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제 계획, 국가 정책, 경제 발전, 근대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0:24
196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실행된 총 7차례의 경제 발전 계획입니다. 이 계획들은 경공업 육성에서 중화학공업 건설, 첨단 산업 발전으로 이어지며 한국을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시킨 유일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고속 성장과 함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수출 중심 경제를 구축하여 국민소득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근현대 경제사를 대표하는 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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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이승만 정부, 장기경제개발계획 시안 제출]
이승만 정부가 미국에 장기경제개발계획 시안을 제출하며 국가 주도 산업화에 대한 의지를 처음으로 표명했습니다. 이는 이후 경제개발 계획의 밑거름이 되는 초기 구상 단계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956년 장기경제개발계획 시안을 미국에 제출하여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과 경제개발 계획의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현실화될 발전 의지의 초석이었습니다.
1961
[장면내각,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안 최초 작성]
장면내각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미국 전문가 Caharles Jr Wolf. 박사의 도움을 받아 불균형 성장론과 계량적 기법을 도입한 최초의 경제 5개년 계획 시안이 작성되었습니다.
장면내각은 '선민중화 후산업화'를 주장하며 산업화의 추진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Caharles Jr Wolf. 박사가 The Oregon Advisory Group in Korea (1961)를 통해 도움을 주었으며, 각개 전문가가 참여하여 만들어진 5개년 계획 시안은 5.16 이후 건설부 이름 아래 발표됩니다. 이는 불균형성장론 채택과 계량적 기법 도입을 최초로 하여 박정희 정부 노선의 시초가 됩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경제 정책 방향 모색]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는 유원식을 앞세워 독자적인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을 내놓거나 최고회의를 통해 계획을 수정하는 등 경제 정책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는 유원식을 앞세워 독자적인 종합경제재건계획안을 내놓거나 최고회의를 통해 계획을 수정하며 1차산업 증산 및 수출 증대에 따른 외화 조달, 내포적 공업화 노선 채택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 중단 위협 끝에 종합제철소 계획 백지화, 재정안정계획의 복원 등을 하면서 공산품 수출지향 노선으로 회귀하게 됩니다.
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박정희 정부 주도로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적인 경제 개발 계획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1966년까지 경공업을 육성하고 경제 개발의 토대를 다지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1962년 1월 13일,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은 1966년까지 전력·석탄 등 에너지원과 기간산업 확충, 사회간접자본 충실화를 통해 경제 개발의 토대를 형성하고, 많은 노동력을 활용하여 경공업 중심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습니다. 농업생산력 확대, 수출 증대를 통한 국제수지 균형화, 기술 진흥 등도 포함되었습니다.
1964
[수출 1억 달러 달성 및 '수출의 날' 지정]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달성하여 '수출의 날'이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 중이던 1964년에 대한민국은 연간 수출액 1억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11월 30일이 '수출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본격적인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전면에 등장하여 경제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1965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경제개발 자금 확보]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약 6억 달러(무상원조 3억 달러, 차관 3억 달러) 가량의 자금이 대한민국으로 유입되어 경제 개발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통해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원조 3억 달러와 차관 3억 달러, 총 약 6억 달러의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이 자금은 당시 막대한 규모로,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재원이 되었습니다.
1967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
식량 자급화, 산업 고도화, 수출 10억 달러 달성 등을 목표로 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새마을운동'의 시행과 함께 국가의 주요 정책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식량 자급화와 산림 녹화, 화학·철강·기계공업 건설을 통한 산업 고도화, 10억 달러 수출 달성(1970년 목표), 고용 확대, 국민소득 비약적 증대, 과학기술 진흥, 기술 수준 및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총 소요자금 9,800억 원 중 국내자금이 6,029억 원, 외자가 14억 2100만 달러였습니다.
1969
[경인고속도로 준공]
대한민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준공되어 수도권 교통 인프라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전국적인 고속도로망 건설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인 1969년 7월, 대한민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는 수도권의 물류 및 인구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이후 대규모 인프라 건설의 성공적인 선례를 남겼습니다.
1970
[새마을 운동 시작]
농촌 근대화와 지역 균형 발전을 목표로 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농촌의 소득 증대와 환경 개선에 크게 기여하며 국가적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70년 4월, '잘 살아보세'를 구호로 내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농촌의 자조·자립 정신을 고취하고, 주택 개량, 도로 확충, 소득 증대 사업 등을 통해 농촌 생활 환경과 경제 수준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준공]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과 지역 균형 성장의 초석이 된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는 국가 주요 도시를 연결하며 물류 혁명을 가져왔고,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프라가 되었습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 중인 1970년 7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국책 사업은 건설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완공 후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 역할을 하며 물류 비용 절감과 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이 시기 연평균 경제성장률 9.6%를 기록했습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발생]
노동자의 인권과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습니다. 이는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이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사회 각층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노동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72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
대한민국 산업 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하여 안정적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여 산업의 안정적 균형을 이루는 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 시기는 닉슨 쇼크, 제1차 석유파동 등으로 국제 경제 질서가 혼란스러웠으나, 외자도입 급증,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동 건설경기 등을 통해 난국을 극복하고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유지했습니다.
1973
[포항종합제철소 제1고로 준공]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상징인 포항종합제철소 제1고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결과물로, 대한민국의 철강 산업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73년 6월 9일, 경상북도 포항에 대한민국 중화학공업의 핵심 기반 시설인 포항종합제철소 제1고로가 준공되었습니다. 총 1,205억 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건설된 이 제철소는 한국 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철강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74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준공]
울산에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준공되어 대한민국의 중공업 및 조선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974년 6월, 대한민국 울산에 현대중공업 조선소가 준공되었습니다. 이는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산업의 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출 증대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75
[남한 경제, 북한 경제 추월]
대한민국의 경제력이 북한 경제를 완전히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가속화된 남한의 고도 성장과 북한 경제의 한계가 명확해진 결과였습니다.
1975년을 기점으로 남한 경제가 북한 경제를 완전히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지속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추진된 산업화와 수출 증대 정책의 성공적인 결과이자, 남북한 경제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77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
성장과 형평, 능률을 기조로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고 사회 개발을 통해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 혁신과 능률 향상을 목표로 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진행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성장·형평, 능률을 기조로 하여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복잡한 세목들을 통합한 부가가치세가 시행되는 등 경제 체제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부가가치세 시행]
영업세, 물품세, 직물류세 등 복잡한 세목들을 하나로 통합한 부가가치세가 시행되어 세금 제도가 간소화되고 효율성이 높아졌습니다.
1977년 7월 1일부터 영업세·물품세·직물류세·유흥음식세 등 복잡한 세목들을 하나로 통합한 부가가치세가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조세 행정을 효율화하고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수출 100억 달러 및 1인당 국민총생산 1,000달러 동시 달성]
대한민국의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도 1,000달러를 달성하여 경제 규모의 비약적인 성장을 증명했습니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진행 중이던 1977년 12월 말, 대한민국은 연간 수출액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동시에 1인당 국민총생산(GNP) 1,000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가 양적인 성장을 넘어 질적인 도약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1978
[고도 성장 이면의 문제점 발생]
급격한 경제 성장 이면에 물가고, 부동산 투기, 생활필수품 부족 등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의 이면에 물가고와 부동산 투기, 생활필수품 부족, 각종 생산애로 등의 누적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사회적 불안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보여주었습니다.
1979
[제2차 석유파동 발생, 한국 경제에 악영향]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여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세계 경제가 침체하면서 대한민국 경제에도 큰 어려움이 가중되었습니다.
1979년 발생한 제2차 석유파동은 국제 유가 급등과 세계 경기 침체를 야기하며 대한민국 경제를 더욱 어려운 고비로 몰아넣었습니다.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은 에너지 비용 상승과 수출 부진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1980
[정국 혼란과 흉작으로 인한 마이너스 경제 성장]
광주 5.18 민주화운동 등 정국 혼란과 사회적 불안, 그리고 흉작까지 겹치면서 대한민국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1980년에는 광주에서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 등의 정국 혼란과 사회적 불안, 그리고 흉작까지 겹치면서 대한민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겪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1981
1980년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던 대한민국 경제가 1981년에는 다행히 회복세를 보였습니다. 이는 다음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성장'이 아닌 '안정'에 중점을 두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1982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시작]
기존의 '성장' 위주 기조에서 벗어나 '안정, 능률, 균형'을 목표로 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물가 안정과 개방화, 시장 경쟁 활성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은 이때까지 계획의 기조였던 '성장'을 빼고 안정, 능률, 균형을 기조로 하여 물가안정·개방화, 시장 경쟁의 활성화, 지방 및 소외 부문의 개발을 주요 정책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계획은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물가를 획기적으로 안정시킨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을 수 있습니다.
1986
[3저 호황과 경상수지 흑자 전환으로 경제 체질 개선]
유리한 국제 환경인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을 맞아 경상수지 흑자로 전환하고 투자 재원의 자립화를 이루면서 한국 경제의 질적 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가장 큰 성과는 물가를 획기적으로 안정시킨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1986년부터 시작된 '3저 호황'이라는 유리한 국제환경 변화를 맞아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투자 재원이 자립화되어 경제의 질적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한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6년 제10회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으며, 대한민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7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시작]
경제 선진화와 국민 복지 증진을 목표로 한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자율, 경쟁, 개방에 입각한 시장 경제 질서 확립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진행된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은 ‘능률과 형평을 토대로 한 경제 선진화와 국민 복지의 증진’을 기본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흑자 기조 전환에 따른 선진국의 보호주의 압력과 대내적인 소외 부문의 소득 보상 욕구 증대에 대응하기 위해 자율·경쟁·개방에 입각한 시장 경제 질서 확립, 소득 분배 개선, 사회 개발 확대, 고기술 부문 산업 구조 개편을 중점 과제로 삼았습니다.
[경상수지 흑자 97억 달러 달성]
경상수지 흑자액이 97억 달러에 달하며 대한민국 경제의 대외 건전성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는 3저 호황의 영향과 수출 경쟁력 강화의 결과였습니다.
1987년, 대한민국의 경상수지 흑자액이 97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지속적인 수출 증대와 3저 호황이라는 유리한 국제 경제 환경에 힘입어 이루어진 성과로, 대한민국의 경제가 대외적으로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88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 달성 및 서울 하계 올림픽 성공]
경상수지 흑자가 무려 145억 달러(국민총생산의 8%)에 달하는 전례 없는 경제적 성과를 달성했습니다. 같은 해 서울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정점에 달했습니다.
1988년, 대한민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국민총생산(GNP)의 8%에 해당하는 145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와 함께 제24회 서울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습니다.
1992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 시작]
기업 경쟁력 강화, 사회적 형평 제고, 개방·국제화 추진을 목표로 한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21세기 선진 사회 진입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진행된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은 자율과 경쟁에 바탕을 두어 경영혁신·근로정신·시민윤리 확립을 통해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한다는 기본 목표를 가졌습니다. 기업의 경쟁력 강화, 사회적 형평 제고와 균형 발전, 개방·국제화 추진과 통일 기반 조성 등을 3대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연평균 7.5%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기업 소유 집중 분산, 산업 구조 조정, 기술 개발·정보화 도모, 사회간접자본 투자 확충 등이 추진되었습니다.
1994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이 가져온 그림자를 보여주었습니다. 부실 공사와 안전 관리 미흡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며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5
[수출 1,000억 달러 및 국민소득 10,000달러 달성]
대한민국의 연간 수출액이 1,000억 달러를 돌파하고, 1인당 국민소득(GNI)도 10,000달러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계획의 최종 목표에 근접한 주요 성과로 평가됩니다.
1995년에 대한민국은 연간 수출액 1,0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GNI) 10,000달러를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이룩한 놀라운 경제 성장과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발생]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하여 성수대교 사고와 마찬가지로 고도 성장 과정에서 간과된 안전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사회에 각인시켰습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성수대교 붕괴에 이어 또다시 부실 공사와 안전 불감증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 전체에 충격과 경각심을 주었습니다. 이는 경제 성장의 양적 지표 뒤에 가려진 질적 문제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6
[대한민국 OECD 가입]
대한민국이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며 국제 사회에서 경제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1996년,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이룩한 고도 성장의 결실이자,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중요한 사건입니다.
1997
[IMF 외환위기 발생]
아시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대한민국에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여 국가 경제가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계획이 종료된 직후 발생한 최대의 경제 위기였습니다.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마지막 연도인 1997년 11월, 대한민국은 아시아 외환 위기의 여파로 IMF 외환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는 국가 경제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 전례 없는 위기였으며, 그해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8
[경제 개발 계획 공식 폐지]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에 따라 민간 경제활동의 자유 보장과 시장 경제 질서 편입, 재정 안정화를 근거로 경제 개발 계획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사항을 수용하여 민간 경제활동 자유 보장, 시장경제질서 편입, 재정 안정화를 근거로 경제 개발 계획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이후 정부는 재정정책, 공공재 관리 등 꼭 필요한 분야에만 개입하고 다른 부문에서는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경제 정책을 전환했습니다.
2006
2006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이 2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과거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이 가져온 지속적인 성장의 결과로, 국민 복지 향상과 삶의 질 개선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2017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돌파]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이 3만 달러를 돌파하여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는 과거 경제 개발 계획이 이룩한 초고속 성장의 최종 성과 중 하나입니다.
2017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GDP)이 3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는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이룩한 눈부신 성과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이 외국에게 원조를 받던 수원국에서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바뀐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