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규 (1930년)
군인, 정치인, 체육행정가, 교육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2:43
대한민국 최장기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처럼 사격을 즐겼으며, 대한체육회장 및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내는 등 체육 행정가로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경남대학교를 설립하고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육영수 저격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박종규 (1930년)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1930
[일본 교토에서 출생]
일본 교토에서 재일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이자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성장했습니다.
1930년 5월 28일, 일본 제국 교토의 재일 조선인 거류민 집안에서, 대한제국 경상남도 마산이 고향인 아버지와 밀양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이자 셋째로 출생했습니다. 1932년 일본에서 귀국 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듬해 1933년 다시 일본 교토로 건너가 성장했습니다. 1942년 부모님과 누나, 두 누이동생이 먼저 귀국했으나, 박종규와 그의 형은 일본 도쿄에서 학업을 마치겠다는 명목으로 일본에 남았습니다.
1945
[일본 육군 하사 임관 및 귀국]
일본 도쿄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하고 일본 제국 육군 하사로 임관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있다가 1945년 9월 22일에 형과 함께 귀국했습니다.
1945년 3월 29일, 일본 도쿄 육군항공학교를 수료하며 일본 제국 육군 하사로 임관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바로 귀국하지 않다가, 1945년 9월 22일 새벽에 형과 함께 일본 도쿄를 떠나 통영의 충무항으로 귀국했습니다.
1947
[국방경비대 입대 및 박정희와의 인연]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육군 부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이후 육군종합행정학교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하며, 이때 박정희 소령 밑에서 부하 장교로 근무하게 됩니다.
1947년 8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육군 부사관(국방경비대 하사관)으로 복무했습니다. 복무 중 육군종합행정학교 제5기로 입교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 미군정 국방부인 통위부 시절 박정희 소령 밑에서 부하 장교로 근무하며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61
[5·16 군사정변 핵심 관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서 5·16 군사정변에 깊이 관여하며 박정희의 측근으로 부상했습니다. 이후 1963년 12월 24일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습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서 5·16 군사정변에 깊이 관여하며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 뒤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1963년 12월 24일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습니다.
1964
[대한민국 최장기 대통령 경호실장 부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초대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부임하여, 1974년까지 10년 3개월간 재직하며 대한민국 최장기 경호실장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이듬해인 1964년 5월 17일,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부임하여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10년 3개월 동안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1974
[육영수 저격 사건 책임지고 경호실장 사퇴]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가 피살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경호실장직에서 자진 사퇴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하여 영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에게 피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박종규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 경호실장직에서 자진 사퇴했으며, 이는 그가 누리던 절대적인 권력의 상실을 의미했습니다.
1978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 및 국회의원 당선]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를 주도하며 체육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고, 제10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에 당선되어 정계에서도 다시 활약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 경남대학교 전신인 삼양학원 이사장에 취임하고 1971년 마산대학교를 인수하여 경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계에서도 활약했습니다. 1970년 대한사격연맹 총재와 아시아사격연맹 총재를 지냈으며,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유치를 앞장서 주도했습니다. 같은 해 마산·진해·창원 지역구에서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1979
[대한체육회 회장 취임 및 국제 스포츠 활동]
제25대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올림픽 유치에 힘썼습니다. 또한 국제사격연합회 부회장으로도 취임하며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1979년 2월 15일, 제25대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어 올림픽 유치에 힘을 쏟았습니다. 같은 해 국제사격연합회 부회장으로까지 취임하며 국제 스포츠계에서도 그의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1980
[경남대학교 이사장 사퇴 및 정계 은퇴]
학생들의 반발로 경남대학교 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며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1980년 3월 26일, 학생들의 반발로 자신이 세운 학교인 경남대학교 재단 이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동생 박재규가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같은 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김종필, 이후락 등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계엄사령부 발표에 따르면 그의 부정축재액은 77억 3,342만원이었습니다.
1984
[IOC 위원 선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다시 한번 국제 스포츠계의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198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1985
1년 뒤인 1985년 12월 3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간암으로 사망하며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마무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