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균 (1908년)

역사가, 공무원, 대학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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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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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균은 일제강점기에 도서 및 영화 검열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남겼습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서 경찰 분야 전문가로 발탁되었고, 이후 대학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한국사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사후에는 그의 친일 전력 논란이 제기되어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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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김성균 출생]

일제강점기 검열관이자 대한민국 역사학자인 김성균이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검열관을 지내고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역사학자로 활동한 김성균(金聲均)이 1908년에 태어났다. 그의 호는 취정(翠汀)이다.

1929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김성균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김성균은 1929년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1

[경성제국대학 예과 졸업]

김성균이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마쳤다.

1931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했다.

1934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졸업]

김성균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34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임용]

경성제국대학 졸업 직후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임용되어 도서 검열 업무를 맡았다.

경성제대 졸업 직후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임용되어 도서 검열 업무를 맡았으며, 조선영화개발협회의 참사를 겸해 영화 검열에도 참여했다. 이 시기 일제의 영화통제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의 간사로 활동했다.

1945

[미군정 경찰 분야 전문가로 발탁]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에 의해 경찰 분야 전문가로 발탁되어 과도정부 경무부에서 요직을 맡았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에 의해 경찰 분야 전문가로 발탁되어 과도정부 경무부에서 경찰공보실 부실장 겸 수도경찰학교 교장이 되었다.

1953

[대학교 강사 활동 시작]

1953년부터 동국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강사를 거치며 교육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53년부터 동국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강사를 거쳤다.

1954

[국학대학 사학과 교수 부임]

국학대학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4년에는 국학대학 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5

[국사편찬위원회 편찬과장 겸임]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 편찬과장을 겸임하며 한국사 연구의 중심 기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55년부터 편수관 3급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 편찬과장을 겸했다. 이후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65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취임]

문교부 장관이 겸직하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올라 한국사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동을 계속하여 1965년에는 당시까지 문교부 장관이 겸직하던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한국사학회 회장도 겸임하는 등 대한민국의 한국사 부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2

[경희대학교 정년퇴임]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정년퇴임했다.

1972년에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정년퇴임하였다.

1973

[중화학술원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중화민국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에는 중화민국의 중화학술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

[김성균 사망]

일제강점기 검열관이자 대한민국 역사학자 김성균이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검열관이자 대한민국 역사학자인 김성균이 1983년에 사망했다.

2009

[친일인명사전 초판에 등재]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초판에 그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초판(1권 419페이지)에 포함되었다. 그의 친일 전력 논란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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