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한민국 전 대통령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3- 16:35:13
박근혜 전 대통령의 생애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영광과 비극을 동시에 압축한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두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는 개인적 비극을 겪었고,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승화시켜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올랐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비선 실세와의 불투명한 관계와 폐쇄적인 리더십은 결국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그녀의 삶은 개인의 비극이 어떻게 정치적 서사가 되고, 그 서사에 가려진 구조적 문제가 국가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1952
[출생과 유년기]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며, 이는 훗날 그녀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친이 1961년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이후, 그녀의 유년기는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라는 특수하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훗날 그녀의 정치, 충성심, 그리고 공적 삶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 데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서울 장충초등학교, 성심여자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74
[모친 육영수 여사 피살]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이 부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쏜 총탄에 모친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22세의 박근혜는 학업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해야 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비극적인 전환점이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도중,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발포했다.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빗나간 총탄이 연설을 듣고 있던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했다.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일 오후 7시경 사망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22세의 박근혜는 이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그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국가적 비극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역할 대행]
모친의 서거 이후, 22세의 나이로 5년간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며 공식적인 공적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부친의 공식 행사에 동행하고 외국 고위 인사들을 접견하며 정치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이는 그녀가 공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공석이 된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22세의 박근혜가 대신하게 되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5년간 그녀는 부친 박정희 대통령의 공식 행사에 동행하고 외국 고위 인사들을 접견하는 등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행했다. 이 시기는 그녀가 국내외 정치의 중심부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첫 무대였으나, 동시에 평범한 삶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75
[최태민과의 첫 만남]
1975년 3월, 종교인이었던 최태민이 '육영수 여사의 영혼과 소통할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것을 계기로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근혜는 최태민을 정신적 멘토로 의지하게 되었고, 이 관계는 시작부터 각종 이권 개입 논란을 낳았다.
이 만남은 훗날 국정농단 사태의 뿌리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모친의 비극적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박근혜에게, 복잡한 이력을 가진 종교인 최태민이 접근했다. 그는 "꿈에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내 딸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위로 편지를 보냈고, 이에 마음이 움직인 박근혜는 1975년 3월경 그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최태민은 박근혜의 정신적 멘토이자 최측근으로 자리 잡았고, '구국선교단'(이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설립하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이 관계는 시작부터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를 포함한 정보기관들은 최태민이 박근혜와의 관계를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거액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최태민을 심문하기도 했으나, 박근혜가 눈물로 그의 결백을 주장하며 완강히 비호하자 결국 문제 삼지 못했다. 모친의 피살이라는 개인적 비극이 낳은 심리적 취약성이 최태민에게 접근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소수의 사적 관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라는 구도는 훗날 그녀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어져 국정농단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979
[부친 박정희 대통령 피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부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다.
이 사건으로 18년간의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으며, 박근혜는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는 비극을 겪었다.
사건 9일 뒤,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은 막을 내렸다. 훗날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의 비위를 박 대통령이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호하는 박근혜를 감쌌던 것을 거사의 한 원인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잃은 박근혜와 두 동생은 사건 9일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1982
[육영재단 운영과 남매간 갈등]
청와대를 나온 뒤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사회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최태민 일가가 재단 운영에 개입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동생들과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결국 1990년, 박근혜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온 뒤 육영재단 이사장, 영남대학교 이사장 등을 맡으며 사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이 재단 운영에 깊이 개입하여 전횡을 일삼는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재단 직원들의 시위로 이어졌다.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90년 8월, 동생인 박근령과 박지만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 목사에게서 저희 언니를 구출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는 최씨 일가와의 관계가 단순한 정치적 공세를 넘어 심각한 가족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박근혜는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90
1997
1997년 12월 10일, 18년간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4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부친에 대한 향수를 가진 보수층의 지지가 그녀의 정치적 재기 기반이 되었다.
1997년 12월 10일, 박근혜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인 1998년 4월 2일,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원내에 진입했다. 부친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보수층, 특히 영남 지역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그녀의 정치적 재기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002
[탈당 및 방북]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의 갈등으로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그녀가 독자적인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 2월, 박근혜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의 노선 갈등을 이유로 탈당을 선언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후 2002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전격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단독 면담을 가졌다. 이 파격적인 행보는 그녀가 기존 정당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선을 앞둔 2002년 11월, 그녀는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04
['천막당사' 시절]
2004년 3월,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당사를 여의도 공터의 천막으로 옮기는 승부수를 통해 당의 쇄신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 덕분에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괴멸을 면했고,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으로 부상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수수 사건(일명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대한 거센 역풍으로 제17대 총선에서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다. 3월 23일 당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는 쇄신의 상징으로 기존의 호화로운 당사를 떠나 3월 24일부터 여의도 공터에 천막을 치고 당무를 시작했다. 6월 16일까지 이어진 '천막당사'는 국민에게 반성과 속죄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정치적 승부수였다. 이 덕분에 한나라당은 예상을 깨고 121석을 확보하며 괴멸을 면했고,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보수 진영의 확실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2006
[커터칼 피습 사건]
2006년 5월 20일, 지방선거 지원 유세 중 괴한에게 커터칼로 얼굴을 피습당하는 테러를 당했다.
병원으로 이송되면서도 선거 상황을 묻는 모습이 알려지며 강인한 지도자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이 사건은 동정 여론을 일으켜 당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6년 5월 20일, 서울 신촌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중, 지충호라는 남성이 휘두른 커터칼에 오른쪽 뺨에 11cm 길이의 자상을 입는 테러를 당했다. 병원으로 이송되는 와중에도 "대전은요?"라며 선거 상황을 묻는 모습이 알려지면서, 국가에 헌신하는 강인하고 의연한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2007
[17대 대선 경선 패배]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치열하게 경쟁했으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경선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의 약점을 겨냥한 네거티브 공방을 벌였다.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는 연설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은 박근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간의 치열한 양자 대결로 전개되었다. 경선 과정에서 양측은 BBK 의혹, 최태민 일가 문제 등 서로의 약점을 겨냥한 네거티브 공방을 벌였다.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발표된 최종 결과, 박근혜는 당원 투표에서는 승리했으나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뒤져 총 득표율 48.1%를 기록, 49.6%를 얻은 이명박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이명박 후보 지지를 선언하는 연설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2
[제18대 대통령 당선]
2012년 12월 19일, '경제민주화'와 '국민대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부녀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당선은 보수층을 강력하게 결집시킨 결과였다.
5년 전 경선 패배 이후 당내에서 입지를 다져온 박근혜는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맞붙어 51.6%의 득표율로 승리하며,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부녀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성공은 '천막당사'와 '피습 사건' 등을 통해 구축된 희생과 강인함의 서사가 보수층을 강력하게 결집시킨 결과였으나, 이 강력한 리더십은 동시에 내부 비판을 억제하고 최순실과 같은 비선 실세의 존재를 용인하는 토양이 되었다.
2013
[대통령 취임]
2013년 2월 25일, '희망의 새 시대'를 국정 비전으로 제시하며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국민적 기대와 지지 속에 국정을 시작했다.
취임식에서 국민의 꿈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2013년 2월 25일, 박근혜는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민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하며 제18대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서 국민적 기대와 지지 속에 국정을 시작했다.
2014
[세월호 참사]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
정부의 무능하고 혼란스러운 대응과 특히 참사 당일 '7시간의 행적' 논란은 국정 운영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탑승객 304명(대부분 안산 단원고 학생)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정부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모습을 보이며 국민적 공분을 샀다. 특히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이 7시간 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라진 7시간' 논란은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신뢰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주었다. 2014년 5월 19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지만 , 이미 싸늘해진 민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부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2016
['최순실 게이트' 점화]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입수하여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수정하는 등 국정에 깊이 개입한 물증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국정농단 사태가 본격화되며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정치 스캔들로 비화되었다.
종합편성채널 JTBC는 최순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태블릿 PC를 입수, 그 안에 대통령의 공식 연설문, 외교·안보 관련 기밀 문서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최순실이 이를 사전에 받아보고 수정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이 보도는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이 되어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거대한 정치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싹튼 '비정상적인 청와대'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이 이 보도를 통해 폭발한 것이다.
[1차 대국민 담화]
JTBC 보도 다음 날인 2016년 10월 25일, 최순실과의 관계를 일부 시인하며 사과했다.
하지만 국정 전반에 걸친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명 없이 일부 문제로 축소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담화는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으며 오히려 국민적 분노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JTBC 보도 하루 만에 청와대 춘추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며 연설문 등에서 일부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시인하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국정 전반에 걸친 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명 없이 일부 문제로 축소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여,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으며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촛불집회 시작]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첫 촛불집회가 서울 도심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이어지며 참여 인원이 100만 명을 넘어서는 등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 시위로 발전했다.
촛불집회는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보여주며 정치권을 압박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첫 주말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매주 토요일마다 계속되었고, 참여 인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00만 명 이상이 운집하는 등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적 저항 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촛불집회는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며 정치권을 압박하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다.
[2차 및 3차 대국민 담화]
2016년 11월 4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추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2차 담화에서는 검찰 수용 의사를 밝혔고, 3차 담화에서는 자신의 거취를 국회에 맡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탄핵을 피하기 위한 시간 끌기라는 비판을 받으며 정국 수습에 실패했다.
11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은 두 번째 대국민 담화를 통해 검찰 조사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11월 29일 3차 담화에서는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탄핵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해석되었으나, 야권은 이를 '정치적 꼼수'로 규정하고 거부하면서 탄핵 절차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이 찬성 234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다.
이로 인해 대통령 직무가 즉시 정지되었으며,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여당 내에서도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온 결과였다.
2016년 12월 9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표결에 부쳤다.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2표, 무효 7표로 가결되었다.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상당수의 이탈표가 나온 압도적인 결과였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후 7시 3분을 기해 모든 직무가 정지되었고,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2017
[헌법재판소 탄핵 인용]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라고 판시했다.
이로써 박근혜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이 되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헌법재판소는 약 3개월간의 심리 끝에, 2017년 3월 10일 재판관 8명 전원일치로 탄핵 인용을 결정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판시하며 파면을 선고했다. 이 결정으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즉시 파면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구속 수감]
대통령 파면으로 불소추 특권을 잃은 후, 2017년 3월 31일 뇌물수수,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법원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고, 그녀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로써 전직 대통령으로서 세 번째로 구속되는 사례가 되었다.
탄핵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면책특권을 상실한 박근혜는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뇌물수수, 직권남용,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 등 13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법원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고, 2017년 3월 31일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2021
[재판 및 형 확정]
국정농단, 국가정보원 특활비 수수, 공천 개입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의 재판을 거쳤다.
2018년부터 이어진 재판은 최종적으로 2021년 1월 14일 대법원에서 국정농단 및 뇌물 혐의로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이와 별도로 공천 개입 혐의로 확정된 징역 2년을 더해 최종적으로 총 22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은 여러 사건이 병합되고 분리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국정농단 및 뇌물 혐의 사건은 2018년 4월 6일 1심에서 징역 24년, 벌금 180억 원이 선고되었고 ,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친 끝에 2021년 1월 14일 대법원에서 징역 20년, 벌금 180억 원, 추징금 35억 원이 최종 확정되었다. 이와 별도로 새누리당 공천 개입 혐의로 2018년 11월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총 2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특별사면 및 석방]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특별사면 결정으로 석방되었다.
국민 통합과 건강 악화 등이 사면 이유로 고려되었으며, 이로써 4년 9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석방 후에도 건강 문제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2021년 12월 24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국민 통합과 박 전 대통령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박근혜는 2021년 12월 31일 0시를 기해 공식적으로 석방되었다. 총 4년 9개월(1,737일)간의 수감 생활이었다. 석방 후에도 건강 문제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2022
[대구 사저 입주]
병원에서 퇴원한 후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마련된 사저에 입주했다.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소회를 밝히며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사면 이후 첫 공개적인 거처 이동이었다.
2022년 3월 24일, 박근혜는 서울삼성병원에서 퇴원하여 자신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였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에 위치한 사저로 거처를 옮겼다.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과 취재진을 향해 "지난 5년은 제게 참 힘든 시간이었다"며 "어려울 때마다 저의 정치적 고향이자 마음의 고향인 달성으로 돌아갈 날을 생각하며 견뎌냈다"는 소회를 밝혔다.
2024
[회고록 출간]
《박근혜 회고록: 어둠을 지나 미래로》를 출간했다.
회고록을 통해 대통령 재임 시절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과 탄핵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사면 이후 자신의 목소리로 내놓은 가장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2024년 2월 5일, 총 2권으로 구성된 회고록 《어둠을 지나 미래로》를 출간했다. 회고록에서 그녀는 한일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등 주요 정책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탄핵 사태에 대해서는 최순실을 '가까운 이의 일탈'로 표현하며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인 사건의 본질은 정치적 공세와 왜곡된 프레임에 의한 것이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 회고록은 사면 이후 자신의 목소리로 내놓은 가장 구체적이고 공식적인 입장 표명으로, 몰락의 원인을 자신의 판단 착오가 아닌 외부의 '배신'과 '음모'에서 찾는 기존의 인식이 여전함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