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붕
정치인, 공직자, 사회운동가, 체육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30- 13:21:35
이승만 정권의 핵심 측근으로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3.15 부정선거를 주도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을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아들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일가족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병약했음에도 강한 권력욕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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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만송 이기붕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다.
1915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입학하였다. 졸업 직후 중국인 교회에 다녔고, 남궁억과 함께 교회 성가대원으로도 활동했다.
1918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였다. 중퇴 후 J.R.무스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하다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923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하였고, 스스로 고학과 노동으로 학비를 조달했으며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 대학교를 졸업을 했다. 졸업 직후 뉴욕으로 건너가서 노동을 하였다.
1931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나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다.
1934
신한민보 기사를 통해 1934년 이기붕의 귀국 사실이 보도되었다. 귀국 후 북촌 일대에서 상점인 가회상회를 개업, 운영했으나 실패했다.
귀국 후 이화여전에서 강사를 하고 있던 박마리아와 재회하여 1934년 12월 15일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일로 장모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아내 박마리아를 통해 어렵게 결혼 승락을 얻어냈다.
1945
1945년 초 일제가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성부 도봉산 도봉으로 은신, 숨어 지내다가 8월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채용되었다. 군정청 통역관 당시 급료를 초콜렛과 캔디로 받았다.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그는 이승만의 첫 사저인 돈암장에서 이승만의 비서직으로 지내게 되는데, 이는 과거 이승만과 인연을 가진 것 덕분이었다.
1946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 조선적십자사 이사를 지내며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48
병원 입원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이승만의 비서실장 직을 내놓았다. 이후 윤보선이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맡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통령비서실 실장이 되었고, 이승만의 비서실장직을 맡게 되었다.
1949
윤보선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다.
1949년 8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선되어 활동했다.
1951
한국전중이던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장관 신성모를 몰아내면서 1951년 5월부터 1952년 3월까지 제3대 국방부 장관을 지내어 국민방위군 사건을 처리하였고,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를 엄격히 처벌하려다 모함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이 듣지 않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 장택상, 전진한, 박용만 등과 정당 창당 작업에 착수, 이범석 등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1952
[대한체육회 회장 및 KOC 위원장]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며 체육계에서 활동했다.
1952년 9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제17대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재임중 제6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53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 세력을 축출하였고, 자유당의 2인자로 부상하였다.
1954
[국회의장 당선 및 사사오입 개헌 주도]
민의원의장에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54년 6월부터 1960년 4월 사망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민의원의장에 당선되었으며, 1954년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가결시키게 만들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1955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56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의 장면에게 패하여 낙선하였다. 이기붕의 권력 장악에 반발한 장택상, 윤치영, 이윤영 등 친여 정치인들이 대통령 후보 없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여당 성향의 표가 분산된 결과였다.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
1957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5대손이고, 그의 아들인 이강석은 효령대군의 17대 손이므로 서로서로 모두 촌수가 맞지 않으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1958
이정재와의 갈등 끝에 선거구를 서대문구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옮긴 그는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의장에도 재선되었다.
순국선열추념회 회장이 되었다.
1959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으나 이기붕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1960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 당선]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는 큰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4.19 혁명과 비극적인 사망]
4.19 혁명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아들 이강석에 의해 부인과 차남과 함께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4월 28일 새벽, 이승만 정권의 몰락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해진 이기붕은 미국으로 도주하려고 했었으나,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이기붕과 일가의 시신은 비서들에 의해 수습되어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 허정 등 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 일부가 참여하고,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 먼저 죽은 딸 이강희의 묘 근처에 이기붕 내외의 묘, 아들 이강욱, 이강석의 묘가 그 아래, 먼저 죽은 이강희의 묘소 옆에 조성되었다.
1962
1962년 3월 30일을 기하여 일가(10촌 동생)인 전직 제일은행 은행장 이기호의 차남 이강복을 사후양자로 입양, 서울 종로구 구청에 입양수속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