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

학생운동가, 사회 운동가,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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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7- 20: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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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학생운동가, 사회 운동가,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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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로, 1987년 6월 항쟁 당시 최루탄에 피격되어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더불어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성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지며 1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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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이한열 출생]

1966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광주 동산초, 광주동성중, 광주진흥고를 졸업하고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이한열은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이병섭과 배은심의 2남 3녀 중 넷째 겸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전남 화순군에서 지냈으며,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 동산초등학교와 광주동성중학교를 나왔습니다. 그 뒤 광주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나 대입 시험에 낙방하여 1년간 재수 후,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980

[5·18 민주화 운동 목격]

중학교 2학년 시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직접 목격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 민주화 운동의 뜻을 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에 벌어진 1980년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보고 학생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게 됩니다.

1987

[최루탄 피격]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시위 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며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987년 6월 9일, 다음날(6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 의해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사진을 당시 로이터 사진기자였던 정태원이 촬영하였고, 중앙일보, 뉴욕 타임스 1면 머릿기사에 실리기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적인 무력진압의 잔인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한열 열사 사망]

최루탄 피격 후 한 달여간 사경을 헤매다 결국 만 2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한 전 국민적인 분노를 촉발하며 6월 항쟁을 걷잡을 수 없이 격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루탄 피격 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1987년 7월 5일 만 20세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한 청년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전두환 정권의 잔인성에 대해 전 국민적인 분노를 이끌어 내었고 6월 항쟁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주국민장 거행]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졌으며,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에 달하는 추모 인파가 모여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보여주었습니다.

1987년 7월 9일 그의 장례식은 '민주국민장'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는데,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경복궁 광화문 앞 → 광주 5·18 묘역 순으로 이동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최루탄 발사 전경대원 기소중지]

검찰 수사 결과, 이한열을 사망케 한 최루탄 발사가 안전 요령을 어긴 것임이 밝혀졌으나, 실제 발사 당사자는 특정하지 못하고 '불상의 전경대원'으로 기소중지 처분되었습니다.

검찰은 부장검사 1명을 포함한 검사 3명으로 수사반을 편성하여 사체 부검 현장을 검증하고 고발인, 경찰관 관련자, 진료 관계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관계자 등을 소환조사하였습니다. 수사 과정을 거쳐 검찰은 최루탄 사고 당시 SY44탄을 발사한 전경이 「최루탄 취급 요령」이라는 경찰교범에 나오는 안전 사각 35~45도를 어기고 발사각도를 낮춰 쏨으로서 이한열을 사망케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나 현장 지휘를 맡았던 서장, 중대장, 소대장 등 경찰 간부들에 대해서는 직무유기의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며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하였고, 총류탄을 발사해 이한열을 사망에 이르게 한 당사자는 특정하지 못하여, 서울지방검찰청은 1987년 8월 3일 불상의 전경대원을 살인 죄로 기소중지 처분하였습니다.

1992

1992.02.29 사후 5년

[연세대학교 명예 학사 학위 추서]

이한열의 희생을 기려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학사 학위가 추서되었습니다.

1992년 2월 29일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학사 학위가 추서되었습니다.

2016

2016.06.09 사후 29년

[연세대학교 정문에 추모 동판 설치]

이한열 열사 29주기를 맞아 그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동판이 연세대학교 정문에 설치되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29주년이 되는 2016년 6월 9일에는 추모하는 동판이 연세대학교 정문에 설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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