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저격 사건
정치 사건, 암살 미수, 영부인 사망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52:33
1974년 광복절 기념식 중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총격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일 관계를 급격히 얼어붙게 했으며, 이후 사건 조작 및 진범 논란이 끊이지 않아 여전히 많은 의혹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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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박정희,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며 이후 민정 이양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는 향후 그의 정치적 행보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61년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민주공화당을 조직하며 민정 이양 후 집권을 위한 밑작업을 진행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3
박정희는 대한민국 헌법을 개정하여 직접선거와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 체제를 구축한 후, 1963년 10월 대선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하며 정식으로 민정 이양 후의 집권을 시작했다.
1964
[6.3 항쟁 발발]
박정희 정부의 한일 외교 복원 방침과 졸속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인 '6.3 항쟁'이 격렬하게 발생했다.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으로 강경 진압했다.
1964년 3월,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 복원을 추진하며 졸속 협상 내용이 공개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반대 시위인 '6.3 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포하며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965
[한일기본조약 체결]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꾸준한 회담을 통해 한일조약을 체결하며 양국 국교를 정상화했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정부는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회담을 지속하여 한일조약을 체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한일조약 국회 단독 비준]
한일조약 비준을 야당이 굴욕외교라며 반대하자,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이 단독으로 조약을 국회에서 비준 처리했다.
1965년 8월 14일, 야당이 굴욕 외교라며 반대한 한일조약은 결국 집권여당 민주공화당의 단독 처리로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1969
[3선 개헌안 변칙 통과]
1967년 박정희의 연임 성공 후 3선 개헌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고, 전국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벽 3선 개헌안이 변칙적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연임 성공과 총선에서의 여당 승리 후, 3선 개헌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전국적인 개헌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3선 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 통과되었다.
1971
[박정희, 3선 대통령 당선]
3선 개헌 후 치러진 대선에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와 치열한 접전 끝에 3선에 성공하며 영구 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3선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2
[박정희, 유신 선포]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체제를 선포하며 강력한 통치 권한을 장악했고, 이는 반정부 투쟁을 하던 김대중의 귀국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하여 강력한 권한을 장악하자,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물던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정부 투쟁을 시작했다.
1973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반정부 투쟁 중이던 김대중이 도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5일 만에 풀려났다.
유신 선포 후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반정부 투쟁을 하던 김대중이 '한민통'을 결성하자, 유신정부는 이를 경계했다. 1973년 8월 8일,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에서 김대중은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었고, 5일 만에 풀려났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김대중 납치 사건 외교적 무마]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되자, 김종필 총리가 대통령 친서를 들고 방일하여 사건을 무마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한국 정부가 관여 사실을 부인했음에도, 일본 도쿄 경시청의 증거로 외교 문제가 심각해졌다. 결국 1973년 11월, 김종필 총리가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하며 사건이 무마되었으나, 일본 국민들의 반한 감정은 고조되었다.
1974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10분경,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념식은 비극적인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문세광 현장 체포 및 육영수 여사 후송]
총격전 끝에 문세광은 객석에서 제지당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피격당한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다.
문세광과 경호원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합창단원 한 명이 경호원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연단으로 향하던 문세광은 객석에 있던 세무 공무원 이대산에 의해 넘어뜨려졌고, 오전 10시 30분경 경호원들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동시에 피격된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장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나머지 기념사를 마쳤다.
[육영수 여사 서거]
장시간의 뇌수술에도 불구하고 총알이 좌뇌의 주요 정맥을 손상시킨 탓에, 육영수 여사는 오후 7시경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오후 4시 20분까지 진행된 뇌수술은 총알이 좌뇌의 가장 큰 정맥을 손상시킨 탓에 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이 회복실에서 이별의 시간을 가졌고,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오후 7시경 향년 48세로 서거했다.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1974년 8월 15일 밤에 청와대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국민장으로 5일장을 치르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문세광,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 청중석에 있던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총을 발사해 암살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경,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읽기 시작하자 객석의 문세광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는 첫 발을 오발하여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을 향해 달려나가며 총을 발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피했고, 문세광의 본래 목적은 박정희 암살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피격되었다.
[육영수 여사 뇌수술 시작]
병원 도착 후 응급조치를 마친 육영수 여사는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전문의의 집도로 뇌수술을 받기 시작했다. 대량 수혈이 이루어지는 대규모 수술이었다.
응급차에 실려 국립중앙극장에 도착한 육영수 여사는 응급실에서 지혈제, 산소호흡 등 응급조치를 받았다. 이후 오전 11시경부터 신경외과 전문의 최길수의 집도 아래 뇌수술을 받기 시작했으며, 400mL 혈액 148팩이 수혈되는 등 대규모 수술이 진행되었다.
[육영수 여사 사망 공식 발표]
육영수 여사의 사망 직후인 저녁 8시 10분,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발표했다. 당시 장녀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 중 비보를 접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직후인 1974년 8월 15일 저녁 8시 10분, 청와대 김성진 대변인이 이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병원 가족실에는 남편 박정희와 여동생 육예수, 둘째 딸 박근영, 아들 박지만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 중이던 장녀 박근혜는 공항에서 신문을 보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사건 조작 의혹 제기 (언론 보도)]
문세광의 자백이 시작되기도 전인 8월 16일자 조간신문에 중앙수사본부의 발표와 동일한 내용이 보도되어 사건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다.
문세광의 자백이 시작되기도 전인 1974년 8월 16일자 조간신문에, 다음날 발표될 중앙수사 본부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이 이미 보도되었다는 점이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의해 사건 조작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기춘과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김일두는 사전 발표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육영수 여사 국민장 및 안장]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5일간의 국민장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박근혜는 영부인 역할을 대신했다.
육영수 여사의 유해는 8월 15일 밤 청와대로 이송되었고, 5일간의 국민장을 치른 후 8월 19일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후 장녀 박근혜는 유학을 포기하고 영부인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아들 박지만은 방황 끝에 진로를 변경했다.
[일본, 육영수 저격 사건 책임 인정]
육영수 저격 사건 수사 결과에 대한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한일 관계가 불편해지자,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며 진사 특사를 파견했다.
육영수 저격 사건 수사 결과가 발표된 후,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일본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한일 관계는 불편해졌다. 결국 1974년 9월 19일, 일본 정부가 사건 책임을 인정하고 집권당 부총재 시나 에쓰사부로를 수상 다나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 특사로 한국에 파견했다. 이후 양국 관계는 개선되었으나, 한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다.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의 범인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된 후 중앙정보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위조 여권 사용 및 일본 파출소 권총 탈취 등이 밝혀졌다. 그는 1974년 12월 2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2005
[경호관 총격 의혹 보도]
동아일보는 육영수 여사가 경호관의 총에 피격되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진범 논란을 다시 불 지폈다.
문세광은 선고 법정에서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으며, 당시 수사본부 요원도 의문을 제기했다. 2005년 2월 11일 동아일보는 당시 경호관들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보도하며 진범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사격 실험을 통해 의혹을 풀고자 했다.
[사건 조작 의혹 방송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사건 수사와 언론 발표 시점이 뒤섞인 점을 지적하며 육영수 저격 사건의 조작 의혹을 심층 보도했다.
2005년 3월 2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 육영수 저격 사건의 수사와 언론 발표 시점의 불일치를 지적하며 사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문세광의 자백 이전에 언론에 수사 내용이 보도된 점 등을 근거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