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정치인, 군인, 정보기관장, 외교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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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로,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군사정보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국방부 79부대 창설을 주도했고, 박정희의 최측근으로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 특히 1972년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성사시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이끌어내는 등 남북관계에 큰 획을 그었지만, 김대중 납치 사건에 연루되며 권력의 정점에서 경질되었다. 이후에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며, '떡고물론' 발언으로 대중에게 회자되는 등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의 삶은 현대 한국 정치사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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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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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이후락 출생]

이후락이 경상남도 울산에서 이석승과 서내안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은 회야강변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후락은 1924년 2월 23일 일제 시대 경상남도 울산 회야강변에 위치한 생가에서 이석승과 서내안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3

[일본 육군 복무 시작]

이후락은 일본의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하여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며 일본 육군에서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첫 군 복무 경험이었습니다.

1943년에 일본의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하여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일본 육군에서 복무하였으며, 1944년 12월에 육군 오장(하사)으로 전역하고 귀국하였다.

1944

[일본 육군 전역 및 귀국]

일본 육군 오장(하사)으로 전역한 이후락은 고향으로 귀국했습니다. 일본에서의 군 복무를 마친 시점이었습니다.

1943년에 일본의 항공기정비학교에 입교하여 하사관 과정을 이수하고 일본 육군에서 복무하였으며, 1944년 12월에 육군 오장(하사)으로 전역하고 귀국하였다.

1945

[군사영어학교 입교]

전역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새로운 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향후 그의 한국군 복무의 기반이 됩니다.

1945년 12월 5일, 이미 전역한 후여서 입학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였고 1946년 3월 23일에 졸업하며 대위로 임관하였다.

1946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 대위 임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며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임관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일본군 대위 출신이라고 주장하여 미군 측에서도 그를 대위로 임관시켰다는 김정렬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초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이는 한국군 내 그의 입지를 다지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46년 3월 23일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며 대위로 임관하였다. 김정렬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은 자신이 맨날 일본군 대위 출신이라고 우겼다고 한다. 그런데 미군에서는 제 아무리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버젓이 알고도 그를 순전히 국방경비대 대위로까지 임관시켰다고 증언했다.

1947

[육군 소령 진급]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육군에 참여하고, 만 23세의 나이에 소령으로 진급하는 등 군 내부에서 빠른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이후락은 1947년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대위로 육군에 참여하였고 만 23세에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1949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취임]

여순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된 박정희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에 임명됩니다. 이는 그의 정보 분야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8년 만 24세의 나이로 육군본부에 보임되었는데 1년 후인 1949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었던 박정희가 여순 사태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그 후임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1950

[한국 전쟁 참전 및 정보 활동]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전시 상황에서 그의 정보 능력이 국가 안보에 기여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지낸 김종평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락은 주로 HID 업무를 총괄했다.

1951

[육군 대령 진급 및 정보국 차장 역임]

한국 전쟁 중 대령으로 진급하며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는 주로 HID(북파공작원) 업무를 총괄하며 정보 분야에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에 종사하였다.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지낸 김종평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락은 주로 HID 업무를 총괄했다. 이후 미국으로 가서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7

[미국 유학 후 귀국]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없던 탓에 바로 보직을 받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해 2월 주 미국 대사관 부무관으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1957년 10월 2일에 귀국하였으나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그는 바로 보직을 받지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곧 국방부 79부대장이 되며 군에 복귀하였다.

1958

[국방부 79부대 창설 및 부대장 취임]

미국 CIA의 제의로 국방부 내에 제79부대라는 특수 정보기관을 조직하고 부대장을 맡았습니다. 이 기관은 훗날 중앙정보부의 모태가 되는 핵심적인 정보 조직으로, 그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명명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1958년 이후락은 국방부 내에 제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 79호실, 그러니 결국 그 당시의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특수부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였고,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재흥, 김정렬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국방부 중앙정보부로 국방부의 지휘를 받았다. 김정렬 장관은 이 부대의 부대장으로 이후락을 앉혔고 이후락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 수여]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대미 관계 및 군사적 기여를 인정받은 국제적인 영예였습니다.

1958년 1월 14일에는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리전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받았다.

[타이완 방문]

연합참모부 사령관 유재흥을 수행하여 타이완을 방문했습니다. 이는 그의 외교적 활동의 초기 단계 중 하나였습니다.

그해 8월 30일에는 연합참모부 사령관 유재흥을 수행하여 중화민국 타이완을 방문하였다.

1960

[국방부 중앙정보부 해체 및 정보담당관 활동]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면서 국방부 정보담당관 직위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는 그의 정보기관 재편과정에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시점이었습니다.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자 국방부 정보담당관의 직위로 활동하였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 임명]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조직되자 연구실장이 되었습니다. 미국 CIA의 권유로 장면 총리가 설립한 이 기관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며 정보 분야의 영향력을 이어갔습니다.

1960년 11월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조직되자 연구실장이 되었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국무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 미국 CIA는 1961년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이 기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밀었다.

1961

[육군 소장 예편 및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 취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는 그의 군 경력 마무리와 함께 새로운 정보기관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60년 11월 이후락은 국무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육군 소장이었지만 그를 데려가려면 예편시키고 데려가라는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의 건의로 1961년 1월 예편과 동시에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이 되어 1961년 3월까지 재직했다. 동시에 그는 국무총리 안보 담당 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 퇴임]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 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시기 이후락은 주한 미국 대사관에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1961년 3월 28일 이기호를 행정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하게 한다. 한편 이후락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에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락은 박정희 주변에 끊임없이 밀정을 심어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5.16 군사 정변과 체포, 구제]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자, 이후락은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이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재춘, 김종필 등의 도움으로 구제되어 군사 정부의 홍보를 담당하게 됩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벌어지자 이후락은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이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 겸 대한공론사 이사장 직을 겸임하며 《Korea Republic》지를 개편 발행하여 재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 정부의 홍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임명]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되고 군사 정부 대변인을 겸직하며 박정희 정권의 핵심 측근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5.16 군사 정변 초기에 이후락은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1961년 7월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되고 군사 정부 대변인을 겸직하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대한공론사 이사장직을 맡은 뒤 처음에는 정변 주체 세력의 장교들에게 깍듯이 '님'자를 붙이며 존대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1963

[민정 이양과 육군 소장 재예편]

민정 이양과 동시에 육군 소장으로 재예편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김종필 등과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패했습니다.

1963년 1월 민정 이양과 동시에 다시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필 등과 함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 임명]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제3대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12월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비서실장 재임 시절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같이 국민들에게 많은 원성을 받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았다.

1969

[대통령비서실장 해임]

3선 개헌이 확정된 지 3일 후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여당인 공화당이 그의 월권과 의정 활동 간섭을 이유로 해임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형욱과 달리 그는 곧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으며 박정희의 신임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습니다.

3선 개헌이 국민투표로 확정된 3일 후인 1969년 10월 20일 비서실장에서 해임되었으며, 이때 김형욱도 같이 해임되었다. 해임은 여당인 공화당이 3선 개헌의 전제조건으로 월권과 지나친 의정 활동 간섭을 일삼았던 이후락과 김형욱의 해임을 요구하였고 이를 박정희가 수용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6년간 박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을 당한 것에 대해 김형욱은 강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러나 이후락은 박정희의 신봉자답게 정반대로 처신하였다. 그 때문인지 김형욱이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낸 반면에 이후락은 곧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았다.

1970

[주 일본 대사 발령]

대통령비서실장에서 해임된 이후,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아 외교 무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계속 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때문인지 김형욱이 한동안 무직 상태로 지낸 반면에 이후락은 곧 주 일본 대사로 발령받았다. 주 일본 대사 임기 기간은 1970년 1월부터 1970년 12월까지이다.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다시 불러들여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막강한 정보 권력을 다시 손에 넣으며 박정희 정권의 핵심 실세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불러들여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였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자 이후락은 2인자로 발돋움했다.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총지휘]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도전을 위한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지휘권을 맡았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고, 이후락은 정권의 2인자로 급부상했습니다.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는 이후락을 다시 불러들여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였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자 이후락은 2인자로 발돋움했다.

1972

[박정희 지시로 평양 비밀 방문]

박정희 대통령의 극비 지시를 받아 청산가리를 품에 숨기고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습니다. 이는 남북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부터 박정희의 지시로 북한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된 후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로 1972년 5월 2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후락은 방북 당시 급박한 상황이 펼쳐질 경우 자살용으로 사용하려고 청산가리를 양복 호주머니에 숨긴 상태로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판문점에 도착하기 전 그는 어금니 가운데 임플란트가 하나 있었는데, 이 임플란트에도 일부 청산가리를 숨겼다. 그는 청산가리를 손에 쥔 상태에서 상황이 좋지 않게 되면 마실 계획도 세워 놓고 있었다.

[김일성과의 사상 초유 남북 비밀회담]

김일성과의 사상 초유의 남북 비밀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밀담은 강대국에 대한 공통적인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 간 합의를 통해 통일을 이루자는 논의를 담아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습니다.

1972년 5월 4일 새벽, 김일성과의 사상 초유의 남북 비밀회담을 가졌다. 이 날의 밀담은 남북 양측이 강대국에 대한 공통적인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 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자고 협의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북한 측의 남북회담 답방]

이후락의 방북에 대한 답방으로 북한 측 대표단의 방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남북 간 대화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복귀 후 5월 29일에는 북한 측의 답방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 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하기도 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남북 양측의 합의에 따라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후락은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남북 협상을 주관하며 역사적인 남북 대화의 중심에 섰습니다.

복귀 후 5월 29일에는 북한 측의 답방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 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하기도 했다.

[10월 유신 선포]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락의 권력 행보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1973

[윤필용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경질 위기]

윤필용 사건으로 인해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경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73년 4월에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3년간 맡아 온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경질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므로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내부 고발로 박정희의 귀에 들어가면서 파문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 사건 주도]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하며 과잉 충성을 보였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미국 외교 문서와 국가정보원 조사를 통해 그의 지시로 밝혀져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되어 조급해진 이후락은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하며 과잉 충성을 하였다. 이런 사실은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2007년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조사에서도 최소한 박정희의 묵시적 승인 하에 그가 지시한 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장 경질]

김대중 납치 사건과 윤필용 사건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후임으로는 신직수가 내정되었습니다.

1973년 12월 3일, 이후락은 결국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후임으로는 법무부 장관이었던 신직수가 내정되었다. 그가 경질된 표면적인 이유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문책성 인사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윤필용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의 3선을 성공시켰고, 청산가리를 몸에 지닌 채 목숨을 걸고 극비리에 방북하여 남북 대화의 물꼬를 텄으며 유신체제를 안착시킨 일등공신이었지만 이 모든 게 소용이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경질 후 극비 출국]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된 직후 극비리에 출국했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망명 사례가 있던 터라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고, 그의 잠적은 여러 루머를 낳았습니다.

경질된 직후 12월 18일에 극비리에 출국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 불과 8개월전인 같은 해 4월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의 소재 파악을 위해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대만과 홍콩을 거쳐 런던으로 이동한 것을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만 공항에서 이종찬과 마주침]

출국 후 중간 경유지인 대만 공항에서 옛 부하 직원 이종찬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이후 이종찬을 따돌리고 바하마로 이동하여 잠적했습니다.

이후락은 출국 후 이동 중에 중간 경유지인 대만의 공항에서 우연히 옛 부하 직원이었던 이종찬과 마주쳤으나 그에게 입단속을 시킨 후 홍콩으로 함께 이동하여 그곳에서 4일간 머무르다가 이종찬을 따돌렸다. 그 후 미국에 있던 사위와 의논한 후 런던을 경유하여 바하마로 이동한 뒤에 잠적했다.

1974

[잠적 70일 만에 귀국]

바하마에 은거하며 박정희 정권과 '귀국 후 신변 보장'에 대한 협상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잠적 70일 만에 귀국했습니다. 그의 잠적 기간 동안 망명설 등 여러 루머가 무성했습니다.

그 후 미국에 있던 사위와 의논한 후 런던을 경유하여 바하마로 이동한 뒤에 잠적했다. 바하마에 은거하던 중에 박정희 정권과 '귀국 후 신변 보장'에 대한 협상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잠적 70일 만인 74년 2월 말에 귀국하였다. 이후락은 출국 전에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일체 주변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잠적 기간 동안 국민들 사이에서는 망명설 등 여러 가지로 해괴한 루머가 떠돌았다. 이 때문에 외무부가 심장병 치료 차 영국에 머물고 있다는 거짓 해명을 내놓기도 하였다.

1978

[제10대 국회의원 당선]

4년간의 은둔 생활을 마감하고 제10대 총선에서 울산, 울주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화려한 정치 복귀를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귀국 후에는 주로 자택에서 칩거하거나 불교도로서의 신앙생활,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만들기 등을 하면서 외부인과 접촉을 끊고 지냈다. 이런 은둔 생활을 4년간 이어가다가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울산,울주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무소속 원내교섭단체인 민정회 회장으로 재임하다가 공화당에 입당하였으나 의정 활동은 그리 신통치 못했다.

1979

[신군부 등장 후 두 번째 해외 잠적]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신군부가 등장하자, 방콕에서 열린 세계 불교 대회 참석 차 출국했다가 다시 종적을 감췄습니다. 이는 12·12 사태와 공화당의 정풍 운동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피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되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가 등장한 뒤, 이후락은 1979년 12월 10일 방콕에서 열린 세계 불교 대회에 참석 차 출국했다가 다시 한 번 종적을 감췄다. 출국 후 국내에서는 12·12 사태가 있었고 공화당에서는 정풍(整風)운동이 벌어졌다. 정풍운동을 주도한 박찬종 등 소장파 의원들은 이후락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하여 공격하였다.

1980

[공화당에서 제명]

정풍 운동의 여파와 김종필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공화당에서 제명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무튼 정풍운동의 여파, 그리고 김종필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이후락은 끝내 공화당에서 제명당했다.

[95일 만의 귀국과 '떡고물론' 발언]

두 번째 잠적 95일 만에 귀국하여 자택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며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는 '떡고물론' 발언을 남겨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발언은 권력형 부정축재 논란에 대한 그의 답변이었습니다.

이후락의 잠적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종 소문이 무성하였으나 출국 95일 만인 1980년 3월 14일에 귀국했다. 귀국 당일 자택에서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아세우는 공화당 내 분위기를 의식한 이후락은 "떡을 만지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 며 반박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한동안 '떡고물론'이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정치자금 만지다 보면 이런말 저런 말 들었지만, 떡고물을 안흘리고 떡을 만들 수 있나.

[부정축재액 194억 원 발표]

당시 계엄당국은 그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하고, 그의 진술에 의한 집계액만으로 194억 원을 치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됩니다.

1980년 6월 당시 계엄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이후락 자신의 진술에 의한 집계액만으로도 194억 원을 치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전두환 장군이 압수한 그의 울주군 언양읍, 삼남면, 상북면의 토지들은 그의 둘째 아들 이동훈이 다시 돈을 주고 매입하였다고 한다.

1982

[울산장학회 조직 및 장학 사업 추진]

울산장학회를 조직하고 장학 사업을 추진하며 사회 활동에 나섰습니다. 이는 그의 후반기 삶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활동 중 하나입니다.

1982년에는 울산장학회를 조직하고 장학 사업을 추진하였다.

1985

[정치 활동 규제 해제 후 은둔 생활 지속]

정치 활동 규제에서 해제되었으나,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계속 은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외부 출입을 자제하며 과거사에 대한 증언 요구를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1985년 정치 활동 규제에서 해제되었으나 정계에 복귀하지 않고 계속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출범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자택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대한민국 제3공화국, 10월 유신 시대에 대한 증언 및 진술 요구를 대부분 거절, 회피하였다.

2009

[이후락 사망]

향년 85세로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으며,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습니다.

2009년 10월 31일, 향년 85세로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한 후 그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유족으로는 이동훈 전 제일화재(現 한화손해보험) 회장 등 슬하 6남 1녀를 두었다. 자녀들은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이며 3,000만~5,000만 달러에 이르는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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