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군인, 정치인, 정무직공무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2:39
차지철은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5.16 군사정변 가담 후 정계에 입문하여 3선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1974년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며 월권 논란을 빚었습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사망하며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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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출생 및 군인 경력 시작]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으며,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1934년 11월 6일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유아기는 파주에서, 이후 서울에서 성장했습니다. 1953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육군사관학교 낙방 후 1954년 7월 20일 갑종장교 포병 간부후보생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하며 군인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보·포병 병과를 학습하고 미국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하는 등 군사 전문성을 키웠습니다.
1959
[공수특전단 배속 및 레인저 스쿨 수료]
육군 공수특전단에 배속되어 특수 훈련을 받았고, 이듬해 미국 레인저스쿨을 수료하며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습니다.
1959년 육군 공수특전단에 배속되었고, 1960년에는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을 수료하며 특수전 역량을 길렀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 가담]
공수특전단 예하 중대장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며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격동기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공수특전단 예하 중대장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축을 구성한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여, 쿠데타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 및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 차장을 지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경력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62
[육군 소령 진급 및 중령 전역]
5.16 군사정변 가담 이후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고, 두 달 뒤 중령으로 특진 후 전역하여 민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62년 3월 20일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1962년 5월 31일에는 육군 중령으로 특진했습니다. 이후 1962년 8월 21일 육군 중령으로 전역하며 군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963
[국회의원 당선 및 정계 입문]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해, 박정희 대통령 당선과 함께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공식적으로 입문했습니다.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후 1966년과 1970년에 한양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계속해서 공화당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며 국회 외무국방위원장까지 지냈습니다.
1966
33세 시절이던 1966년 송희성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10.26 사태 후 언론 보도를 보면 차지철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어머니 김대안과 아내 윤보영 등이 기절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희성과 이혼하고 윤보영과 재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91년 7월 11일 보도를 보면 전 부인 송희성이 중앙일보를 상대로 2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1967
[제7대 국회의원 재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서 71.43%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1967년 실시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56,683표를 얻어 71.43%의 득표율로 1위로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1971
[제8대 국회의원 3선]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57.79%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1971년 실시된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54,021표를 얻어 57.79%의 득표율로 1위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1972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후보 낙선]
10월 유신 선포 후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아쉽게도 낙선하며 국회에서의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차지철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후보에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국회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1973
[제9대 국회의원 4선]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여주군·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4선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3년 실시된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여주군·광주군·이천군 지역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53,586표를 얻어 35.70%의 득표율로 1위로 당선되며 4선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4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 취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박종규 경호실장이 물러난 후,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영부인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자진 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각종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샀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76
[신민당 각목 사건 사주]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공격하기 위해 조직폭력배 김태촌을 사주하여 일명 '신민당 각목 사건'을 일으키는 등 권한을 남용했습니다.
1976년에 이철승을 매수하여 신민당을 어용야당화 시키려는 공작을 했으나 신민당 총재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이 선출되자, 이철승과 함께 조직폭력배 서방파 두목인 김태촌을 시켜 김영삼을 기습했습니다. 이 사건은 '신민당 각목 사건'으로 불리며 그의 권력 남용과 정치 개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습니다.
1979
[10.26 사건으로 사망]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사망하며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충격을 안긴 10.26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충격을 안긴 '10.26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