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

대한민국 정부, 정권,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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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정권, 행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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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출범한 제6공화국 첫 정부. 군사정권에서 민주정부로의 과도기를 대표하며, 냉전 종식 시대에 북방정책으로 공산권 국가들과 대거 수교를 이끌어냈다. 3당 합당, 범죄와의 전쟁 선포 등 격동의 정치적 변화를 겪었으며, 경제 성장과 부동산 정책으로 사회의 틀을 변화시킨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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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제13대 대통령 당선]

6월 민주 항쟁으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며 제6공화국의 개막을 알렸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자, 전두환은 노태우 민정당 총재를 통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헌법에 의해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김영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1988

[노태우 대통령 취임 및 제6공화국 출범]

노태우 대통령이 정식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하며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는 군사정권에서 민주정부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역사적 순간으로 평가받는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하며 노태우 정부와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중용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 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며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7.7 선언' 발표로 북방정책 시작]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동포 교류 추진 등 6개항을 골자로 한 '7.7 선언'을 발표하며 대북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북방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동포 교류 추진을 포함한 6개항의 대북 정책을 골자로 한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 선언)'을 직접 작성, 발표했다. 이 선언은 한국 전쟁 이후 공산권 국가들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던 기존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대공산권 외교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른바 '북방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식 호칭 '중국' 발표]

노태우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으로 불리던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중국'으로 호칭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대중국 관계 개선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1988년 8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기존의 '중공'이라는 호칭 대신 '중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시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문헌 자료에서 중공보다 중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조치는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상징적 움직임이었다.

1989

[헝가리와 공식 수교 체결]

노태우 정부가 헝가리와 공식 수교를 맺으며 북방정책의 첫 실질적인 결실을 맺었다. 이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노력의 시작을 알렸다.

1989년 2월 1일, 노태우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헝가리와 공식 수교를 맺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과 헝가리 등 공산권 국가들이 대거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한 결과였다. 헝가리와의 수교는 이후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전교조 창립과 정부의 불법화 선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연세대학교에서 창립 대회를 열었으나,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하며 대규모 징계와 해고 조치를 단행했다. 이는 노태우 정부의 주요 국내 정치적 갈등 중 하나였다.

1989년 5월 22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연세대학교에서 창립 대회를 개최했지만, 학교는 전투경찰에 의해 봉쇄되었고 창립식 직후 폭력적인 진압으로 많은 교사와 참가자들이 다쳤다. 같은 날 저녁 노태우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교사 노조를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해산 및 단속을 천명했으며, 문교부 장관 정원식은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하여 가입 교사 1,500여 명을 파면, 해임하는 등 강경한 불이익 조치를 취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1990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창당]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1990년 1월,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의 전격적인 3당 합당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신한국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 합당은 노태우가 박철언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하려다 김영삼 등의 반발로 무산되고 결국 김영삼에게 대권 후보자직과 총재직을 양도하는 계기가 되는 등 한국 정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한-소련 정상회담 개최]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한-소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는 북방정책의 핵심적인 성과로, 오랜 냉전 대치 상태였던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1990년 6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방문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과 역사적인 한-소련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을 통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대한민국 방문 약속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공식 수교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만남은 냉전 시대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적 장벽을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북고위급회담 시작]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냉전 시대 남북 간 단절된 대화의 물꼬를 튼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후 남북관계 개선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총리를 대표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되었다. 북측 연형묵 총리 일행 90명이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리면서 범민족통일음악회, 남북 축구팀 통일축구대회 개최, 세계 탁구 및 청소년 축구 선수권대회 남북한 단일팀 참가 등 문화·체육 교류의 활성화로 이어지며 남북 관계 개선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소련과 역사적인 공식 수교]

대한민국과 소련이 공식 수교를 맺었다. 이는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로, 냉전 종식과 함께 세계 외교 지형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1990년 10월 1일, 대한민국과 소련이 역사적인 공식 수교를 단행했다. 이는 1988년 7.7 선언 이후 노태우 정부가 추진해온 북방정책이 거둔 가장 큰 결실로 평가된다. 이후 10월 30일에는 서울에 주한소련대사관이 개설되며 양국 관계가 본격화되었고, 냉전 시대 공산주의 맹주였던 소련과의 수교는 한국 외교의 지평을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10.13 특별선언)]

노태우 대통령이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10.13 특별 선언'을 발표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각종 흉악 범죄와 폭력조직을 소탕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직후부터 발생한 각종 살인, 강간 범죄 및 폭력조직의 활보에 대응하기 위해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범죄와의 전쟁'으로 불리며, 국가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을 소탕하고,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하며, 과소비와 퇴폐를 바로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후 정부는 심야영업 단속 강화, 유흥업소 및 교통질서 위반 집중 단속, 흉악범 및 반사회성 범죄조직 소탕 등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관련 법규를 개정하며 강력한 정책을 추진했다.

1991

[대한민국 유엔 가입 성사]

노태우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했다. 이는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세계 평화와 협력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 성과였다.

1991년 9월 16일, 노태우 정부의 꾸준한 외교적 노력 끝에 대한민국이 유엔에 가입했다. 이 과정에서 구 공산권 국가들의 요구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함께 가입하게 되었고, 결국 1991년 9월 17일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 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북방정책의 주요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반도 비핵화 공식 선언]

노태우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역대 정부의 핵개발 의지를 최종적으로 포기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한반도 평화 구축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1991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 선언하며 대한민국이 핵무기를 개발, 보유, 사용, 비축하지 않겠다는 국제적 약속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정부가 추진하려던 핵개발 의지를 최종적으로 포기하겠다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이후 남북한 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안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 등을 골자로 하는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다. 이는 남북관계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평화통일 기반 마련을 위한 중대한 성과였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한 공동 합의서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는 남북한 관계를 국가 대 국가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로 규정하며, 상호 인정과 평화 공존을 위한 기본 틀을 마련했다. 이는 남북한 간의 신뢰 구축과 관계 개선에 있어 중대한 진전을 의미한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남북한이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하며 사실상 핵개발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과 남북한 간의 상호 신뢰 구축에 기여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1991년 12월 31일, 남북한은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을 통해 양측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치, 사용을 일절 하지 않기로 합의하며,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약속을 했다. 이는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되며, 국제 사회에 한반도의 비핵화 의지를 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2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및 중화민국 단교]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며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 이와 동시에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가 이루어져 일부 보수 단체의 반발과 대만 측의 서운함을 샀다.

1992년 8월 24일, 노태우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며 건국 43년 만에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 총서기, 양상쿤 국가주석 등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가 이루어졌고, 이는 일부 보수 우익 단체의 반발과 대만 측의 강한 서운함을 초래하며 외교적인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는 북방정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였다.

[민주자유당 총재직 사퇴 및 당권 이양]

노태우 대통령이 민주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고 김영삼이 후임 총재로 취임했다. 이는 차기 대권 후보와 당권 이양을 둘러싼 오랜 갈등의 결과로, 사실상 김영삼의 대권 승계를 확정하는 과정이었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과의 오랜 갈등 끝에 민주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당권을 김영삼에게 넘겼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며 차기 대권 후보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이후 노태우는 명예총재로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주자유당을 탈당하며 사실상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군부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마무리 짓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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