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대통령, 국무총리, 외교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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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국무총리, 외교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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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서 경력을 쌓아온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격동의 시대에 놓였다. 12.12 군사반란과 신군부의 등장 속에서 실권 없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다 불과 8개월 만에 사임,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퇴임 후 침묵을 지키며 청렴한 삶을 살다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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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

강원도 원주군에서 최양오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현,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서 최양오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8

[원주보통학교 월반 입학]

10세의 나이에 원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월반 입학하며 학업을 시작했다.

1928년 3월 10세 때 원주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월반 입학했다.

1932

[경성제일고보 입학]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 3월 30일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1935

[홍기와 결혼]

경성고보 4학년 재학 중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의 셋째 딸 홍기와 결혼했다.

경성고보 4학년 재학 중인 1935년 11월 부모의 뜻에 따라 홍병순의 셋째 딸 홍기와 결혼을 했다.

1941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했다.

1941년 2월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3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에 입학, 1943년 7월 5일 만주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을 수료하였다.

1945

[경성사범대학 조교수 취임]

광복 후 귀국하여 경성사범대학 영문학과 조교수에 취임하며 교단에 섰다.

1945년 8월 이후 귀국, 경성사범대학 영문학과 조교수에 취임하여 교단에 섰다.

1946

[미 군정청 기획과장 발탁]

경성사범 조교수 재직 중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며 공직에 투신했다.

경성사범 조교수로 재직 중 1946년 4월 미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에 투신, 농림행정에 종사하게 됐다.

1948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으로 보직되었으며, 이후 외무부로 발탁되며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됐으며, 그해 9월 26일부터 10월 1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농림부 차관 정흥구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51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령]

농림부 귀속농지관리국장을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으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후에는 농림부 귀속농지관리국장,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외교관이 되었다. 1951년 9월 9일부터 9월 18일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원동 경제위원회에 대한민국 대표단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다.

1952

[주일 총영사로 부임]

외무부 통상국장 재직 중 주일 대한민국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하며 일본에서 외교 활동을 시작했다.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재직 중 1951년부터 1952년까지 ECAFE 무역진흥회의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왔다. 1952년 7월 17일 도쿄의 주일 대한민국대표부 총영사로 부임하였다.

1959

[외무부 차관 임명]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한 후 귀국하여 외무부 차관이 되었고, 이후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임했다.

1959년 3월 20일 주일대표부 공사로 승진,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1959년 9월 12일 외무부 차관이 됐다. 1960년부터는 외무부장관 직무대행을 겸하다가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외무부 차관직을 사임했다.

1962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 참여]

5.16 이후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 창립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1964

[주 말레이시아 대사 부임]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 등을 거쳐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외무부 본부 대사를 거쳐 그해 3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이 됐으며, 4월 한일회담에서 한국측 교섭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1963년 5월 8일 다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정책소위 고문, 1964년 주 말레이시아 한국 대사(1964년 11월~1967년 6월)를 지내고 귀국했다.

1967

[외무부 장관 취임]

주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고 귀국하여 외무부 장관에 발탁되었으며,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며 외교 행정 강화를 꾀했다.

주 말레이시아 대사를 지내고 귀국하여 1967년 6월 외무부 장관에 발탁됐다. 1967년 제22차 UN 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고 돌아왔다. 외무부 장관 재임 시절에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 행정 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 외교를 강화했다.

1970

[한국외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

[대통령 외교보좌관 및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하고,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1971년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취임해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이 되어 평양에 다녀왔다.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 방문했다.

1975

[국무총리 서리 임명]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박정희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맡게 되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박정희는 그의 '과묵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무총리로 발탁했다'고 한다.

1976

[대한민국 국무총리 취임]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한민국 국무총리에 취임하며 박정희 정부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됐으며, 1979년 3월 국무총리로 재신임됐다. 박정희는 그의 '과묵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부족한 점을 높이 평가해 그를 국무총리로 발탁했다'고 한다.

1979

[박정희 서거 후 대통령 권한대행]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피습을 받고 살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으로서 권력을 이양받았다. 비상국무회의에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날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제10대 대통령 취임]

유신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했으나, 이는 야권과 재야 세력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현직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된 후, 권력 공백에 따라 헌법 제48조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10월 27일부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현행 헌법을 존속시키면서 제8대·제9대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1979년 12월 6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96.7%(2,465표)의 득표율을 얻고 당선되었다. 1979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에 피선되었으며, 12월 6일 통대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에 선출되어 다음 날 국무회의에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의결하였다. 이후 12월 21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12.12 군사 반란 발생]

최규하 대통령 취임 직후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며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최규하가 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0.26사건을 수사중이던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10.26 사건 당일 사건현장에 있었으며 사건발생 전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와 상황에 대한 협의가 있었음을 파악하고 12월 12일 오후에 정승화 체포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 관련된 일련의 상황을 12.12사태라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전두환 합수부장이 오후 6시에 올린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건의 재가를 미루었는데 결국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는 정승화가 체포되고 노재현 장관이 나타난 이후인 12월 13일 오전 5시 10분에 사후 승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긴급조치 해제 및 민주화 조치]

취임식 후 긴급조치 관련자 특별사면 및 석방, 제적 학생 복학 조치를 단행하며 유신 체제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79년 12월 21일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12월 21일에는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이 특별사면되고, 1,330명이 석방되었다. 또한 제적학생 759명이 복학되고, 해직교수 19명이 복직되었다.

1980

[재야인사 대거 복권]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인사 687명의 복권을 선언하며 민주화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80년 2월에는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의 복권을 선언하였다.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임명]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그를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며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가속화하는 상황을 맞았다.

1980년 4월 전두환의 강요에 의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다.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안 수용]

신군부의 강요에 의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등의 시국수습방안 중 비상계엄 확대안을 수용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집권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방안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최규하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 모든 일은 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여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했지만, 군부의 잇따른 강요에 5월 17일 오후 일단 비상계엄을 확대하는 방안만 받아들였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 후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의장이 되었으며, 이는 신군부의 전권 장악 통로가 되었다.

1980년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상무대에 와서 〈광주 사태 수습 위한 특별 담화문〉만 발표하고 사태 수습을 외면하고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26일 오후 6시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 주영복 등을 대동하고 광주에 왔으나 전남, 북 계엄분소장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뒤 상대방 쪽은 면담도 하지 않고 형식적인 담화문을 밤 9시 KBS 방송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그날 밤 10시에 속히 서울로 되돌아왔다. 5월 27일 신군부의 요청에 따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이 됐다. 신군부는 권력 접수 시나리오대로 국가비상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안을 5월 26일 최규하에게 재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규하는 이들의 비상기구 설립 요구를 회피하며 하루 동안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자 5월 31일 전두환을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국보위가 발족됐다. 국보위는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였다. 광주민주항쟁 이후 전두환 등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협하여 하야토록 했다.

[대통령직 사임]

신군부의 하야 요구를 받고 대통령직에서 사임, 대한민국 역사상 최단기 집권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신군부의 부탁을 받은 김정렬이 청와대로 찾아가 최 대통령과 5시간 담판을 하여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했다. 8월 16일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대통령 권한대행은 총리서리인 박충훈이 임시로 맡게 되었다.

1981

[국정자문회의 의장 역임]

대통령직 사임 후 국정자문회의가 발족되자 의장직을 맡았으며, 1988년 전두환 사퇴 후 다시 의장직을 맡았다.

1981년 4월 20일 국정자문회의가 발족되자 4월 20일부터 1988년 2월까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8년 11월 전두환이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자 1993년 2월까지 최규하의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으로 다시 맡았다.

1987

[국회 청문회 증언 거부]

6.29 선언 이후 12.12 및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 출석 및 증언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침묵을 지켰다.

87년 6·29선언 이후 12.12와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에 출석, 증언하라는 야당과 국민여론의 압력을 받았으나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그는 진술 거부에 대해 '그 사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전직 대통령이 증언에 응하는 악례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며 진술 거부의 이유를 피력하였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로부터 신군부가 사법처리의 대상에 올라 법원에서 수차례 증언 요청을 받지만, 이때에도 그는 법정 증언을 끝까지 거부했다.

2004

[부인 홍기 여사 서거]

오랜 세월 함께했던 부인 홍기 여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2004년 7월 20일, 부인 홍기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2006

[서거 및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서울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급성심부전으로 서거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었다.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오전 7시 37분에 서거했다. 서울대 병원측은 "최 전 대통령이 오전 병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심경기가 있었다"며 "급성심부전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향년 87세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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