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길
물리학자, 교육행정가, 대학 총장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1:42
대한민국 최초의 가속기물리학자로, 포항공과대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한국 과학기술 교육의 질적 도약의 기틀을 닦은 교육행정가이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포항방사광가속기 건설을 성공시켜 한국 기초과학 역량을 크게 높이며, 연구중심대학 모델을 제시하여 과학기술 교육 혁신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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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김호길 박사 출생]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한국의 물리학자이자 교육행정가로, 아호는 무은재이며 본관은 의성이다.
1933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안동 임동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경상북도 영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다.
1952
1952년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다.
1956
1956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쉬프의 양자역학과 벡커의 전자기학을 공부하며 이론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961
196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장학생으로 영국 버밍엄(Birmingham)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입자물리학을 전공했다.
1964
재발생 추출이론(Theory of Regenerative Extraction)으로 1964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싸이클로트론(cyclotron) 분야의 연구를 병행하였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버클리)의 로렌스 연구소(Lawrence Berkeley Laboratory) 연구원으로 물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1966
[메릴랜드 대학교 교수 재직 및 킴스 코일 창안]
메릴랜드대학교 물리학과와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핵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 등을 연구했고, 입자가속기 연구의 세계적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입자 가속을 위한 '킴스 코일'을 창안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는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물리학과와 전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핵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 등을 연구했다. 특히 입자가속기 연구의 전문가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원형 궤도에서 입자를 가속하는 장치인 싸이클로트론 연구를 많이 남겼고, 특히 입자 가속을 위한 “킴스 코일(Kim’s coil)”을 창안했다.
1969
[대한민국 국적자 최초 구소련 정식 방문]
구소련에서 열린 국제가속장치학회에 참석하여 국교 수립 이전 대한민국 국적으로 처음 구소련을 정식 방문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1969년에는 구소련에서 열린 국제가속장치학회에 참석하여 국교 수립 이전 대한민국 국적으로 처음 구소련을 정식 방문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71
1971년 미국 템플 대학교의 물리화학자 김순경 교수를 회장으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가 발족할 때 그는 간사장을 맡아 협회의 기틀을 다졌다.
1977
1977년에는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의 제6대 회장이 되었다.
1978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 선임연구원]
캘리포니아의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이직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입자가속기 연구 여건에서 새로운 형태의 입자가속장치 개발에 진력했다.
1978년 캘리포니아의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이직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입자가속기 연구 여건에서 새로운 형태의 입자가속장치 개발에 진력했다.
1983
[한국 영구 귀국 및 연암공전 초대 학장 취임]
미국 시민권을 따지 않고 한국의 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영구 귀국했으며, 럭키금성그룹 구자경 회장의 초청으로 연암공업전문대학 초대 학장직을 맡았다.
끝내 미국 시민권을 따지 않았던 그는 1983년 한국의 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영구 귀국했으며 당시 럭키금성그룹(현 LG그룹) 구자경 회장의 초청으로 경상남도 진주에 위치한 연암공전 초대 학장직을 맡았다.
1985
이후 포스코가 공과대학 신설을 추진함에 따라 1985년 포항공과대학교 초대총장(당시 명칭은 제철학원 소속 학장요원)으로 선임된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상소문 제출]
연암공대의 4년제 대학 인가가 나지 않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이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썼다.
정부가 4년제 대학으로 인가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귀국 당시의 포부는 실현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연암공대의 4년제 대학 인가가 나지 않자, 1985년 1월 5일 전두환대통령에게 인가를 얻어내기 위해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대한민주공화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이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썼다.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했다.
[포항공대 초대 총장 취임 및 연구중심대학 기틀 마련]
포항공과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연구 중심의 교육을 통해 기술 입국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해외 우수 과학자 유치 및 새로운 제도 시행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1985년 8월부터 1994년 4월까지 포항공과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연구 중심의 교육을 통해 기술 입국을 실현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는 새로운 개념이었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며, 포항제철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해외 60여 명의 한인 우수과학자를 유치했다. 그리고, 대학원 조기 개설, 전원 박사학위 소지자 교수 채용, 중진교수 중심체계 구축 등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고,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포항공대가 단시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국내 다른 대학에도 연구중심대학 모델이 확산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포항공대 교수 초빙 관련 발언]
포항공대 교수 초빙을 위한 간담회에서 "유학을 왔습니까, 이민을 왔습니까? 이민을 온 사람들은 남으시고, 유학을 온 사람들은 공부가 끝났으면 조국으로 돌아갑시다. 한국에서의 일류대학은 포항공대가 마지막입니다."라고 발언했다.
1985년 9월 27일 포항공대 교수초빙을 위한 현지 간담회에서 "유학을 왔습니까, 이민을 왔습니까? 이민을 온 사람들은 남으시고, 유학을 온 사람들은 공부가 끝났으면 조국으로 돌아갑시다. 한국에서의 일류대학은 포항공대가 마지막입니다."라고 발언했다.
1989
한국물리학회 부회장 (1989년 5월~1993년 2월)과 대통령자문기구 교육정책자문위원 (1989년 5월 ~ 1993년 2월)으로 활동했다.
1994
상허문화대상 수상 (1994년 3월)
[타계 (포항방사광가속기 완공 전)]
포항공대 교내 체육대회 중 발야구를 하다가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다.
1994년 4월 포항공대 교내 체육대회 중 발야구를 하다가 홈인 후 머리를 부딪히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포항방사광가속기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4년 5월)이 추서되었다.
[포항방사광가속기 완공 (세계 5번째, 한국 최초)]
그의 사후 포항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제3세대형 방사광가속기이자 한국 최초이며 아직까지 유일한 입자가속기로, 한국 기초과학 역량을 크게 높였다.
포항방사광가속기(Pohang Light Source)는 그의 사후인 12월에 완공되었다. 이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제3세대형 방사광가속기이며 한국에서는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입자가속기이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현재까지 1만3천여 건의 연구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한국의 기초과학 역량을 크게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