 운동에 앞장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삶의 희로애락을 코미디로 승화시킨 시대의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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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코미디 황제의 탄생]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서 5대 독자이자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나, 본명 정주일로 인생의 막을 올렸다.

이주일은 1940년 10월 24일, 본명 정주일로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서 5대 독자이자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이후 운양초등학교, 경포중학교,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1960

[연예 활동의 시작]

문선대에서 코미디를 시작하며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주일은 1960년 문선대에서 코미디를 시작하며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1963

[연극 무대 데뷔]

연극배우로 정식 데뷔하며 무대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1963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이주일은 1965년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나섰다.

1965

[정식 연예계 데뷔]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연예계에 정식 데뷔, 그의 끼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연극배우 이주일은 《샛별악극단》 사회자로 활동하며 연예계에 정식 데뷔하였다.

1980

[방송 코미디 황제 등극]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과 MBC '웃으면 복이와요'로 방송 데뷔하며 늦깎이 스타로 급부상했다.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김경태 PD에게 발탁되어 1980년 TBC의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로 본격적으로 방송 데뷔를 하며, MBC 《웃으면 복이와요》로 늦깎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못생긴 얼굴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80년대를 주름잡는 '코미디의 황제'로 군림했다.

[스크린 진출]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80년에 '이주일의 리빠똥 사장',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 '별명 붙은 사나이', '조용히 살고 싶다', '열번 찍어도 안 넘어진 사나이', '평양맨발'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82

[무궁화축구단 단장]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축구단' 단장을 맡으며 스포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82년 연예인 축구단인 '무궁화축구단' 단장을 지냈다.

1985

[사회복지협의회 후원회장]

사회복지협의회 후원회장을 지내며 사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85년 사회복지협의회 후원회장을 지냈다.

1988

[다양한 사회 단체 활동]

한국코미디연구회 창립 회장, 연예인협회 연기분과 명예위원장, 한국 BBS 중앙연맹 부총재를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1988년 한국코미디연구회 창립 회장, 연예인협회 연기분과 명예위원장, 한국 BBS 중앙연맹 부총재를 역임하였다.

1991

[아들 사망의 비극]

외아들 정창원이 차량전복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1991년 11월 22일, 외아들 정창원(당시 향년 28세. 미국 버지니아 위슬리언대 4학년)이 차량전복사고로 숨졌다. 장례식이 끝나고 3일 후 SBS 개국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슬픔 속에서도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1992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45.34%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92년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의 공천을 받아 경기 구리시 선거구에 출마했다. 본선에서 45.34%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6

[연예계 복귀와 재도약]

국회의원 활동 이후 SBS 심야 토크쇼 '이주일의 투나잇쇼'로 연예계에 복귀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제14대 국회의원 임기 후, SBS의 심야 토크쇼인 《이주일의 투나잇쇼》로 연예계에 마지막 복귀하였다. 그의 정치 및 재계, 사회문화에 대한 풍자와 해학은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였다.

1998

[방송계 은퇴]

'이주일의 투나잇쇼' 100회 특집을 끝으로 방송계를 은퇴하며 대중의 아쉬움을 남겼다.

《이주일의 투나잇쇼》의 100회 특집을 끝으로 방송계를 은퇴하였다.

2001

[폐암 선고와 금연 운동]

평소 다량의 흡연으로 폐암 말기를 선고받았으며, 이후 금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소에 담배를 하루에 2~3갑 상당을 피우던 그는 1991년, 아들이 숨진 이후 흡연량이 급속히 더 늘었다고 한다. 2001년 11월 17일에 폐암 말기를 선고받은 후 금연 명예교사, 범국민금연운동추진위원회 공동대표, 증언형 금연 광고 촬영 등 금연 운동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2002

[사후 공로 인정]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과 제29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특별상이 추서되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2년 8월 27일 사망한 이주일에게 국민훈장 모란장과 제29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특별상이 추서되었다.

[영원한 안식]

폐암 투병 중 국립암센터에서 61세의 나이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폐암 투병 중이던 2002년 8월 27일 오후 3시 15분 경 국립암센터에서 숨졌다. 춘천경춘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과 제29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특별상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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