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우

안과 의사, 국어학자, 저술가, 사진가,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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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
안과 의사, 국어학자, 저술가, 사진가,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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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우는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이자 평생을 한글 기계화 및 전산화에 바친 인물입니다. 특히 실용적인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말년에는 매킨토시를 활용한 한글 자판 개발과 아래아한글 창업자들을 지원하는 등 한글 과학화에 기여했으며,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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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공병우 박사 출생]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유복한 집안의 팔삭둥이로 태어나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한 인물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1907년 1월 24일, 공병우는 평안북도 벽동군에 있는 유복한 집안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이후 한국 사회의 안과 의료 발전과 한글 기계화에 지대한 공헌을 할 한 위대한 인물의 시작점이었다.

1926

[조선 의사 검정 시험 합격]

공병우는 의학을 향한 열정으로 조선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하며 의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26년, 공병우는 조선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의학 공부와 실천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훗날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의가 되는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1936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 취득]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의학적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36년, 공병우는 일본 나고야 제국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았다. 이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선진적인 안과 의술을 펼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938

[한국 최초 안과 전문의원 '공안과' 개원]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를 개원하며 한국 안과 의료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의학 기술과 환자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938년, 공병우는 한국인 최초로 안과 전문 의원인 '공안과'를 개원했다. 당시 한국 의료 환경에서 안과 전문 의원이 없던 상황에서 그의 개원은 한국 안과 의료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선진적인 의술과 탁월한 진료로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1940

[창씨개명 반대 '금일 공병우 사망' 선언]

일제강점기 말기,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반발로 스스로 '금일 공병우 사망'을 선언하며 강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은 한국인에게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공병우는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금일 공병우 사망'이라고 선언하며 결연한 저항 의지를 밝혔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반항을 넘어,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혼을 지키려 했던 그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949

[최초의 실용적 한글 세벌식 타자기 개발]

해방 이후 사재를 털어 한글 기계화 운동에 주력하며, 초성, 중성, 종성을 분리 입력하는 세벌식 글자판을 적용한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이는 한글 정보화 시대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49년, 공병우는 한글의 기계화를 위해 사재를 아낌없이 투자하여 기존 타자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를 개발했다. 이 타자기는 초성, 중성, 종성을 각각의 자판으로 입력하는 세벌식 글자판을 채택하여 한글의 과학적 원리를 기계에 구현한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이는 이후 한글 정보화와 전산화의 기반을 다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글 타자기 출품으로 국회의장상 수상]

전국 과학 전람회에 자신이 개발한 한글 타자기를 출품하여 그 기술력과 가치를 인정받아 국회의장상을 수상했습니다.

1949년 10월, 공병우는 전국 과학 전람회에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한글 타자기를 출품했다. 그의 타자기는 한글의 과학적 배열과 실용성을 높이 평가받아 국회의장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한글 기계화의 중요성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8

[한국 최초 콘택트렌즈 도입 시술]

한국 최초로 콘택트렌즈를 도입하여 시술함으로써 안과 의료 기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시력 교정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1958년, 공병우는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콘택트렌즈를 한국에 최초로 도입하여 환자들에게 시술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의료 기기를 도입한 것을 넘어, 한국 안과 의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시력 교정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로 대통령 표창 수상]

한글 타자기 발명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며 국가적 차원에서 그의 업적이 기려졌습니다.

1958년 10월, 공병우는 한글 타자기 발명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한글 기계화 노력이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님을 의미하며, 그의 업적이 대한민국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1959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되어 1971년 2월까지 한글 발전을 위한 중요한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한글학회는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59년 2월, 공병우는 재단법인 한글학회 이사로 선임되어 1971년 2월까지 약 12년간 한글학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글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60

[박정희 정부의 네벌식 자판 표준화에 맞서 반대 운동 전개]

박정희 정부가 타자기에 네벌식 글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하려 하자, 한글의 과학적 원리를 지키기 위해 세벌식 자판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강력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60년대 말, 박정희 정부는 타자기에 네벌식 글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공병우는 한글의 자소 조합 원리에 가장 적합한 세벌식 자판의 우수성을 역설하며 표준 채택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한글 자판 표준화가 한글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강조하며 치열한 논쟁을 이끌었다.

1962

[건국 공로 식산으로 대통령 표창 수상]

건국 공로 식산 분야에서 그의 기여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며 국가 발전에 대한 그의 헌신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1962년 8월, 공병우는 건국 공로 식산 분야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사회 공헌과 국가 발전을 위한 노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례이다.

1968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 발명]

한글과 영어 모두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하여 문서 작업의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1968년, 공병우는 기계식 한영 겸용 타자기를 발명했다. 이 타자기는 한글과 영어를 하나의 기계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 사무 환경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그의 발명은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한글 정보 기기의 활용도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한글 전용 공로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상 수상]

한글 전용을 위한 그의 지속적인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한글 발전에 대한 기여를 재확인했습니다.

1968년 10월, 공병우는 한글 전용을 위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글을 우리 고유의 문자로서 더욱 널리 보급하고 활용하는 데 기여한 그의 헌신적인 활동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970

[평택군 관내 안과 환자 무료 진료]

평택군 관내 안과 환자들을 위해 한 달간 무료 진료를 실시하며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봉사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1970년 7월, 공병우는 평택군 관내 안과 환자들을 위해 한 달간 무료 진료를 진행했다. 이는 의료 혜택이 부족했던 시기에 많은 이들에게 빛을 찾아준 인도적인 활동으로, 의사로서의 그의 깊은 사회적 책임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71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 개발]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을 보다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여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1971년, 공병우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기계식 한글 점자 타자기를 개발했다. 이 발명은 시각장애인들이 한글 문서를 작성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혁신적인 도구로 작용했으며, 정보 소외 계층을 위한 그의 배려와 기술적 재능을 동시에 보여주는 업적이다.

1974

[한글 문화 개발 공로로 외솔 문화상 수상]

한글 문화 개발에 대한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외솔 문화상을 수상하며 한글학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1974년 3월, 공병우는 한글 문화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외솔 문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한글의 보존과 발전, 그리고 그것을 통한 문화적 가치 창조에 대한 그의 노력이 학계와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1975

[대한 적십자사 70주년 기념 은장 박애장 수상]

대한 적십자사 70주년 기념 은장 박애장을 수상하며 인류애와 봉사 정신을 기리는 활동에 꾸준히 참여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75년 10월, 공병우는 대한 적십자사 70주년 기념 은장 박애장을 수상했다. 이는 그가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78

[여군 한글 타자 기술 향상 기여로 여군단장 감사패 수상]

여군 창설 28주년 기념하여 여군 한글 타자 기술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여군단장 감사패를 수상했습니다.

1978년 9월, 공병우는 여군 창설 제28주년 기념 행사에서 여군들의 한글 타자 기술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군단장 감사패를 수상했다. 이는 군 조직 내에서도 그의 한글 기계화 노력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1979

[모범 납세자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

모범 납세자로서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수상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79년 3월, 공병우는 모범 납세자로서 서울 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성실한 사회생활과 모범적인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한편, 그가 사회에 다방면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적십자 사업 발전 기여로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

적십자 사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수상하며 그의 끊임없는 봉사 정신을 널리 알렸습니다.

1979년 10월, 공병우는 적십자 사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 적십자사 총재 표창을 수상했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 동안 적십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인도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헌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980

[세벌식 글자판 미국 교포 사회에 보급]

미국 교포 사회에 세벌식 글자판의 우수성을 알리고 보급하는 데 힘쓰며 해외 한인들의 한글 사용 편의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0년대, 공병우는 세벌식 글자판의 우수성을 해외로 알리기 위해 미국 교포 사회에 이를 보급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모국어인 한글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한글 세계화에 기여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새마을 저축 증대 기여로 종로구청장 표창]

새마을 저축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종로구청장 표창을 수상하며 지역사회 발전에도 이바지했습니다.

1980년 2월, 공병우는 새마을 저축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종로구청장 표창을 수상했다. 이는 그가 개인의 업적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발전과 공동체 의식 함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평안북도 첫 문화상 수상]

평안북도 도민의 날을 맞아 평안북도 첫 문화상을 수상하며 그의 고향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1980년 5월, 공병우는 평안북도 도민의 날을 기념하여 평안북도 첫 문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뿌리 깊은 애향심과 고향 발전에 대한 기여가 인정받은 것으로, 그의 삶이 개인적인 성공을 넘어 사회적 공헌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1981

[장애자의 날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장애자의 날을 맞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하며 장애인 복지와 사회 통합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국가가 인정했습니다.

1981년 4월, 공병우는 장애자의 날을 기념하여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이는 그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타자기 개발과 같은 활동을 통해 장애인 복지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1983

[컴퓨터 두벌식 자판 표준 채택 비판]

전두환 정부에서 컴퓨터에 두벌식 자판이 표준으로 채택되자, 한글의 창제 원리에 맞지 않는 완성형 코드를 비판하며 세벌식 자판의 과학적 우수성과 조합형 코드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1983년, 전두환 정부에서 컴퓨터에 두벌식 자판이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공병우는 한글의 자소 조합 원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완성형 코드를 비판하고, 한글의 과학적 구조에 더 적합한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코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디지털 시대 한글 전산화의 방향을 놓고 벌어진 중요한 논쟁에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회복지법인 우성원 및 구화학교 공동명의 감사패 수상]

우성원 및 구화 학교 준공에 기여한 공로로 사회복지법인 우성원 및 구화학교 공동명의 감사패를 수상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의 꾸준한 노력을 인정받았습니다.

1983년 7월, 공병우는 사회복지법인 우성원 및 구화학교 준공에 기여한 공로로 공동명의 감사패를 수상했다. 이는 그가 교육 및 복지 시설 건립에도 적극 참여하여 소외된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84

[맹인 개안 및 재활 사업 기여로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공로패 수상]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맹인 선교회에서 맹인 개안 및 맹인 재활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패를 수상하며 그의 헌신적인 봉사가 다시 한번 조명되었습니다.

1984년 10월, 공병우는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맹인 선교회로부터 맹인 개안 및 맹인 재활 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공로패를 받았다. 안과 의사로서 맹인들의 시력을 회복시키고, 그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 데 기여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업적이다.

1987

[한글 기계화 공로로 제1회 서재필 상 수상]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한글 타자기 발명 및 한글 컴퓨터 개발 등 한글 기계화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서재필 상을 수상했습니다.

1987년 1월, 공병우는 서재필 기념재단으로부터 한글 타자기 발명과 한글 컴퓨터 개발 등 한글 기계화에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1회 서재필 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한글 사랑과 과학적 노력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이름으로 기려졌음을 의미한다.

1988

[한글문화원 개설 및 아래아한글 개발 지원]

한글문화원을 개설하고 원장을 지내며 매킨토시를 활용한 직결식 한글 세벌식 글자꼴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강태진, 이찬진 등 젊은 프로그래머들을 지원하여 훗날 아래아한글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88년, 공병우는 한글문화원을 개설하고 원장으로 활동하며 디지털 시대의 한글 과학화에 매진했다. 그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활용하여 직결식 한글 세벌식 글자꼴을 개발했으며, 재야의 젊은 프로그래머 강태진, 정내권, 이찬진, 안대혁 등과 교류하고 지원했다. 이들의 인연은 훗날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하고 국산 워드프로세서 '아래아한글'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는 그의 한글 사랑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이어지는 교두보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KBS '11시에 만납시다' 출연]

KBS 시사 교양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하여 한글 타자기에 바친 그의 삶과 열정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88년 12월 7일, 공병우는 KBS의 시사 교양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했다. 그는 이 방송을 통해 한글 타자기에 헌신한 자신의 삶과 한글 기계화에 대한 신념을 대중에게 직접 전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0

[한글 발전 유공자로 은관문화훈장 수상]

한글 발전에 기여한 유공자로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며 국가로부터 다시 한번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1990년, 공병우는 한글 발전 유공자로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한글 사랑과 한글 기계화, 전산화에 대한 노력이 국가적 차원에서 높이 평가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이다.

[PC통신 통해 세벌식 우수성 홍보 및 자판 무료 배포]

90대 고령에도 불구하고 PC 통신을 통해 세벌식 자판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키보드에 붙이는 세벌식 자판을 무료로 배포하며 마지막까지 한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990년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병우는 PC 통신(하이텔)을 통해 세벌식 자판의 우수성을 알리는 글을 꾸준히 올렸다. 또한 키보드에 부착할 수 있는 세벌식 자판을 무료로 배포하는 등 디지털 환경에서의 한글 사용 편의를 위해 마지막까지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이는 그의 한글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과 시대 변화에 발맞춘 노력을 보여준다.

1995

[서거 및 금관문화훈장 추서, 시신 기증 유언]

노환으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타계 후 한글 기계화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또한 후진들의 의학 교육을 위해 시신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봉사하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1995년 3월 7일, 공병우는 노환으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을 한글과 의학 발전에 헌신했으며, 타계 후에는 한글 기계화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그는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겨 후학들의 의학 교육을 위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며 마지막까지 숭고한 봉사 정신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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