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욱 (승려)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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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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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했으며, 훗날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행적을 남겼습니다.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국회의원과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사후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되는 등 그의 삶에 대한 평가와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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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이종욱의 탄생]

이종욱이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다.

이종욱은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884년에 태어났다.

1896

[오대산 월정사 출가]

13세의 나이로 이종욱이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하며 승려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이종욱은 13세에 오대산 월정사에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1919

[임시정부 대표 활동]

3·1 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한성임시정부의 강원도 대표로 참여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를 맡으며 독립운동에 기여하다.

3·1 운동의 결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설치된 임시의정원에서도 강원도 대표를 맡았다.

[3·1 운동 참여 및 27결사대 가입]

이종욱이 3·1 운동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이탁의 무장 단체인 27결사대에 가입하며 항일 운동에 적극 가담하다.

이종욱은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 일어난 3·1 운동의 만세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탁의 무장 단체인 27결사대에도 가입했다.

1923

[국내 복귀 및 월정사 재합류]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하다. 이때부터 그의 친일 전향 시기가 불분명하게 시작된다.

이종욱은 1923년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했다. 그의 독립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와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1930

[월정사 주지 및 종회 의장 취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아 월정사의 주지가 되고, 동시에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 의장으로 선출되며 국내 불교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다.

이종욱은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그해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36

[미나미 지로 총독 환영식 참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부임 환영식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가하며,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하는 행적을 시작하다.

이종욱이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한 것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의 부임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미나미 환영식에 참가한 무렵부터이다.

1937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 선임]

31개 본산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현 조계종) 설립을 논의할 때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로 선출되어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받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37년 31개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했다.

[중일 전쟁 협력 및 친일 활동]

중일 전쟁 이후 일본군을 위한 기원법회와 시국강연회를 열고, 친일 논설을 잡지에 게재하며 일본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다.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가담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서 적극적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협력했다.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했다.

1941

[종무총장 취임]

조선불교계의 주요 직책인 종무총장 직을 맡게 되다.

이종욱은 1941년부터 종무총장 직을 맡았다.

1945

[정치인 변신 및 불교계 복귀]

해방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 반탁 운동에 참여하며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하는 길을 모색하다.

이종욱은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종무총장 사퇴 및 징계]

광복 이틀 후, 그동안 맡았던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하고 승권 정지의 징계를 받으며 친일 행적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다.

적극적인 친일 승려로 오래 활동했기에 광복 이틀 후에는 1941년부터 맡아온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해야 했으며 승권 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1950

[제2대 국회의원 당선]

고향인 평창에서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새로운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1

[동국대학교 이사장 취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며 교육계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다.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52

[중앙총무원장 복귀]

불교계의 핵심 직책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복귀하며 불교계 내에서의 영향력을 재확인하다.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돌아왔다.

1969

[이종욱의 사망]

이종욱이 세상을 떠나다.

이종욱은 1969년에 사망했다.

1977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다.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1993

[독립유공자 재심 대상자 선정]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재심 과정에서 8명 중 한 명으로 명단에 오르며 그의 독립유공자 자격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다.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랐다.

2002

[친일파 708인 명단 선정]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며 그의 친일 행적이 공식적으로 다시 조명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8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선정]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오르며 친일 행적 논란이 심화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9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포함]

정부 산하 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며 그의 친일반민족행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10

[독립장 서훈 취소]

1977년에 추서되었던 건국훈장 독립장이 취소되며 그의 독립유공자 자격이 최종적으로 박탈되다.

2010년 이종욱에게 추서되었던 건국훈장 독립장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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