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식민 통치 기관, 일본 제국 정부 기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50:49
일본 제국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한 최고 직속 기관입니다. 통감부를 전신으로 출범, 총독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며 식민 통치를 주도했습니다. 지방 행정 개편 등 한반도 전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공식 소멸했으며, 청사는 해방 이후 철거되어 역사적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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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1905년(광무 8년) 대한제국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이후 조선총독부의 설립 기반이 되었습니다.
1906
1906년 12월 21일, 일본의 고위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에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한반도 통치에 대한 일본의 실질적인 개입을 시작했습니다.
1907
1907년에 남산 왜성대에 위치했던 통감부 청사가 이후 설립될 조선총독부의 청사로 전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물리적인 변화였습니다.
1908
1908년 용산에 총독 관저가 건립되어, 총독의 주거 및 업무 공간으로 별도로 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반도 내 일본 최고 통치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시설이었습니다.
1909
1909년 6월 14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이임은 이후 한국 통치 체제의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909년 6월 15일, 소네 아라스케가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제2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통제력 강화 정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10
1910년 5월 30일, 제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통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 체제 전환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곧이어 한일 병합 조약을 추진하고 초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이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한반도에 대한 식민 통치를 공식화했습니다. 이 조약은 이후 조선총독부 설립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출범 및 초대 총독 취임]
일본 제국이 한반도 통치를 위한 직속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출범시키고,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으로 취임했습니다.
1910년 10월 1일, 일본 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공식 출범시켰습니다. 이전 통감이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하며 총독부 체제의 막을 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지방 행정 조직 개편 시작]
조선총독부가 조선 13도의 관찰사를 도 장관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등 지방 행정 조직 개편을 시작했습니다.
1910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 대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지방 행정 조직을 개편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 조선 13도의 관찰사 명칭을 도 장관으로 변경하는 등 근대식 행정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1912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지방 행정 개편에 따라 '도 장관'의 명칭이 '도지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식 행정 체계를 한반도에 더욱 확고히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1913
1913년 12월 29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가 공포되었습니다. 이 법령은 이후 한반도 지방 행정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1914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지방 행정 조직 개편]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통해 지방 행정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는 훗날 대한민국의 행정 체계 기본골격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근거로 지방 행정 조직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이 개편은 대한민국의 행정 체계 기본골격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1916
1916년 10월 14일,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초기 식민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16년 10월 14일, 하세가와 요시미치 육군대장이 제2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는 3·1 운동이 발생하며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이 거세졌습니다.
1919
1919년 8월 12일, 3·1 운동 발생 이후 제2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총독직에서 이임했습니다. 그의 이임은 일본의 식민 통치 방식이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되는 시점과 맞물립니다.
[사이토 마코토 제3대 총독 취임]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으며, 무관 총독 임용제를 형식적으로 폐지하는 시기였습니다.
1919년 8월 13일, 사이토 마코토 해군대장이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취임은 형식적으로 무관 총독 임용제를 폐지하고 문화 통치를 표방하는 시기와 겹쳤으나, 실제로는 문관 총독은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부 조직 개정]
조선총독부의 내부 조직이 개정되어 '계'가 '과'로 변경되고 지사관방, 제1부, 제2부, 제3부 등으로 재편되었습니다.
1919년 8월 20일, 조선총독부의 내부 조직이 개정되었습니다. '계' 명칭이 '과'로 변경되고, 장관관방이 지사관방으로 개정되었으며, 제1부, 제2부, 제3부 등 새로운 부서 체계가 도입되어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1926
1926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의 흥례문 구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웅장한 새 청사를 신축했습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의 상징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며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건축물로 남았습니다.
1927
1927년 4월 15일,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장이 임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잠시 동안 총독부의 행정을 담당했습니다.
1927년 10월 1일, 임시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임시 재임은 다음 총독의 취임을 위한 과도기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1927년 12월 10일, 제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문화 통치 시대를 이끌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통치 방식을 조정했습니다.
1927년 12월 10일,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장이 제4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1929
1929년 8월 17일, 제4대 조선총독 야마나시 한조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29년 8월 17일, 사이토 마코토가 제5대 조선총독으로 재차 부임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재임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통치 정책이 복합적인 양상을 띠던 시기였습니다.
1931
1931년 6월 17일, 제5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이임과 함께 일본은 점차 군국주의적 색채를 강화하며 통치 기조를 변화시켰습니다.
1931년 6월 17일,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장이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립니다.
1932
1932년 12월, 박영효가 일본 귀족원 의원에 칙임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제국이 제한적이나마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 시작한 초기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1936
1936년 8월 5일,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이임은 일본이 중일 전쟁 발발을 앞두고 한반도 통치 기조를 더욱 강경하게 전환하는 시기와 일치합니다.
1936년 8월 5일, 미나미 지로 육군대장이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며 한반도에 대한 전시 총동원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1937
1937년 경복궁 북쪽에 경무대 총독 관저가 새로 신축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총독의 생활 및 공식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해방 후 대통령 집무실인 청와대의 모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40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태평양 전쟁 시기 한국인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 제국 정부에 조선인의 참정권 부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점차 심화되는 전쟁 상황 속에서 한국인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1941
1941년, 윤덕영과 박중양이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정되었으나, 박중양은 당시 이를 사양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인 중 일부에게 참정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었습니다.
1942
1942년 5월 29일,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이임은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의 한반도 통치 정책이 더욱 전시 체제로 전환되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1942년 5월 29일, 고이소 구니아키 육군대장이 제8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 조선총독으로 재임하며 일본의 패전이 임박한 시기까지 한반도 식민 통치를 이어갔습니다.
1943
1943년, 이진호가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인의 참정권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1944
1944년 7월 21일, 제8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가 총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이후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며 전시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1944년 7월 21일, 아베 노부유키 육군대장이 제9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으로, 일본의 패전과 함께 총독부 체제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945
1945년 1월, 조선총독부의 거듭된 요구 끝에 일본 의회에서 '중의원 선거법 개정' 및 '귀족원령 개정' 법률이 통과되어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 한국인의 협력을 얻으려는 일본의 시도였으나, 제한적인 성격을 띠었고 일본 패전으로 실질적인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1945년 4월 3일, 박중양이 두 번째로 일본 귀족원 의원직에 임명되었고, 이번에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는 앞서 1941년에 제안된 의원직을 사양했던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1945년 4월 3일,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으로서 김명준, 박상준, 박중양, 송종헌, 윤치호, 이진용, 한상룡 등 한반도 출신 7명이 선임되어 임시 의회에 참가했습니다. 이는 직전 통과된 참정권 부여 법률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1945년 8월, 일본 제국의 패전으로 인해 한국인에게 중의원 참정권을 부여하려던 계획이 전면 백지화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선거에 의해 23명의 중의원을 선출할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일본 제국 패전 및 조선총독부 통치 종료]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식적으로 패전하며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통치 기간이 종료되었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식적으로 패전하면서, 1910년부터 이어져 온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식민 통치 시대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한반도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9월 3일, 일본 제국 패전 직후, 조선총독부는 38도선 이남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미군정에게 인계했습니다. 이는 해방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할되는 과정의 시작이었습니다.
1945년 9월 28일, 일본 제국의 한반도 식민 통치 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소멸되었습니다. 이로써 35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총독부의 역사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1995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대한민국 정부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고 부재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보존되었습니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청사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었습니다. 이 건물의 철거는 일제 잔재 청산의 상징적인 행위로 평가받았으며, 건물 부재는 독립기념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