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군인, 정치인, 중앙정보부장,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암살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2:22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제9대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을 일으켜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암살 동기와 행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까지도 논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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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 선발]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으나, 해방을 맞아 소위 임관을 앞두고 무산되었습니다.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았으나, 해방을 맞아 소위 임관을 앞두고 무산되었습니다.
1946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졸업했으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 책임으로 면직되어 잠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습니다.
1952
육군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1954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습니다.
1956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습니다.
1957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후 복귀 및 호남비료 사장]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하며 호남비료 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이후 군사정권 치하에서 호남비료 사장을 역임했습니다.
1963
육군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1964
[6.3 사태 계엄군 지휘 및 박정희 신임]
6.3 사태 당시 6사단장으로서 서울의 계엄을 책임지며 계엄군을 지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얻었으며, 김종필 제거에 앞장서고 계엄령 하 경찰업무에 군 동원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6.3 항쟁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자 6사단은 서울의 계엄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6사단장은 김종필 제거에 앞장서고 계엄령하의 경찰업무에 군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는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됩니다.
1966
육군 제6관구사령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968
육군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여 1971년 9월 23일까지 재임했습니다.
1970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71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73
유신정우회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에 입문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 차장 직책에 취임하였으며 1973년 9월 6일까지 재임했습니다.
중앙정보부 차장 재직 중이던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습니다.
1974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중동진출 과정에 기여를 하며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1976년 12월 5일까지 재임했습니다.
1975
[최태민 비리 보고]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 최태민의 사기횡령 및 여자들과의 추문 등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며 반문하여 놀랐다고 합니다.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사이비목사 최태민이 자칭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기횡령 등은 물론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며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며 반문해서 김 전부장이 놀랬다고 합니다.
1976
[중앙정보부장 취임 및 의원직 사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빈번한 소요사태와 긴급조치령 남발 속에서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까지 재임했습니다.
1979
[박정희 생일 선물용 시계 제작 지시]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 선물용으로 스위스 파텍필립사에 1만 9000달러 상당의 회중시계 제작을 지시하며 중앙정보부 예산을 유용했습니다. 이는 중앙정보부장의 개인 비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8월 하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생일 선물용 시계를 제작하기로 하고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의 김모 행정비서관을 통해 주제네바대표부 N서기관에게 「일요일 오전 10시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는 KAL기 편으로 긴급문서를 보내니, 기장으로부터 직접 문서를 수령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습니다. N서기관은 파텍 필립사나 피아제사에 회중시계를 주문하되, 11월 중순까지 서울에 도착해야 하며 18K로 제작하고 도안은 나중에 보내겠다는 내용을 전달받았습니다. 중앙정보부 본부는 반드시 파텍 필립사에서 제작할 것을 지시하며 회중시계 덮개에 봉황 문양 대통령 문장, 박정희 반신상 사진, 뒷면에 '근축 탄신 1979' 등의 도안을 보냈습니다. 파텍 필립은 1만 9000달러의 제작 비용을 청구했고, 이 송장은 10월 26일 오전에 한국으로 발송되었습니다.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이 발생하며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박정희 암살로 이어지는 여러 정국 불안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이 발생하며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 지시]
9월 말 이전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살해를 지시했습니다. 이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 위원회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9월 말 이전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가 2005년 5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의해 발표되었습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은 중앙정보부 연수생 2명을 적임자로 선정하여 제3국인 2명에게 살인 청부를 했고, 이들은 10월 7일 김형욱을 납치 살해했습니다. 이후 이상열은 증거 인멸 후 귀국을 지시했고, 귀국한 연수생 A는 10월 13일경 김재규에게 결과를 보고받고 정책연구실로 발령받으며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받아 살해에 가담한 B와 나눠 갖도록 했습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 제명]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이 발생하며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은 '박정희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영삼은 YH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과 정면 대결을 선포하는 기자 회견에서 "박정희씨의 하야를 강력히 요구한다"라 발표하였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파리 근교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납치하여 권총으로 살해했습니다.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 휘하 중앙정보부 연수생들과 제3국인들이 승용차로 김형욱을 납치해 파리 근교로 끌고 가 권총으로 살해한 뒤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놓고 현장을 빠져나왔습니다.
[부마사태 발생]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부마사태가 발생하며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마사태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이 발생하며 유신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10.26 사태)]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하며 10.26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계획적인 혁명 거사임을 주장했습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및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연회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권총으로 시해, 10.26 사태를 일으키고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는 1심 최후변론에서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하며 계획적인 혁명 거사임을 강조했습니다.
1980
육군 고등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후 시신이 바뀌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친동생 김항규 씨는 시신을 확인한 결과 형이 틀림없었고 목에는 교수형 밧줄 자국이 선명했다고 밝혔습니다.
2005
[국정원, 김재규의 김형욱 살해 지시 발표]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김재규가 1979년 9월 말 이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했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1979년 9월 말 이전,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거점장이었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를 지시하였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19
[국방부, 김재규 사진 재게시 허용]
국방부는 부대관리훈령 개정을 통해 육군 3군단과 6사단의 역대 지휘관 명단에 김재규의 사진과 이름을 40여년 만에 다시 게시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국방부 부대관리훈령 개정을 마무리하여 육군 3군단과 6사단의 역대 지휘관으로 사진이 게시되며, 부대의 역대 지휘관 명단에도 40여년 만에 다시 올라갑니다.
2024
[10.26 사건 재심 심리 예정]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김재규의 여동생이 청구한 10.26 사건 재심 여부에 대한 심리가 4년 만에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김재규씨 여동생의 10.26 사건 재심 청구를 4년만에 심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