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전투

전투, 독립운동,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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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0월,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대규모 전투. 김좌진, 홍범도 등 주요 독립군 지휘관들의 뛰어난 전술과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으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며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위업을 남겼다. 이 승리는 한인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으나, 이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 등 비극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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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북로군정서 결성 및 독립군 양성]

서일과 김좌진 등을 주축으로 북로군정서가 만주에 조직되어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양성소를 운영하며 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19년 8월, 서일, 김좌진, 이장녕, 김규식, 최해, 정훈, 이범석 등이 만주 북만주 일대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왕청현 서대파구에 본부를 두고 자체 사관양성소를 운영하며 이범석 등 소수 교관들에 의해 병력을 양성했습니다. 이는 만주 독립군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습니다.

1920

[봉오동 전투 대승]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1920년 6월 7일, 대한군북로독군부의 홍범도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종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으며, 일본이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할 명분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노두구 일본 영사관 습격]

봉오동 전투 승리 후, 홍범도 장군의 소부대가 노두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 다수의 부상자를 내며 일본의 만주 대규모 출병 명분 조작을 부추겼습니다.

1920년 7월 11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대한군북로독군부의 홍범도 장군은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노두구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습니다.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의 교전에서 승리하며 일본 측에 다수의 부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본격적으로 출병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독립군 초토계획' 수립]

일본은 만주의 독립군을 섬멸하기 위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하고, 국제 문제화를 피하기 위해 '훈춘 사건' 조작을 계획하는 등 대규모 병력 투입을 준비했습니다.

1920년 8월, 일본은 독립군이 한반도 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식민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는 대규모 병력을 꾸려 만주의 독립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으며, 국제 문제화를 피하기 위해 '훈춘 사건' 조작까지 준비했습니다.

[북로군정서 백두산 방면 이동]

북로군정서는 사관양성소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거행한 후, 중국군과의 약속에 따라 야음을 틈타 백두산 산록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1920년 9월 9일, 서일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사관양성소의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치른 후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중국군과의 약속 때문에 주로 산길로 이동하며 약 한 달 후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습니다.

[중국군-독립군 비밀 협상 및 기지 이동]

일본군에 비협조적인 중국군 보병단장 맹부덕과 독립군 사이에 비밀 협상이 진행되어, 독립군은 일본군 토벌에 앞서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8월 초, 일본군에 비협조적인 중국 보병단장 맹부덕은 한국인 독립군과 비밀 협상을 벌여 독립군의 무장해제 대신 조용히 움직여 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 만주의 독립군들은 기존 기지를 버리고 험준한 백두산 산록으로 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로군정서 청산리 도착]

북로군정서 부대가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후, 10월 초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여 이도구의 홍범도 부대와 연합했습니다.

1920년 10월 초, 북로군정서군은 연길현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후 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습니다. 청산리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공동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일본의 '훈춘 사건' 조작]

일본군이 마적 장강호를 매수해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 이를 조선인 독립군의 소행으로 꾸며 만주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1920년 10월 2일 새벽 4시경, 일본군은 마적 두목 장강호를 매수하여 훈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는 '훈춘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마적단은 훈춘을 습격하여 영사관을 방화하고 일본인을 납치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으며, 일본은 이를 빌미로 2만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습니다.

[독립군 지도부 회의와 김좌진의 결단]

독립군 지도부 회의에서 일본군과의 일전을 두고 주전론과 피전론이 맞섰으나,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 추적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김좌진은 결국 일전을 결심했습니다. 이날 일본군은 오인사격을 벌여 스스로 사상자를 냈습니다.

1920년 10월 18일경, 다수의 독립군 부대가 집결하여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을 상대할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일본군 19사단 예하 부대가 몰려온다는 소문에 소수 병력으로는 상대가 불가하다는 피전론이 우세했으나, 김좌진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이날 일본군은 밤중에 길을 잃고 자국 군끼리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서로 발포, 180명 사망, 70명 부상이라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운평 전투 대승]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백운평에서 매복 기습작전으로 일본군 동지대 선발 보병 중대를 전멸시키며 청산리 전투의 첫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일본군 200명 이상이 전사했습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경, 백운평에 매복해 있던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가 일본군 동지대 선발 보병 중대(야스가와 부대 전위대)에 일제사격을 가하며 기습 공격했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 200명 이상을 전사시키고 큰 피해를 입혔으며, 뒤이어 도착한 야마다 본대 역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퇴각했습니다. 이 전투는 청산리 전투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완루구 전투 승리]

같은 날 오후, 이도구 완루구에서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고전했으나, 새벽까지 완강히 항전하여 4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20년 10월 21일 오후, 이도구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한때 남북 협공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와 10월 22일 새벽까지 완강한 항전을 벌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일본군은 서로에게 총을 쏘아대기도 했고, 결국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며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천수평 전투 승리]

천수평에 진입한 가노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 기병연대는 독립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20분 만에 3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1920년 10월 22일 아침, 가노(加納)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습니다. 독립군은 역시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기다렸다가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독립신문 제88호는 '사격 개시 20분 만에 일본군은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큰 승리였습니다.

[갑산촌 전투 승리]

백운평 전투 승리 후 갑산촌으로 철수했던 김좌진 부대는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키며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백운평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이도구 갑산촌으로 철수했습니다. 그곳에서 김좌진 부대는 천수평에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습니다. 이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더욱 충천했습니다.

[어랑촌 협공 작전 대승]

어랑촌에서 김좌진과 홍범도 연합부대는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협공했습니다. 일본군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 등 300명 이상을 전사시키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920년 10월 22일 오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연합부대 2,000여 명과 일본군 동지대 간의 어랑촌 결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전 9시 3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아즈마 부대 일부인 기병대대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그날 저녁 7시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홍범도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에서 싸움에 가세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고, 그 틈을 타 김좌진 부대는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기병 연대장 가노 대좌를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하며 패배했습니다.

[만록구 전투 승리]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천수동, 어랑촌, 만록구 일대에 말똥을 뿌려 일본군을 속인 후, 만록구 고지에서 이틀간 백병전을 펼쳐 일본군을 퇴각시키는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20년 10월 23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오래된 말똥을 채취하여 천수동, 어랑촌, 만록구 일대에 뿌려 일본군 척후병을 속였습니다. 일본군 주력부대가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해 1차, 2차 선발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이후 평지에서의 교전이 불리하다고 판단, 만록구 고지에서 이틀간 백병전을 펼쳐 일본군을 퇴각시켰습니다.

[고동하 전투 승리]

고동하 계곡에서 홍범도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이 독립군 야영지를 급습했으나, 매복 중이던 독립군이 역습하여 일본군을 퇴각시키고 많은 사상자를 내게 했습니다.

1920년 10월 23일부터 독립군 연합부대는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대와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며 고동하를 따라 상류로 이동했습니다. 10월 25일 밤, 고동하 계곡에서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한 일본군은 매복 중이던 홍범도 부대 일부의 역습을 받아 전열을 재정비한 뒤 퇴각했습니다. 독립군은 산중으로 올라가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가 바뀐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다시 퇴각했습니다.

[청산리 전투 대승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계곡 일대에서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전투가 벌어져 한국인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며 도강했으나 연전연패했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일주일 동안 청산리 계곡의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등하 등지에서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간도 왕청현에서 백두산 산록 사이에서 벌어진 이 10여 회의 전투에서 한국인 독립군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훈춘 사건까지 조작하면서 도강했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연전연패했습니다. 한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 1,200명, 부상자 3,300여 명에 달하며, 독립군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 90여 명으로 집계됩니다. (일본 측 기록은 전사 11명, 부상 24명으로 크게 다름).

1921

[독립군 러시아령 이동]

청산리 전투 후, 독립군 연합부대가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압력을 피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장기 항전을 준비했습니다. 이후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무기 반납 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이 중국에 압력을 넣어 독립군을 토벌하게 되자,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습니다. 1921년 1월 26일,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2월 말에는 아물 주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옮겨갔으나, 새 무기를 받는다는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들을 반납하며 후에 자유시 참변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김좌진 등은 러시아행을 탐탁해하지 않아 만주로 되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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