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정치 사건, 암살 사건, 국내 사건, 군사 정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4:52:32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권력 암투, 미국과의 관계 등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발생했습니다. 궁정동 안가 만찬 중 김재규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으며, 관련 인물들 또한 살해당했습니다. 김재규는 사건 직후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0.26 사건의 진실과 김재규의 암살 동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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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윤필용, 원충연 쿠데타 모의 적발]
육군방첩대장 윤필용이 원충연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며 공을 세워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체제 당시 윤필용은 육군방첩대장으로서 원충연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고 1.21 사태 때는 간첩을 잡는 공을 세워 수경사령관으로 진급하며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1968
[윤필용, 1.21 사태 간첩 적발]
윤필용이 1.21 사태 시 간첩을 잡는 공을 세워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수경사령관으로 진급했습니다.
윤필용은 1968년 1.21 사태 때 간첩을 잡는 공을 세워 수경사령관으로 진급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1969
[닉슨 독트린 발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괌에서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미군비 부담 감축 방침인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한국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69년 7월 25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괌에서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미군비 부담 감축 방침을 발표하는 닉슨 독트린을 내놓았다. 이는 베트남 파병을 통한 혜택을 누리던 한국 정부에게 미군 철수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박정희-닉슨 정상회담]
박정희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감축 예외와 사전 통보, 베트남 평화협상 긴밀 협의를 약속받았습니다.
닉슨 독트린 발표 직후인 1969년 8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닉슨 대통령은 한국은 군사감축에서 예외가 될 것이며,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계획이 있을 경우 사전에 한국 정부에 일정을 알려주고 베트남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약속했다.
1970
[박정희, 주한미군 감축 반대 표명]
박정희 대통령은 서신을 통해 한국의 방위부담 능력 한계를 지적하며 주한미군 감군이 북한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 강하게 반대하고 한국군 강화와 한미 협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1970년 6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신을 통해 주한미군 감군에 대한 강력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방위부담이 한국의 자원과 능력을 넘어서고 있음을 지적하며, 주한미군 감군이 북한의 전면적인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했다. 억지력 약화 방지를 위해 한국군 강화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방위산업 육성, 한국군 증원, 주한미군 중 해군과 공군 강화, 미국의 대한방위 의지 강화 외교적 보장 등 한미 협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애그뉴 미 부통령 방한]
애그뉴 미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장시간 회담을 갖고 감군협상을 마무리했으며, 박정희는 주한미군 감군 시기와 선거 기간 일치에 불안감을 표했습니다.
한미 간의 이견이 지속되자 1970년 8월, 철군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 스피로 애그뉴 미 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장시간 회담을 가졌다. 부통령의 한국 방문 브리핑 문건에는 박정희가 주한미군 감군 시기와 71년 봄 선거 기간이 일치한다는 점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미국은 방위조약의 모든 의무를 지키되, 한국이 요구하는 유사시 자동개입은 허락할 수 없음을 못 박았다.
1971
[윤필용, 김재규 파벌 도청 발각]
윤필용 육군방첩대장이 김재규 파벌의 수경사 보안부대 도청을 발각하고 폐쇄,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되어 3군단장으로 좌천 후 군을 떠났습니다.
팽팽한 파벌전 중 자존심이 강했던 김재규(육사 2기)가 승승장구하던 후배 윤필용(육사 8기)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1971년 8월, 윤필용은 김재규 파벌이었던 수경사 내의 보안부대가 자신의 전화를 도청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경사 영내의 보안대 사무실을 폐쇄하고 도청 테이프를 압수했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는 한 달 뒤 보안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강원도 최전방 산골에 있던 3군단장으로 좌천된 이후 군을 떠난다.
1972
[7.4 남북 공동 성명 합의 및 자주국방력 증강]
박정희 정부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북한에 파견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을 비밀리에 합의하고,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자주국방력을 대폭 증강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 개발도 이때 시도되었습니다.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에 파견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비밀리에 합의하며 북한군 남침 위협을 막는 시간을 벌었다.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하려는 미국 정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되, 실제로 미군이 철수했을 때를 대비하여 필사적으로 자주국방력을 대폭 증강시키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이 처음 시도된 것도 이 때이다.
[10월 유신 선포, 김재규 반정 마음 품어]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했으며, 김재규는 이를 독재 헌법으로 규정하며 이때부터 박 대통령 암살 계획을 마음속에 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김재규는 이후 군사재판에서 "72년 유신헌법을 보면서 이는 명백한 독재 헌법이다, 이 헌법을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움텄다"며 10월 유신 선포 이후 박 대통령 암살을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진술했다. 이 시기는 김재규가 도청사건 이후 좌천되어 군을 떠났던 시기와 일치한다.
1973
[윤필용 모반사건 발발]
이후락 중정부장과 술자리에서 윤필용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 노쇠론과 이후락 후계론을 주장하며 문제가 되어 징역형을 받았고, 하나회 장성들이 강제 예편되며 청와대 권력구도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973년 4월, ‘윤필용 모반사건’이 발생하여 청와대 권력구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술을 마시던 윤필용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발언해 문제가 됐다. 이로 인해 윤 사령관은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하나회 소속 장성 3명을 포함한 장교 13명이 징역형을, 31명이 강제 예편됐다. 160여 명은 감시대상으로 분류됐다.
1974
[육영수 여사 피살, 박종규 경호실장 사임]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 그 후임으로 차지철이 들어와 권력의 핵심 측근으로 부상했습니다.
박정희의 경호실장이던 박종규는 1974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멤버이자 김일성 추종자였던 문세광이 영부인을 저격한 육영수 저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로 차지철이 들어왔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3명의 ‘충신’을 잃었으며, 군내 우수 장교와 중앙정보부 우수 인재들이 정리되어 인재난을 겪게 된다.
[김재규, 건설부장관 임명 시 권총 소지]
김재규는 건설부장관 사령장을 받으러 갈 때 바지 주머니에 권총을 가지고 갔다고 주장하며, 이때도 박 대통령 암살 기회를 엿봤다고 밝혔습니다.
김재규는 72년부터 유신헌법을 타도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며, 1974년 9월 18일 건설부장관 사령장을 받으러 갈 때 바지주머니에 권총을 갖고 갔다고 진술했다. 그는 75년 1월 27일경 대통령의 건설부 초도순시 때도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기는 등 여러 차례 기회를 엿봤다고 주장하며, 이는 장준하의 '8월 거사' 준비 시기와도 일치한다.
1975
[김재규, 건설부 초도순시 때 권총 소지]
김재규는 대통령의 건설부 초도순시 때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기는 등 암살 기회를 엿봤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재규는 72년부터 유신헌법을 타도하려 했다는 주장을 하며, 75년 1월 27일경 대통령의 건설부 초도순시 때도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기는 등 여러 차례 기회를 엿봤다고 주장한다. 이는 장준하의 '8월 거사' 준비 시기와도 우연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김대중-장준하, 반유신 거사 합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장준하가 재야세력을 규합해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벌이는데 합의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006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진행한 조사 과정에서 1975년 7월 29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장준하가 재야세력을 규합해 어떠한 거사를 치를 것이라는 합의를 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김 전 대통령은 7월에 장준하와 밀담했던 것,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벌이는데 합의했던 것은 인정하였으나 쿠데타나 대통령 암살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장준하의 '8월 거사' 계획]
장준하는 광복 30주년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 또는 유신 정권을 제거하려는 계획인 '8월 거사'를 준비했으며, 김재규도 여기에 참여했다는 설이 존재합니다.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던 김재규가 쿠데타를 7년간 준비해 왔으며 장준하의 '8월 거사' 계획에도 참여했었다는 설이 존재한다. 장준하의 '8월 거사'는 1975년 광복 30주년이 되는 8월 15일에 맞춰 박정희 대통령 또는 유신 정권을 제거하려는 계획이었으며 김대중, 함석헌, 홍남순 같은 여러 재야인사들 뿐만 아니라 군부 동조 세력까지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
1976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경질된 신직수 제7대 중앙정보부장 후임으로 김재규가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며 청와대 최측근으로 복귀했습니다.
1971년 도청사건 이후 군을 떠나며 권세를 잃었던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배려로 호남비료 사장, 유정회 국회의원, 건설부장관을 역임하며 정치권을 떠돌다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경질된 제7대 중앙정보부장 신직수의 뒤를 이어 같은 해 12월에 제8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며 청와대 최측근 세력으로 복귀하게 된다.
1978
[김재규, 박정희 종신 대통령 임무 강조]
김재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찾아가 중앙정보부의 기본 임무가 박정희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발상이라고 말했다고 김종필이 회고했습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에 의하면 1978년 2월, 김재규는 김종필이 주거하던 서울 중구 청구동을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임무에 모든 기능과 자원을 집중하기로 하였다"고 전하며 달라진 중앙정보부의 기본 임무에 저촉되는 자는 단속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김종필이 "정보부의 기본 임무 변경이 박 대통령의 지시냐"고 물으니 김재규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발상한 겁니다" 라고 답했다고 회고한다. 이는 김재규가 72년부터 유신헌법을 타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사뭇 다르다.
1979
[카터 대통령 방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연설했으며, 김재규는 한 달 전부터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 CIA 서울지부장 브루스터와 만나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한 미국 측 의견을 들었습니다.
1979년 6월 26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한 때 박정희 대통령은 대대적인 환영 인파를 조직하고 만찬을 여는 동시에 미군 문제를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미국 측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45분간 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연설했었다. 한편 김재규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한 한 달 전부터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 CIA 서울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와 자주 만나 미국인들 시각에서 본 한국 경제와 국내정치에 대한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 김재규와 공식 마지막 대화]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이날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니어는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다. 하지만 이후 10.26 사건 당일날 김재규를 만났다는 사실이 드러나 그의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박정희,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위해 헬기 탑승]
박정희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업무보고를 마치고 경호실 헬기에 탑승하여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러 출발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주요 업무보고와 결재를 마친 뒤 오전 10시 27분 경호실에서 준비해놓은 헬리콥터에 탑승하여 오전 11시 경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어서 낮 12시 10분에는 다음 일정지이던 KBS 당진 송신소 보강공사 준공식에 도착했다.
[김재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 면담]
사건 당일 오후, 김재규가 박 대통령 시해에 앞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미국 배후설 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사건 당일) 오후 2시경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앞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를 먼저 만났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김재규와의 마지막 대화가 1979년 9월 26일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혀왔던 글라이스틴 대사의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암살되는 당일날 글라이스틴 대사가 김재규를 무슨 이유로 만났는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논란 이후 미 정부는 해당 문서들을 다시 비공개 처리하였다.
[김재규, 정승화 총장 등과 만찬 약속 조율]
김재규는 박흥주에게 인터폰으로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오후 6시 30분에 같은 장소에서 만찬 약속을 잡도록 지시, 대통령 만찬과 겹치게 했습니다.
오후 4시 40분 경, 김재규는 1층 윤병서 의전비서의 방에 있던 박흥주에게 인터폰을 하여 정승화 총장과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전화 연락을 지시한 뒤 (김정섭은 부재중이라 추후 연락하겠다고 전한다) 같은 장소에서 오후 6시 30분 저녁 약속을 잡으며 일부러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와 겹치게 한다. 1979년 12월 10일 중앙일보 기사에는 5시 30분 약속이었다고 기재되었지만, 김재규의 다른 진술서들과 박흥주 대령의 진술까지 통틀어 비교한 결과 오후 6시 30분일 가능성이 더 높다.
[박정희, 차지철 궁정동 안가 도착]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 도착했으며, 김재규는 권총을 숨긴 채 박 대통령과 대면했습니다.
저녁 6시 5분 즈음 도착한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발터 PPK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하루 전 섭외해둔 모델 신재순과 당일날 섭외한 가수 심수봉을 만찬 장소로 데려와 경호관 대기실에서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김재규, 박선호와 박흥주에게 암살 명령]
김재규는 박선호 의전과장과 박흥주 수행비서를 불러 정인형, 안재송 처단과 경호원 제거를 지시하며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 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박선호에게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흥주 대령에게는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며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김재규, 박정희와 차지철 총격]
김재규가 연회장에서 '건방져'라고 외치며 발터 PPK 권총으로 차지철의 손목과 박정희의 가슴에 총격을 가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밖에서 돌아온 김재규가 자리에 앉자마자 '건방져' 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 권총을 꺼내 두 발을 쏘았다. 첫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맞았으며 두 번째는 박정희의 가슴에 맞았다. 김재규가 일어서며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이 격발 불량을 일으키며 고장이 나자 급하게 방 밖으로 나가버린다. 차지철은 '저사람 왜 저래'하며 손에서 피를 흘리며 화장실 쪽으로 나갔고 그 순간 방안 조명이 모두 꺼졌다. 신재순은 박 대통령에게 괜찮냐고 재차 확인했고 박정희는 괜찮다고 똑똑히 대답하였다.
[김재규, 박정희 후두부 및 차지철 총살]
총을 바꿔 돌아온 김재규는 화장실에서 돌아온 차지철에게 연달아 총을 쏘아 쓰러뜨린 후,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겨 살해했습니다.
차지철이 화장실에서 돌아와 박 대통령의 안부를 묻자 그때도 박정희는 괜찮다고 또박또박 대꾸하였다. 차지철이 경호원을 부르려고 다시 나가자마자 박정희의 상체가 쓰러졌고 심수봉이 쓰러진 대통령을 부축하려 하자 크르륵 하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방의 불이 켜지고 차실장이 뒷걸음질을 치며 연회장 방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바로 코앞에는 김부장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차지철은 방 한쪽에 놓여있던 가구를 집어들고 김재규에게 돌진했고 김재규는 뒤로 물러서면서 연달아 총을 쏘았다 (약 4발). 차지철은 폐와 복부에 총알이 박히며 퉁기듯 뒤로 나자빠졌다. 차지철을 쓰러뜨린 김재규는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 다가와 신재순의 무릎에 있던 박정희 후두부에 총을 대고 50cm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고서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 박혔다. 머리 총상은 치명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의 총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습니다. 당시 나이는 만 61세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 연회 중에 김재규의 총격으로 가슴과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고 곧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1세였다. 당시 정부의 공식 입장과 뉴스에서는 김계원이 박정희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고 알려져 왔지만, 공개된 미국무부 해제 비밀문서들에서는 다른 내용이 나온다.
[박정희 일행, 점심 식사 후 청와대 귀로]
개소행사가 끝난 후 대통령 일행은 도고호텔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오후 1시 50분 청와대로 귀로에 올랐으며, 이동 중 박 대통령은 헬기 기장에게 현충사 상공을 돌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개소행사가 끝난 오후 12시 45분 대통령 일행은 근처 도고호텔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한 뒤 오후 1시 50분 다시 청와대 귀로에 오른다. 이동 도중에 박 대통령은 헬기 기장에게 "서울로 가기 전에 아산만 쪽으로 가서 현충사 상공을 한 바퀴 돌아주게"라고 청하였고, 대통령의 평소 생활을 잘 알고 있던 일행들은 별다른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지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후 2시 32분, 청와대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며 2호기를 타고 먼저 도착해 대기 중이던 수행 비서관들의 영접을 받았다고 한다.
[차지철, 김재규에게 궁정동 안가 만찬 통보]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오후 6시에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 만찬이 있을 것이라고 전화로 통보했습니다.
오후 4시 10분 경, 중앙정보부 남산분청 본인 사무실에 있던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오후 6시에 대통령을 모시고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라는 전화 연락을 받는다. 차지철의 통보를 받은 직후 김재규는 수행비서관이던 박흥주 대령과 함께 남산의 부장실을 출발하여 20분 뒤에 궁정동의 정보부 안가에 도착한다.
[김계원-김재규, 만찬 전 대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과 김재규가 만찬 전 대화에서 김계원은 신민당 정운갑 대행체제 출범에 대한 기대를 언급했고, 김재규는 '그 친구'를 해치우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후 5시 10분 즈음 도착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과 김재규가 식당에 들어가기 전 사무실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김계원은 신민당이 정운갑 대행체제가 출범하면 사태가 제대로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고 전해진다. 김재규는 김계원 실장에게 '그 친구'를 해치우겠다고 언급했더니 김실장은 아무 말 없이 약간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김재규, 정승화 총장에게 상황 양해 요청]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불러들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재규는 박선호와 박흥주에게 암살 명령을 내린 후 저녁 7시 38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경호 인력 제거 작전 실행]
김재규의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박선호 의전과장은 대기실에서 정인형 경호처장과 안재송 경호부처장을 살해했고, 박흥주 수행비서 역시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들을 살해했습니다.
처음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을 죽였다.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가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나 김재규의 고장 난 발터를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와 맞바꿔주고 주변 탐색을 계속 하였다.
[심수봉, 신재순 귀가 및 함구 지시]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남효주가 심수봉과 신재순을 별채로 안내, 20만원씩 건네며 사건 비밀 유지 및 연락 대기를 지시한 뒤 귀가시켰습니다.
약 20분 뒤인 10시 30분 경 남효주와 박선호가 나타나 둘을 별채로 안내한 뒤 20만원씩 건네주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비밀로 하고 연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일이 잘되면 상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 뒤 남효주가 내자호텔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본부로 향한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글라이스틴 대사, 박정희 사망 사건 보고]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장관에게 'SE16336' 전문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 사망 사실과 김계원의 초기 행동을 보고했습니다.
1979년 10월 27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장관에게 보고한 'SE16336' 전문에 따르면 '부상을 당하지 않은 김계원은 박대통령을 대통령 전용차에 태워 (만찬장의) 7시 55분 근처에 있는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A nearby hospital run by an American doctor). 반면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근무하던 청와대 의무실장 김병수가 박정희의 총상 입은 사체를 보게 된 것은 처음 김재규가 권총을 발포 한 뒤 2시간이 지나서였다.
[글라이스틴 대사, 미국 의회 청문회 반대]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이 박정희 암살에 공모했다는 의혹이 증폭될 것을 우려하며, 미국 하원의 박정희 암살 관련 청문회 개최를 막아야 한다는 전문을 국무부에 보냈습니다.
1979년 11월 초 미국 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월 8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죽음을 공모했다는 의혹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공모한 적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도 그의 정부와 안보, 경제 등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문회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박 대통령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더 증폭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제10대 대통령선거 실시]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고, 헌법에 따라 제10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되어 당시 국무총리이던 최규하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하고, 헌법에 규정되어 있기에 대통령의 국장을 마무리한 이후 제10대 대통령선거를 1979년 12월 6일 실시한다.
[12.12 군사 반란 발발]
10·26 사건 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승화를 신속히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 폐지로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군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980
[박흥주 대령 총살형 집행]
10·26 사건 가담자 중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박흥주 대령이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군사재판 단심으로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박흥주 대령은 신분이 현역 군인인 관계로 1980년 3월 6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의 경우는 군사재판이 단심으로 끝나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 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 등 사형 확정]
김재규를 포함한 피고인 7명에 대한 10·26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내란목적을 인정하는 다수의견을 받아들여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등의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피고인 김재규에 대하여 1, 2심에서 신속하게 사형선고가 이루어졌지만 대법원 형사3부에서 내란목적 인정 여부를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 전원합의체에서 판단을 하여 사건 발생 후 207일 만인 1980년 5월 20일에 열린 선고공판에서 이영섭 재판장은 김재규 피고인 등 7명에 대해 "유신헌법 자체가 불법이거나 민주국가 정치 기본조직을 파괴한 내란 상태라는 주장은 독단에 지나지 않으며 피고인들의 행위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된다. 저항권은 실정법에 근거가 없으므로 법관은 이를 재판규범으로 원용할 수 없다"는 다수의견을 받아들여 상고기각을 결정했다.
[김재규 등 10.26 사건 가담자 사형 집행]
김재규,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이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김재규는 내란목적 살인죄와 내란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육군본부 계엄고등군법회의가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고 1980년 5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박선호, 유성옥, 이기주, 김태원도 같은 날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1984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1980년 가수 활동을 금지당하다가 1984년 복귀하였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간 후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