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
정치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4:33
-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으로 활동하며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제헌 국회 부의장 및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했습니다.- 국민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야권 지도자로 활약했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유세 중 서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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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해공 신익희는 1892년 7월 11일(음력 6월 9일)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社村)의 소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입니다. 좌의정 문희공 신개의 후손으로, 자헌대부(정2품) 장례원경(정2품)을 지낸 신단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으나 유복한 환경 덕분에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1905
[소학교 입학 및 신학문 수학]
형 신규희의 추천으로 광주 남한산성 소학교에 입학하며 신학문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에 진학하여 영어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1905년, 형 신규희의 추천으로 광주 남한산성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한글을 깨우쳐 국문교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1908년 9월에는 경성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학과로 진학했으며, 조카 신정균과 함께 경성에서 하숙하며 가정교사 활동으로 용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영어학과 동창 이희승은 신익희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으로 인기가 높았다고 회고했습니다.
1910
[한성외국어학교 졸업 및 일본 유학]
한성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이승희와 약혼했으며, 1911년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동경으로 떠났습니다.
1910년 한성 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둘째 형 신규희의 주선으로 참판을 지낸 이명재의 딸 이승희와 약혼하고, 1911년 결혼했습니다. 해영 이승희에게서는 딸 신정완과 아들 신하균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곧 해화 김순이라는 첩을 들이게 됩니다. 1911년 9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배워야 한다는 일념에서 신혼의 단꿈을 떨치고 일본 도쿄 유학을 결행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 고등수험과에 입학했습니다.
1913
[와세다 대학 입학]
와세다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4월 고등 예과에 입학했으며, 동경제국대학을 제치고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을 지닌 와세다대학을 선택했습니다.
1913년 3월, 와세다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당시 그는 진학할 대학을 놓고 동경제국대학·게이오기주쿠 대학·와세다 대학 등을 두고 고심하다가, 일제의 관리가 될 마음이 없었으므로 동경제국대학을 제치고 경응대학보다는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특권의식이나 우월의식이 적은 학풍을 지닌 와세다대학을 선택했습니다. 1913년 4월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여 총무·평의회장·회장 등 임원을 맡았고,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며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이 시기 장덕수를 만나 학업보다는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활동에 주력했습니다.
1915
[와세다 대학 졸업 및 교육 계몽 활동]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 귀국하여 보성법률상업학교와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 계몽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5월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17년 7월 귀국할 때는 일본 당국이 금서로 정한 《숙상신주광복지연의》란 책을 트렁크에 숨겨 왔습니다. 귀국 직전부터 보성전문의 교수로 출강한 그는, 1917년 귀국 이후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보성전문에서는 법학 교수와 재무학 교수로 학생들에게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을 가르쳤으며, 어려운 단어를 쉽게 풀이하는 명강의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19
[3·1 만세운동 참여 및 상하이 망명]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하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1918년 최린, 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을 논의했습니다. 1919년에는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봉기할 것을 협의했으며, 상해방면의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상해로 파견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자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자, 보성전문학교 법학, 재무학 교수 및 중동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일경의 체포를 피해 상주 복장을 하고 경성에 도착한 뒤, 배편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 상하이 시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9호에 설립된 독립임시사무소를 찾아가 활동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참여 및 핵심 요인 활동]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 및 임정 법무부 차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19년 3월 19일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신익희는 독립임시사무소에서 활동하다 4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과 함께 상해 불란서조계 보창로의 허름한 집을 임시사무소로 정하고 모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해 4월 임시의정원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 초안 작성에 참여하여 가결, 채택하게 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임정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원비서실장, 문교부장, 의정원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김구, 이동녕,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고수파에 가담했습니다.
1923
[중국 국민당군 육군 중장 위촉]
난징으로 건너가 중국 국민당군 육군 대장 호경익 장군을 찾아가 한중합작 투쟁을 논의했으며, 1927년에는 중국 국민군 중장에 위촉되어 남경정부심계원 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1923년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유학 시절 만난 중국 국민당군 육군 대장 호경익 장군을 찾아갔습니다. 호경익과의 면담 중 한중합작 투쟁이 명분과 승산이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1927년 중국 정부요청으로 국민군 중장에 위촉받고 남경정부심계원 고문으로 위촉받아 활동하며 임시정부 재정에 도움을 주고 한중합작전선(韓中合作戰線)을 도모했습니다. 이때 왕해공(王海公)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습니다. 호경익 장군의 급사 후 후임자의 아편 장사 제안에 반발하여 중장직을 사퇴하고 상하이로 돌아왔습니다. 1932년 이후 영어 강사 또는 아편 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습니다.
1933
[민족유일당 운동 참여]
김규식, 김원봉 등과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고,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는 등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1932년 이후 신익희는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로 일본 영사관의 상하이 방문이 잦아지자 분장 후 가족들을 은신시키고 상하이를 떠나 중국 각지로 유랑했습니다. 1933년에는 김규식, 김원봉 등과 같이 대일전선 통일 동맹을 결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했으며, 1934년 이승만, 조소앙 등과 함께 임정의 외교위원에 선출되었습니다. 민족유일당 운동 때 대한독립단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유일당 창립에 합의,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민혁당이 분열되자 1937년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민족투쟁동맹을 조직했으며, 같은 해 7월 한국광복진선 결성에도 참여했습니다.
1945
[임시정부 경위대 조직 및 광복 후 귀국 교섭]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으며, 8월 15일 광복 소식을 접하고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절차 교섭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1940년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3년 9월 한국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국무위원에 피선되었습니다. 1944년 4월 내각 개편 때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다시 선출되었고, 1945년 2월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경위대를 조직했습니다. 8월 10일 쓰촨성 충칭에서 일본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8월 15일 조국의 광복 소식을 접했습니다. 임시정부 요원의 귀국 절차를 중국정부와 주중미군당국과 교섭하는 대표로 위촉받아 주중 미군사령부에 찾아가 교섭했습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참전국으로 인정되지 않아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습니다.
[광복 후 귀국 및 국내 정치 활동 시작]
광복 후 임시정부 제2진으로 군산 비행장을 통해 귀국하여 국내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정치공작대를 조직하고 반탁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광복 후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체신부장에 선임되기도 했으나, 귀국 후 취임을 거절했습니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제2진으로 전라북도 군산 비행장으로 입국, 귀국한 후, 미군 지프차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하여 약간씩 거리를 두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석했으며, 12월 23일 김구가 주관하는 순국선열추념대회에 참여하여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2월 말 김구, 김성수 등의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반탁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2월 31일 임정 내무부장 자격으로 국자 제1호, 제2호 포고문을 발표했습니다.
1946
[국민대학 설립 및 초대 학장 취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등을 지냈고,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았습니다.
1946년 2월 말 신익희는 조중서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염동진의 백의사와 연계하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념식에서 폭탄투척계획을 세웠으나, 3월 1일 폭탄 투척이 실패로 돌아가고 신임장이 발각되었습니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등을 지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맡으며 민족학과목을 강의했습니다. 또한 행정연구반을 구성하여 건국 후 시행할 행정자료를 수집했으며, 제8대 대한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회장에 추대되었습니다. 1946년 6월 23일 한국독립당 중앙당에 미소공위에 참가할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국독립당을 탈당했습니다.
[미군정 쿠데타 계획 좌절]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측근들의 제보로 무산되고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에게 경고를 받았습니다.
신익희는 1946년 8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중경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쿠데타적인 형태로 추진했으며, 특별정치부대를 동원하여 8월 29일 국치일에 정부 건물을 접수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계획은 8월 21일, 8월 22일에 장덕수, 윤치영 등이 미군 CIC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신익희는 새 정부가 세워질 때 주요 지위를 약속하고 부유층으로부터 많은 돈을 거둬들인 혐의를 받았으며, 이승만과 김구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고 반대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습니다. 존 하지는 그에게 다시 한번 일을 벌이면 사살할 수 있다고 경고를 주고 되돌려보냈습니다.
1947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 및 이승만 지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이 되었고,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여 이승만을 지지하며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로 활동했습니다.
1946년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되고 1947년 의장이 되었습니다. 1947년 7월 이후 임시정부 측과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이탈,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로 가서 부총재가 되었습니다. 임정 요인들 중 남북협상을 추진하자 신익희는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으며, 조소앙을 찾아가 마음을 돌릴 것을 설득하기도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또한 1947년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8
[제헌 국회의원 당선 및 초대 국회의장 선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제헌 국회 초대 부의장이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8년 제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단독정부 수립론과 남북협상론이 나타나자 그는 협상의 불가함을 들어 이승만을 지지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초대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며 국회의장직이 공석이 되자 8월 4일 열린 국회의장 보궐선거에서 새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1일 제8대 대한축구협회장에 추대되었고, 11월 13일 친이승만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했습니다.
1949
[민주국민당 창당 참여]
이승만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주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에 취임했습니다. 같은 날 대한축구협회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신익희는 이승만이 하와이와 상하이 시절의 생각으로 국가를 경영한다며 이승만과의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이후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한민당과 통합,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최고위원에 취임했습니다. 같은 날 대한축구협회장직을 사퇴했습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헌 국회에 이어 2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50
[한국전쟁 발발과 피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열차편으로 남하했으며, 전쟁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950년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에서 2차 투표 끝에 국회의장에 당선되어 제2대 국회의장으로 재선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열차편으로 남하하였습니다. 1951년 해영 이승희가 사망하자 첩이었던 해화 김순이를 본처로 격상시켜 호적에 올렸습니다. 1952년 7월 10일 새로 선출된 제2대 후반기 민의원의장단에 선출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953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 의혹]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으나, 조소앙과의 밀회 의혹인 '뉴델리 밀회 조작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1953년 5월 김동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가 귀국했을 때 인도에서 조소앙과 만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민주국민당 소속 함상훈의 성명서에 의해 공개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폭탄적인 성명에 대해 민주국민당은 적극적으로 부정했으며, 내무장관 백한성은 함상훈을 불러 의혹을 제보한 사람을 추궁했으나 함상훈은 구체적인 이름을 대지 못했습니다. 1954년 3월 함상훈에 의해 다시 영세중립화 의혹이 제기됐지만 증거를 제출하지 못해 사건은 종결되었고, 결국 함상훈은 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병옥은 계속 신익희를 의심했습니다.
1954
[호헌동지회 결성 참여]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정부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여 야권 신당 창당을 위한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1954년 3월 국민대학 학장직을 박이순에게 넘겼습니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자유당에서 소위 사사오입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키자 이에 분노하고 1954년 11월 30일 야권 신당 창당을 위한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했습니다. 이때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가입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신익희는 조봉암의 참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논란이 거세지자 한 발 물러나 있었습니다. 1955년 11월 민국당과 기타 야권 세력의 통합을 통해 민주당이 창당되자 민주당의 구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56
[제3대 대통령 후보 유세 중 서거]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전국 순회 유세를 다니던 중,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서거했습니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신익희는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습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조봉암도 진보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해 야권 후보가 두 명이 되자, 선거 운동 전부터 단일화 협상에 돌입했으며, 4월 25일 조봉암과 후보 단일화 비밀회동을 가졌습니다. 단일화 합의가 발표되기도 전인 1956년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출혈을 겪었습니다.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의사를 찾았지만 의사는 없었고,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했지만 끝내 서거했습니다. 신익희의 운구가 5월 5일 오후 4시 서울역에 도착하자 운집한 군중들이 그의 유해를 경무대 쪽으로 끌고 가려 하면서 경찰과 충돌하여 1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700여 명이 피검되었습니다. 1956년 6월 서울 수유동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 정치 부문 인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신익희는 죽은 뒤 1개월이 경과한 1956년 6월에 서울특별시 수유동에 안장되었습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훗날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