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 (1925년)
정치인, 교육자, 국회의원, 국회의장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31:05
대한민국의 교육자이자 정치인으로, 9선 국회의원과 3차례 국회의장을 지냈다. 조병옥 총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등 주요 정당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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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에서 정치인이자 대지주였던 아버지 박노익과 어머니 칠원 윤씨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5
대구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4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9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5
민주당 총수 조병옥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0
[제5대 총선 당선, 첫 국회의원 활동 시작]
2전 3기 끝에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 생활을 시작했으며, 김영삼과 함께 민주당 구파 소장파로 활동했다.
민주당의 공천으로 고향 달성군에서 두 차례 낙선한 후, 2전 3기 끝에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제5대 국회에서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소장파로 활동했다.
1963
[민주공화당 입당 및 재선 국회의원 당선]
5.16 군사정변 이후 엄민영의 추천으로 민주공화당에 영입되어 서울 성동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엄민영의 추천으로 민주공화당에 영입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을로 지역구를 옮긴 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재선에 성공했다.
1964
미국 아이비 리그 브라운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7
[제7대 국회의원 당선, 3선 의원 고지 등극]
서울 성동구 을에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연속해서 당선되며 3선 국회의원 고지에 올랐다.
서울 성동구 을로 지역구를 옮긴 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속해서 당선되면서 3선의 고지에 올랐다.
1971
[달성군·고령군 재보궐선거 당선, 4선 의원]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그해 12월 달성군·고령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국회로 복귀, 4선 의원이 되었다.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설된 성동구 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신민당의 정운갑에 패해 낙선했다. 하지만 그해 12월에 치러진 달성군·고령군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로 돌아왔다.
1973
달성군·경산군·고령군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5선 국회의원에 올랐다.
1978
달성군·경산군·고령군 선거구에서 다시 당선되며 6선 국회의원 고지를 달성했다.
1979
민주공화당 의장에 취임하여 11월 14일까지 직책을 수행했다.
[민주공화당 총재권한대행 역임]
박정희 전 총재 서거 후 10월 26일부터 11월 12일까지 민주공화당 총재권한대행을 맡았다.
박정희 총재 서거 후 10월 26일부터 11월 12일까지 민주공화당 총재권한대행을 맡았다.
1988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역임 및 7선 국회의원 당선]
12·12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 있었으나,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대표위원이 되었고, 대구 동구에서 당선되며 7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에서는 3김과 함께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여서 출마하지 못했으나, 제13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정의당에 영입되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대구 동구에서 당선되며 7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2월 8일부터 1989년 12월 29일까지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1990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취임]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1992년 5월 29일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제1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에 취임하여 1992년 5월 29일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1992
대구 동구 을에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8선 의원 고지에 올랐다.
[제14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유임 및 사임]
14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직에 유임되었으나, 문민정부의 재산공개 파동 당시 민자당 지도부의 사퇴 종용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의장직을 사임했다.
제14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장직에 유임되나 문민정부의 재산공개 파동 당시 민자당 지도부로부터 국회의원직 사퇴를 종용받았으나 반발하여 탈당하고 의장직은 사임하였다.
1995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겼다.
1996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9선 의원 달성 (다선 기록)]
대구 중구 선거구에서 제15대 총선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9선 국회의원이라는 다선의 기록을 달성했다.
제15대 총선에서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9선을 달성했다. 박준규의 9선 국회의원 기록은 김영삼, 김종필과 함께 다선의 기록이다.
1998
15대 국회에서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으면서 국회의장 3선 고지에 올랐다.
2000
15대 국회가 종료된 이후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2014
노환으로 인해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