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교육인, 정치인, 학자, 총장, 장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9:24
대한민국 제2대 문교부 장관, 제1대 연희/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교육자이자 정치인입니다. 국문학, 한글학, 기독교 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 학문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교육자치제와 의무교육 실시를 제안하고, 6.25 전쟁 중 전시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참의원 의장 역임 후,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과 유신에 반대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친일 논란이 있으나, 광복 후 대한민국의 교육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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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출생]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동에서 농부 백영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습니다.
1895년(고종 33년) 평안북도 정주군 관주면 관삼동에서 농부 백영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0
1910년(융희 4년) 봄에 평안북도 선천군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중학교 재학 중 선교사였던 교장 윤산온 목사의 실천에 감동받아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13
1913년에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신성소학교의 교사에 채용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 허베이성 톈진의 신학서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14년 이후에도 신성소학교 교사직을 유지하였다.
1916
1916년 미국에 건너갔으며 막노동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1918
1918년에 미국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22
1922년에 파크 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편입학하여 1922년부터 1925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였다.
1923
1923년에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1925년에는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역사를 수학하였다.
1925
1925년에는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역사를 수학하였다.
1927
1927년에 논문 <조선신교사 (朝鮮新敎史)>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 및 학과장 임명]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며 교육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귀국한 뒤 조선YMCA기독교청년회 이사, 조선기독교서회 이사 등을 지내고, 1927년 유억겸의 추천으로 연희전문학교의 문과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과장에 임명되었다. 이화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근화여자실업학교에도 출강했다.
1934
[진단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이병도 등과 함께 진단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고, 조선민속학회와 조선어학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1934년 5월 7일 이병도 등과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발기인 및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민속학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에서도 추천받아 회원이 되었다.
1938
[영국 왕립학회 회원 및 이사장 선출]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되며 국제적인 학술 활동을 펼쳤습니다.
1938년에는 영국 왕립역사학회 회원이 되고 그해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이사장에 선출됐다.
1939
1939년 여름 강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투옥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1943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 활동 논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 등을 지내며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으로 주장하는 등 친일 활동에 가담하여, 해방 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으나,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지목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및 학부장 역임]
경성제국대학교가 경성대학으로 개편되면서 법문학부 교수와 학부장을 겸임했으며,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육심의회 구성에 참여했습니다.
1945년 9월 경성제국대학교가 적산불하로 미군정에 의해 경성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으로 개편되면서 경성대학 법문학교 교수가 되고, 법문학부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미군정에 의해 설치된 조선교육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교육심의회 구성에 참여하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도 한국교육위원회로 개편되었을 때도 자문위원직을 유지하였다.
[임시정부 환국봉영회 참석 및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참여]
귀국한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 참석하고, 신익희, 김구 등과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 참여하여 국민대학교 설립에 기여했습니다.
1945년 11월에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봉영회에 참석한 뒤 임정 인사인 신익희, 김구 등과 함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국민대학설립기성회 창립발기인 및 회원이 되었으며, 국민대학교의 개교와 재단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에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6
1946년에 연희전문학교가 연희대학교로 승격되면서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1949
[동방학연구소 창립 및 초대 소장]
연희대학교 내에 동방학연구소를 창립하고 초대 총장이 되어 학회지 《동방학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연구소는 1977년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소로 개편됩니다.
1949년 12월 연희대학교 내에 부지를 마련하고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를 창립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다. 동시에 학회지인 《동방학지》를 발간하고 편집인이 되었다. 동방학연구소는 1977년 연세대학교 국학 연구소로 개편되었다.
1950
[제2대 문교부 장관 취임]
제2대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국 전쟁 중에도 홍익인간 교육이념, 의무교육, 교육자치제 실시, 전시 노천 교육 및 연합대학 설립 등 교육 문제 해결에 헌신했습니다.
1950년 5월부터 1952년 10월까지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국 전쟁 중의 교육 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을 세우고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를 실시하였으며, 6.25 전쟁 중에는 전시 노천 교육과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피난지에서 각 대학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대학생들에게 각 전공, 교양 등의 과목을 수학하게 하였으며, 이때에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성수 부통령에게 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설득하였다.
1950년 장관 재직 중에 총리 서리로 임명되어 국회에 승인요청되었다. 그러나 표결 결과 국회의원 재석 123명 중 찬성 21표, 반대 100표, 기권 2표로 부결되자,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 다시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 제안]
그는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를 제안하여, 1952년 5월부터 시군구 및 도 교육청이 설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민학교 의무교육은 1958년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1952년 그는 의무교육과 교육자치제를 제안하였다. 그의 건의는 채택되어 52년 5월부터 각 시,군,구별로 시,군,구 교육청과 도 교육청이 설치되고 시,군,구 교육감 선거, 도 교육감 선거가 실시되었다. 백낙준의 전국민 의무교육 제안은 1958년에 채택되어 58년부터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전신) 의무교육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되었다.
1956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및 한국행정학회 초대 회장]
대한교육연합회 회장과 한국행정연구회(한국행정학회 전신) 초대 회장을 지내며 교육계와 학계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56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한국행정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그해 10월 12일 한국행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회원이 되었으며, 같은 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1959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
1960
1960년 5월 민참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어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참의원 의원이었다.
[참의원 의장 역임 및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참의원 의장으로 재직하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했습니다.
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참의원 의장으로 재직하였다. 1960년 8월 9일부터 8월 12일까지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수행하였다.
1961
1961년에 연세대학교 명예 총장에 추대되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참의원 의장직 상실]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 국회가 해산되면서 참의원직 및 참의원 의장직을 잃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국회(민의원, 참의원)가 모두 해산되면서 참의원직 및 참의원 의장직을 잃었다.
1969
1969년부터 국토통일원 고문에 위촉되었으나 삼선개헌안에 반대하였다. 1960년대에는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72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하자 반대하여 국토통일원 고문을 사퇴하고 야당 운동에 동참하였다.
1974
1974년에는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과 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에 동참하였다.
1985
1985년 1월 13일에 서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뇌졸중, 고혈압, 당뇨병, 심부전증,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서거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