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동 (희극인)

희극인, 코미디언, 배우,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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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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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이기동은 1970년대 '땅딸이' 별명으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독특한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신군부의 연예인 정화운동과 삼청교육대 연루 후유증으로 52세에 사망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사업가로서도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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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이기동 출생]

대한민국 희극 배우 이기동이 1935년 6월 8일에 태어났다.

대한민국에서 희극 배우 이기동이 태어났다. 그는 훗날 '땅딸이'라는 별명으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대중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1961

[코미디언 활동 시작]

이기동이 군 장교 전역 후 1961년부터 코미디언 활동을 시작하며 공연 무대에 올랐다.

군 장교로 전역한 이기동은 당대 최고 코미디언이었던 구봉서를 찾아가 활동을 부탁했고, 1961년부터 공연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코미디언으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70

['땅딸이' 이기동, 최고의 인기 구가]

1970년대 이기동은 '땅딸이'라는 별명으로 이대성과 콤비를 이뤄 최고의 인기를 얻으며 안방 극장을 장악했다.

이기동은 1970년대에 '땅딸이'라는 친근한 별명을 얻으며 희극인 이대성과 성공적인 콤비를 이뤘다.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눈알을 빙빙 돌리거나 경례할 때 손을 반동 주는 독특한 연기로 인기를 끌었으며, 미녀 코미디언 권귀옥과도 호흡을 맞추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다.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등의 유행어를 히트시켰다.

1974

[앨범 '망각' 발매]

1974년에 이기동은 앨범 '망각'을 발매하며 가수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 코미디언 이기동은 앨범 '망각'을 발표하며 희극 배우 활동 외에 가수로서의 면모도 선보였다.

1980

[신군부 정화운동과 삼청교육대 연루]

1980년대 신군부의 연예인 정화운동으로 TV 출연이 금지되자 사업을 시작했으며,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이라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1980년대 신군부가 집권하며 연예인 정화운동을 벌여 이기동의 TV 출연이 금지되었다. 이에 이기동은 기동산업을 설립하고 '기동사', '땅딸이 요쿠르트' 등을 생산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다. 하지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이라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일각에서는 이 경험이 그의 사망 원인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1987

[급성 질환으로 입원]

1987년 3월 28일, 밤업소 출연을 마친 후 귀가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1987년 3월 28일 새벽, 밤업소 출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이기동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는 그가 겪었던 간경화와 당뇨 합병증의 악화와 관련이 깊었다.

[희극인 이기동 사망]

1987년 4월 1일, 병원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간경화와 당뇨 합병증으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했던 이기동은 끝내 병세가 회복되지 못하고 1987년 4월 1일, 간경화와 당뇨 합병증으로 향년 5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대중에게 안타까움을 안겼다.

1993

[삼청교육대 고문 후유증 사망설 제기]

1993년 8월, 동료 희극 배우 배삼룡의 증언을 인용해 시사뉴스 잡지에서 이기동이 1980년대 삼청교육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1993년 8월, 시사뉴스(구 시사정경)는 '삼청교육이 이기동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기사를 통해 동료 희극 배우 배삼룡의 증언을 보도했다. 배삼룡은 이기동이 1980년대 삼청교육대에서 겪은 고초와 정신적 충격이 술로 이어지고 결국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표면적인 이유였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이라는 명목은 허울 좋은 핑계였으며, 실제로는 이기동이 김종필 지지자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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