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독립운동, 전투, 한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0:49:02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와 남양수비대를 상대로 벌인 전투입니다. 지형지물과 유인책을 활용한 독립군의 대승으로, 독립군 사기 진작 및 향후 독립전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군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대규모 독립군 토벌 작전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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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봉오동 마을 개척]
최진동이 만주 봉오동에 정착하며 마을을 개척하고 한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형성합니다. 이는 이후 독립군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 됩니다.
최진동이 1900년대 초 만주 봉오동에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로, 1908년 청나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개간하며 점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한국인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한인촌을 구성하였으며, 최진동이 마을의 행정과 질서를 주름잡고 그가 지휘하는 소규모 의병, 독립군의 활동 기반이 됩니다. 1920년 무렵에는 동만주 지방의 한인 교민촌이자 최진동 독립군의 중심지로 발전합니다.
1919
[3.1 운동 이후 독립군 무장 항쟁 고조]
3.1 만세 운동 이후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창설되고 활발한 무장 항쟁을 펼치자, 일본은 밀정을 파견하여 독립군의 동태를 주시합니다. 일본 정부는 독립군이 국내 진공을 계획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와 연해주, 간도 등에서 국민회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대한 광복군 총영 등의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창설되어 온성 전투, 삼둔자 전투 등 일본군 부대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 승리합니다. 이에 일본군은 제19사단의 1개 대대를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로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갔습니다. 1920년 5월부터 일본 정부는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1920
[홍범도 부대 무기 증강]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관총 7정, 군총 220정, 탄약 18,000발, 권총 22정을 추가로 구입하며 무장력을 증강합니다.
1920년 3월, 홍범도 부대는 기관총 7정, 군총 220정, 탄약 18,000발, 권총 22정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가로 구입하여 간도의 본영까지 운반해 왔습니다. 봉오동 전투 직전 무렵에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약 15,000원의 군자금으로 군총 300정과 총 1정당 탄약 1,200발을 추가로 구입합니다. 이를 통해 홍범도 부대는 병력 약 300명에 군총 약 200정, 권총 약 40정, 탄약은 총 1정당 200발을 갖추고 있던 초기 무장력을 꾸준히 증가시켜 나갑니다.
[대한군북로독군부 조직]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단일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를 조직합니다. 이들은 최진동의 병영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계획합니다.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 국민군 및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를 조직했습니다. 군무도독부의 병영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계획합니다.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계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계 약 550명으로 총 1,200여 명에 달했으며, 기관총 2문, 군총 약 900정 이상, 권총 약 200정, 폭탄 약 100개 등의 화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간도 화룡현 봉오동에 집결하여 합동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며, 이후 대한신민단의 이흥수와 한경세가 이끄는 신민단 독립군 약 60명도 합류합니다.
[삼둔자 전투 발발]
홍범도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 초소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킵니다. 이는 봉오동 전투의 서막을 알린 삼둔자 전투입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각각 동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 월신강을 넘어 간도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켰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 기밀을 입수하고 만주 국경 지대 주변의 한국인 독립군 활동에 관심을 갖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던 중이라, 이 기습은 전투의 도화선이 됩니다. 이 전투를 일각에서는 봉오동 전투와 따로 구분하여 삼둔자 전투로 부르기도 합니다.
[독립군의 유인 작전 시작]
삼둔자 전투 후,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자, 독립군은 삼둔자 봉화리에 매복하고 이화일 소대장을 통해 일본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전개합니다.
삼둔자 주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확인한 국경초소지대의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습니다. 독립군 연합부대 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키고, 이화일 소대장이 이끄는 약간의 병력을 고지대에 배치시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했습니다. 이화일 소대장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남양수비대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일본군 월강추격대 편성 및 진입]
일본군 제19사단은 간도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1개 대대 규모의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에 진입합니다.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 국경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삼둔자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야스카와 소좌가 이끄는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넘어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삼둔자 전투에 참가했던 신미 대위의 신미중대가 합류한 일본군은 야스카와 소좌 인솔하에 6월 6일 종성군 하탄동에 집결하여 6월 6일 오후 9시 이후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 6월 7일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일거에 공격하고자 출격했습니다.
[안산·고려령 전투 및 독립군 유인 성공]
새벽, 야스카와 월강추격대대가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 독립군 매복조가 기습 총격을 가하여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이후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이 펼쳐집니다.
1920년 6월 7일 자정부터 새벽 사이,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 빈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 꼭대기에서 이를 지켜보던 독립군이 수신호를 보내 미리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습니다. 야스카와의 대대는 니히미 지로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니히미 중대와 합세하여 독립군과 교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날씨가 흐렸으며, 독립군 일부에게 먼저 불의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고려령에서 독립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봉오동 골짜기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2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봉오동 전투 승리]
봉오동 전투는 약 3~4시간 동안 이어졌고, 일본군 월강대대는 대패하여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으로 퇴각합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군 전사자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기록한 반면,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합니다.
1920년 6월 7일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약 3~4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고, 강상모가 2중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다시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월강대대는 대패하여 함경북도 온성군 유원진으로 퇴각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대승은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병력 보강과 군비 확충에 활력을 주었으며, '봉오동대첩'이라고도 불립니다.
[봉오동 전투 개시]
일본군 월강추격대대가 봉오동 골짜기 내 독립군 포위망에 들어서자, 오후 1시부터 홍범도 사령관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제히 공격이 시작됩니다. 3~4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집니다.
1920년 6월 7일 새벽, 대한군북로독군부는 안산과 고려령에서 있었던 교전 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명령 지휘체계를 재편성했습니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고, 안무를 사령부 부관으로 임명하는 등 7개 중대로 재편성하여 봉오동 골짜기에 매복했습니다. 일본군 월강대대 선발대가 오후 1시 독립군 포위망 안에 진입하고, 아무도 없음을 알리자 일본군 월강대대 본대는 안심하고 봉오동 골짜기로 진입했습니다. 이때 소나기와 우박,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일본군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였고, 홍범도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제히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홍범도 부대의 노두구 일본 영사관 습격]
봉오동 전투의 승리에 고무된 홍범도 부대는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며 승리합니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고, 계속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한 군자금 조달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해 7월 11일, 홍범도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는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하여 다수의 부상자를 내고 승리했습니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 및 대규모 토벌 계획]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이후 소규모 전투에서의 연이은 패배에 경악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우고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 간도 출병을 결정합니다.
독립군을 대한제국 말기의 의병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얕보던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의 대패와 1920년 8월까지 거듭된 소규모 전투와 습격 작전에서 번번이 북로군에게 패하자 경악했습니다. 일본군은 이후 만주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계획을 세웠고, 이에 필요한 군대 동원을 위해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관동군 2개 사단을 파병하게 됩니다. 이때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홍범도 부대는 김좌진, 이범석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본부와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가하기 위해 청산리로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