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정치인, 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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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가난을 딛고 현대건설의 '샐러리맨 신화'를 쓴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 개편으로 '불도저 시장' 별명을 얻으며 17대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 UAE 원전 수주 등 경제 성과를 냈으나, 퇴임 후 비리 혐의로 구속되며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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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일본 오사카에서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태몽에 따라 밝을 명(明), 넓을 박(博)을 써 '이명박'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목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이충우와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호적상 이름은 이시형(李相定)이었으나,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1945

[광복 후 고국으로 귀국 및 포항 정착]

일제강점기에서 광복을 맞자 가족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포항읍내로 이사하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이명박 가족은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에 정착했고, 약 2년 후 포항읍내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는 귀국 후에도 목장 일에 종사했고, 어머니 역시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가족의 생활고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950

[한국전쟁 중 가족 잃고 생활고 겪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 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고,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우며 힘든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포항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고, 미군의 폭격으로 바로 위의 누나와 귀국 후 태어난 막내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전쟁통에 집안 살림은 더 어려웠고 단칸방에서 모든 식구가 자며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우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961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합격]

고교 졸업 후 상경하여 일당 노동자로 일하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얻은 책으로 독학하여 1961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이웃 상인들의 도움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고, 이태원 시장 환경미화원으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합숙소에 들어가 일당 노동자 생활을 했습니다. 대학 중퇴라도 되고 싶다는 생각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책을 얻어 대입 시험공부를 시작했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합숙소에서 공부한 결과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어머니가 좌판 일을 하던 이태원 시장의 상인들 도움으로 등록금을 마련했고, 이태원시장에서 새벽 청소 일을 하는 환경미화원으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64

[6.3 시위 주도 및 복역]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하는 등 청년기부터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상과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졸업을 앞둔 1964년에는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시위 중 수배되어 도피 생활을 하다 자수했으며,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재오 등 후일 정치적 동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1965

[현대건설 평사원 입사]

학생운동 전력으로 취업이 어려웠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샐러리맨으로서의 성공 신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취업 방해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편지를 써 정면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이낙선 청와대 민정담당 비서관의 조치로 현대건설에 입사할 수 있었으며, 면접에서 건설을 '창조'라고 정의하며 경리과 평사원으로 현대건설에 발을 들였습니다.

1970

[김윤옥과 결혼]

현대건설 재직 중 6살 연하의 김윤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이 부부는 1남 3녀를 두었습니다.

현대건설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써나가던 이명박은 1970년 12월 19일 6살 연하의 김윤옥과 결혼했습니다. 슬하에 아들 시형과 딸 주연, 승연, 수연 등 1남 3녀를 두었습니다.

1972

[건축법 위반으로 구속]

현대건설 상무 재직 중 서울 용산구에 무허가 중기공장차고 7동을 건축한 혐의로 건축법 위반으로 공개 수배된 후 구속되었습니다.

현대건설 상무로 재직하던 1969년 12월부터 1970년 5월까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69의 14 매머드빌딩 부지에 중기공장차고 7동을 무허가로 건축했습니다. 이로 인해 1972년 '건축법 위반' 혐의로 공개 수배된 뒤 구속되었습니다.

1977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취임]

현대건설 입사 13년 만인 35세의 젊은 나이로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며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는 당시 파격적인 승진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965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이명박은 2년 차에 대리, 29세에 이사로 승진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입사 13년차인 1977년에는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장이었던 조성근의 아내 김보환의 간통 사건으로 조성근이 사퇴하자 부사장인 이명박이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88

[현대건설 회장 취임 및 노조 관련 논란]

현대건설 회장에 올랐습니다. 이 시기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납치 사건'에 연루되어 노조 설립 방해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1988년 이명박은 현대건설 회장에 취임했습니다. 같은 해 '현대건설 노조추진위원장 납치 사건'이 발생했으며, 당시 노조 설립을 주도했던 서정의 씨는 이명박이 이 사건의 총책이라고 폭로했습니다. 검찰 조사 결과 납치에 직접 관련은 없지만 '노조 설립 방해'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1989

[드라마 '야망의 세월' 방영]

KBS 2TV에서 그의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이 방영되며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40대에 대기업 회장이 된 이명박의 성공 스토리는 1989년 KBS 2TV에서 <야망의 세월>이란 제목으로 드라마화되어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그가 대중에게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1

[직원 원직 복직 명령 불이행으로 입건]

현대건설 대표이사로서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전직 판정을 받은 직원에 대한 원직복직명령을 두 차례 불이행한 혐의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1991년 6월 14일 서울지방노동청은 근로기준법위반 혐의로 이명박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이명박 현대건설 대표이사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전직임을 판정받은 직원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원직복직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혐의를 받았습니다.

1992

[현대그룹 떠나 정계 입문 준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이명박은 현대그룹을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1992년 1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이명박은 현대를 떠났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정 회장의 창당에 반대한 이유였다'고 밝혔습니다.

[제14대 국회의원 당선, 정계 입문]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후 서울~부산 간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1995년 그는 대정부질문에서 서울~부산 간 운송비가 해상운송비보다 비싸다고 지적하며 500km 길이의 경부운하 건설을 정부에 제안했는데, 이때 처음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그의 구상이 세간에 알려졌습니다.

[영포빌딩 불법 용도 변경으로 약식기소]

소유한 영포빌딩의 2층과 5층을 허가받은 근린생활시설이 아닌 사무실로 사용하고, 지하 주차장을 창고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한 혐의로 건축법 위반으로 벌금 1천만원에 약식기소되었습니다.

1992년 7월 8일 서울지방검찰청 형사1부는 건축법위반 혐의로 이명박을 벌금 1천만원에 약식기소했습니다. 이명박은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자신 소유 건물인 영포빌딩의 2층과 5층이 근린생활시설로 허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로 사용해왔고, 지하 주차장 2백여 평도 창고로 용도 변경하여 사용해왔습니다.

1995

[서울시장 경선 패배]

최초의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했습니다. 당시 경선은 불공정 선거였다고 주장하며,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여 승복했습니다.

1995년 처음 민선으로 치러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민주자유당 서울시장 후보로 경선에 나왔습니다. 이때 그는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임기가 1년 정도 남아있었습니다. '서울시장 경선은 당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라 주장하며 최종 경선까지 갔지만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했습니다. 10년 뒤인 2005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1995년 서울시장 선거 때 김영삼 전 대통령과 독대, 서울시장 후보를 경선하기로 했으나 미안한 얘기지만 그 경선은 불공정 선거였다. 당시 승복 여부를 고민했지만 경선을 이룬 것만으로도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해 승복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96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및 선거법 위반 의혹]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 지역구에 출마하여 정치 거물들을 제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이명박은 종로 지역구에 출마했습니다. 정치신인이었던 이명박은 이종찬, 노무현 등 정치 거물들과의 승부에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진영의 6급 비서였던 김유찬이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캠프의 선거비용이 법정비용을 초과했다고 폭로하며 선거법 위반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1997

[선거법 위반 및 범인 은닉 혐의 유죄]

선거법 위반 및 범인 은닉 혐의로 1심에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1996년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 의혹이 제기되었던 이명박은 1997년 9월 1심에서 법정 선거 비용 초과 지출 및 범인 은닉 혐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아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1998

[국회의원직 사퇴 및 서울시장 경선 포기]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항소심에서 다시 벌금형을 선고받으며 경선 출마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1998년 2월 항소를 진행하던 중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4월 항소심서 벌금 400만 원 형이 선고되자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정치공세로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포기했습니다. 이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으로부터 객원연구원으로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999

[피선거권 박탈]

대법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벌금 400만원이 확정되면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활동에 큰 제약을 가져왔습니다.

1999년 4월 대법원에서 벌금 400만원이 확정되면서 피선거권이 박탈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공직선거법에 따라 벌금 100만원 이상 형이 확정되면 일정 기간 피선거권을 상실하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2000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면서 공직 선거 피선거권을 되찾았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재기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1999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벌금 400만원이 확정되어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던 이명박은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되면서 공직 선거 피선거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2002

2002.06.13 1해당 사건의 피인용 횟수를 나타냅니다.

[제32대 서울특별시장 당선]

민선 3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4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 환승체계 구축 등 굵직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면복권된 후, 이명박은 2002년 민선 3기 32대 서울특별시장선거에 출마해 민주당 김민석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에 전환점을 맞게 됐습니다. 4년여간의 서울특별시장 재임 기간 동안 대형 사업을 여러 차례 추진하여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좋은 행정추진력을 통해 높은 공약 이행률을 기록,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 유력 주자로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특히 청계천 복원 사업, 서울시 대중교통 환승체계 구축, 서울숲 조성 등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2003

[비재학생 청소년 할인 및 청소년증 발급 약속]

MBC '느낌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비재학생 청소년들이 공공시설 할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문제에 공감하고, 청소년 할인 및 청소년증 발급을 약속했습니다.

2003년 MBC 프로그램 《느낌표》의 한 코너인 '하자하자'에 출연한 이명박은 당시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재학생 청소년들이 각종 공공시설 이용 할인 혜택을 받지 못 하고 있다는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청소년 할인 및 청소년증 발급을 약속했습니다.

[청소년 교통 할인 및 청소년증 발급 시행]

서울시가 대전광역시와 함께 광역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청소년 교통 할인을 실행하고 청소년증을 발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앞서 약속했던 비재학생 청소년들의 복지 향상 정책이었습니다.

2003년 10월 서울시는 대전광역시와 함께 광역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청소년 교통 할인을 실행하였으며 청소년증 역시 발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정책은 비재학생 청소년들의 공공시설 이용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2004

[서울광장 개장]

서울시청 앞 복잡한 교통 상황을 개선하고 시민들의 집회 및 여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광장을 조성하여 개장했습니다. 이는 서울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취임 후 서울시청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자 했습니다. 서울광장 개장 이전에는 시청 앞에서 집회나 응원 등을 할 때 기존 도로를 통제하고 차도에 시민들이 모여 집회를 진행했는데, 이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서울광장 조성 사업이 추진된 것이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교통상황 악화 우려를 해소하고 2004년 5월 1일 개장했으며, 서울광장은 이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 개편]

서울시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환승제도, 버스 중앙차로제, 티머니 교통카드 도입 등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교통혁명'이라 불리며 시민들의 교통 편의를 크게 증진시켰습니다.

2004년 7월 1일, 서울시의 대중교통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했습니다. 이때 신설된 교통카드가 티머니 교통카드이며, 버스 중앙차로제를 실시하고 버스 번호와 색을 체계적으로 재정비했습니다. 이용 요금은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에 비례하도록 변경했으며, 준공영제를 도입했습니다. 교통체계 개편 1년 후 '세계대중교통협회(UITP)'에서는 이를 '교통혁명'에 비견하며 우수 정책으로 인정했습니다. 타임지는 청계천 복원과 버스체계 개편 등을 이유로 이명박을 '환경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했습니다.

2005

[서울숲 개원]

뚝섬 경마장과 골프장 부지에 친환경 생태공원인 서울숲을 개원했습니다. 이는 서울이 친환경 도시로 거듭나는 중요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장 취임 후 이명박은 기존의 개발계획을 백지화하고 뚝섬에 녹지를 조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뚝섬을 우거진 숲과 연못, 잔디밭으로 구성된 친환경적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고, 2005년 6월 18일 서울숲이 개원했습니다. 서울숲이 생김으로써 비로서 서울은 광화문에서 청계천과 중랑천을 거쳐 뚝섬에 이르는 그린 네트워크가 완성되며 친환경적 도시의 모양새를 갖췄습니다.

[청계천 복원 공사 완료]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이는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불도저 시장'의 이미지를 각인시켰습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후 청계천 복원 의사를 밝히자 주변 상인과 버스업계,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격렬한 반대운동이 있었습니다. 이에 이명박은 청계천 복개도로 밑을 시민들과 함께 탐방하는 행사를 열어 복원의 타당성을 알렸고,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어 2005년 10월 1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 공사를 완료했습니다. 이는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속 생태하천으로 자리 잡았으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호를 '청계'로 변경]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절, 청계천 복원 시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아호를 '일송(一松)'에서 '청계(淸溪)'로 변경했습니다. '청계'는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명박의 호는 원래 '일송(一松)'이었으나, 서울특별시장 시절이던 2005년 10월 26일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고대 동문 김정배 위원장의 권유에 따라 '청계(淸溪)'로 바꾸었습니다. '청계'는 그가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 사업의 성공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06

[숭례문 홍예문 개방]

문화재 개방 기조 아래 숭례문의 홍예문(아치형 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의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시민들이 국가 문화유산을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2006년 6월 28일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이명박은 문화재 개방의 기조 아래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의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시민들이 숭례문을 보다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역사적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정책이었습니다.

2007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확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17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습니다. 치열한 경선 끝에 승리하며 대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이명박은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러 2위인 박근혜 후보를 2,452표 차이로 누르고, 한나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습니다. 당시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는 박근혜에게 패했지만, 전화상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앞지름으로써 승리했습니다. 표의 등가성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으나, 박근혜 후보가 승복함으로써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이회창 대선 출마 선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에 큰 타격을 주며 대선 정국에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2007년 11월 7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지지율이 단숨에 20%를 넘으면서 2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이로써 50%가 넘는 지지율로 사실상 선거를 주도하던 이명박 후보는 지지율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BBK 주가조작 의혹 무혐의 발표]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 이명박 후보는 BBK 실소유주, 주가조작, 다스 관련 모든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2007년 12월 5일 검찰은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 수사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BBK 실소유주, ㈜다스 실소유주 의혹 모두 '무혐의'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정치권의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BBK 특검법'이 통과되어 특별검사의 수사가 추가로 진행되었습니다.

[재산 사회 환원 약속]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 내외가 살아갈 집 한 칸이면 족하며 그 외 재산 전부를 내놓겠다'고 약속하며 재산 사회 환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청계재단 설립으로 이어집니다.

17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인 2007년 12월 7일, 이명박은 "우리 내외가 살아갈 집 한 칸이면 족하며 그 외 재산 전부를 내놓겠다"며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2009년 7월 청계재단 설립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으로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2007년 12월 19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은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49%의 득표율로 제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특히 같은 보수 진영이었던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까지 합치면 60%를 넘는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로 CEO 출신 대통령이라는 의의도 있습니다.

2008

[숭례문 방화 사건 발생]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전소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현장을 방문하고 국민성금으로 복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경,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숭례문 2층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소방 당국이 진화에 나섰으나 2월 11일 새벽,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여 결국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되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은 이 현장을 방문하여 국민성금으로 복원하자고 제안했습니다.

[BBK 특검, 무혐의 처분]

BBK 특검은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의 마지막 정치적 걸림돌이 해소된 것이었습니다.

BBK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김경준의 주장이 제기되고 'BBK 특검법'이 통과되어 특별검사의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2008년 2월 21일 특검은 이명박에 대한 모든 의혹에 대해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습니다. 이는 광운대학교 강연과 BBK 명함 등의 증거가 계좌추적 등을 통한 객관적인 정황을 번복할 만한 직접 증거가 안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함께 가요, 국민성공시대!'라는 표어 아래 국회의사당에서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CEO 출신 대통령으로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한 '경제살리기'를 국정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2008년 2월 25일에 취임식이 '함께 가요, 국민성공시대!'라는 표어를 내걸고 국회의사당에서 열렸습니다. 취임식 엠블럼의 명칭은 태평고(太平鼓)로, 한국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희망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통해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통폐합안을 발표하고,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뼈대로 '경제살리기'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한미 쇠고기 수입 협상]

미국 캠프데이비드를 방문하여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한미 쇠고기 수입 재개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 협상 과정은 국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08년 4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캠프데이비드를 방문하여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한미 쇠고기 수입 재개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한미 FTA 협상 중 가장 민감한 현안이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는 대한민국 국민의 큰 반발을 가져왔고, 이는 촛불 시위로 번지게 됩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대규모 촛불 시위 시작]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에 반대하며 청계 광장에서 대규모 촛불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초기의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였습니다.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 소식에 MBC PD수첩을 비롯한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미국산 쇠고기의 인간 광우병 위험성을 보도하면서 2008년 5월 2일과 5월 3일에는 청계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렸습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사과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재협상을 약속하면서 시위는 잦아들었습니다.

[촛불 시위 진압 위한 '명박산성' 설치]

촛불 시위가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은 세종로 충무공 동상 앞에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명박산성'이라 불리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과잉 진압 논란과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했습니다.

촛불 시위가 격화되면서 청와대로 진입하는 길목에 경찰이 총 60여 개의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하고 서로 용접한 후 바닥에 철심으로 고정시켜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이는 '명박산성'이라 불리며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컨테이너에 인화성 물질인 그리스를 칠하고 그 위에 대형 태극기를 붙였다가 지저분해지자 떼는 등 여러 논란을 빚었습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가 북한군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금강산 관광 중단 및 5.24조치 등 강력한 대북 경제 제재를 취했습니다.

2008년 7월 11일 오전 4시 50분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산관광지구에서 대한민국 국적의 여성 관광객 박왕자가 조선인민군에 의해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명박은 사건 당일 오후에 사건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 예정대로 대북 포용적인 내용의 국회 시정 연설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현대아산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며, 금강산 관광 중단, 5.24조치 실시 등 강력한 대북경제제재를 취했습니다.

['녹색성장' 패러다임 제시]

8.15 경축사를 통해 기존 '747 성장'에서 벗어나 환경을 중시하는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며 '녹색 뉴딜'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2008년 8·15 경축사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기존 '747 성장'에 이어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무조건적인 대기업 프랜들리 성장전략을 사실상 포기하고 미래에 무게중심을 둔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친환경 성장전략을 내세웠습니다. 즉, 단기 고도성장에 대한 집착에서 탈피해 환경을 중시하는 녹색성장은 '온실가스와 환경오염을 줄이는 미래에 무게중심을 둔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신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국가발전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임기 중 마지막 사면 선언]

8.15 사면을 마지막으로 임기 중 사면은 없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건희 회장 및 측근들에 대한 사면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명박은 '부정부패와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하는 등 부패문제를 강조해왔으나, 2008년 8월 12일 8.15 사면을 마지막으로 임기 중 사면은 없을 것이라고 거짓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건희 회장에 대한 단독 사면과 퇴임을 앞두고 측근들을 사면하여 비판을 받았습니다.

[일본 방위백서 독도 영유권 주장 명시]

일본 방위성이 발행하는 방위백서에 4년 연속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이 명시되면서 한일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2008년 9월 1일 일본 방위성이 발행하는 2008년판 방위백서에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일본 측 표기 문제로 한일 관계가 다시 냉각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일본 정부의 주한일본 국방무관을 불러 항의했으며, 일본 방위백서는 2008년까지 4년 연속 '독도는 일본땅'으로 명시하면서 태도를 바꾸지 않아 한일 관계의 잠재적 마찰 가능성이 우려되기도 했습니다.

2009

[비상경제대책회의 설치 및 경제 위기 극복]

글로벌 금융위기 조기 극복을 위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청와대에 설치하고, 매주 주재하며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 공조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9년 1월 8일, 경제위기 조기극복을 위한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청와대에 설치되었습니다. 제1회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열린 이래로 수시로 개최되면서 친서민 소통 창구와 현장대책회의로 운영돼 경제위기 극복에 상당히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성공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며 '위기 통제에 만점을 받아 교과서적인 경제 회복을 이루어낸 국가'라는 평가를 외신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용산 참사 발생]

서울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들이 망루에서 농성하던 중 경찰 특공대 진압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과잉 진압 논란과 함께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3분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6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했습니다.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 명을 투입했으며, 농성자들은 망루를 짓고 인화성 물질과 화염병 등으로 저항했습니다. 1월 20일 오전 경찰 특공대 진압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치적 타살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지지율 하락과 함께 광장 봉쇄 등 정부의 대응에 대한 비판을 촉발시켰습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측근 비리 등으로 수사를 받던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하자 검찰과 정부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는 등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대규모 집회가 될 것을 우려하여 서울광장을 경찰 병력을 이용하여 폐쇄했습니다.

[청계재단 설립 발표]

대선 공약으로 약속했던 재산 사회 환원을 위해 장학·복지재단인 '청계재단' 설립을 발표했습니다. 이 재단은 이명박 대통령 소유의 부동산을 이전받아 장학 사업을 펼칠 계획이었습니다.

2009년 7월 6일 장학·복지재단인 청계재단을 설립하여 일부 부동산과 동산을 제외한 재산의 상당 부분을 재단에 기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식 출범한 청계재단은 330여억 원으로 추정되는 이 대통령 소유의 부동산 소유권을 모두 이전받았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수익으로 장학금을 마련해 어려운 환경의 중, 고교생 200~3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었습니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 합의]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경색되었던 남북 관계가 다소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며 남북 적십자 대표단이 추석 기간 이산가족 상봉을 실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2009년 7월 31일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차 핵실험 이후 처음으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는 민간 단체의 방북을 허가했고, 8월 3일에는 남북협력기금 35억 7,3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후 남북 적십자 대표단은 8월 28일 회담에서 추석 기간 동안 이산가족 상봉을 실시하기로 최종 합의하면서 2007년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황강댐 무단 방류로 인한 임진강 참사]

북한의 황강댐 무단 방류로 임진강에서 참사가 발생하여 6명이 사망했습니다. 북한의 의도적 '수공(水攻)' 주장이 제기되며 남북 관계에 대한 우려가 커졌습니다.

황강댐 무단 방류로 인한 임진강 참사가 발생하자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우려가 생겼습니다. 북한이 남측 인명피해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자 의도적 '수공(水攻)'을 주장하는 강경 기류가 힘을 얻었으며,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의도를 갖고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북측은 10월 14일 '임진강 수해 방지 실무회담'에서 유감을 표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토야마 총리, 한일 정상회담에서 과거사 언급]

한일 정상회담에서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민주당 새 정권은 역사를 직시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며 양국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냈습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내각의 등장으로 외교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중·한일 연쇄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일본 민주당 새 정권은 역사를 직시할 용기를 가지고 있다"라면서 양국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나타냈습니다.

[대청해전 발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입하여 남한과의 해상 교전인 대청해전이 발생했습니다. 이 교전으로 북한 함정은 반파되었고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해군 함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입하면서 남한과의 해상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이 교전에서 인민군의 함정 한척은 반파되었으며, 남한 함정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한 측은 이번 사태에 대한 '사죄'와 '재발 방지 조치'를 요구하며 '군사적 도발 행위를 계속 감행한다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남한을 비판했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한미동맹 강화, 한미자유무역협정 진전, 북핵 문제의 그랜드 바겐 방식 공감 등 양국 간 주요 현안을 논의했습니다.

2009년 11월 19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했습니다. 여기서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 및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의 진전을 위한 노력, 북핵 문제의 그랜드 바겐 방식 공감, 아프가니스탄의 한국군 파병 문제 논의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태권도복을 선물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대선 '권총 협박' 발언 논란]

박근혜 의원에게 지난 대선 때 '권총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청와대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반박하며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2009년 12월 1일 이명박은 박근혜 의원에게 "나도 지난 대선 때 어느 괴한이 권총을 들고 집에까지 협박을 하러 와서 놀란 적이 있는데, 경호원들이 붙잡고 봤더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라고 말해 대통령 후보때 권총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은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이 이를 거짓말이라고 비판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사과를 공식 요구했습니다.

[북한 신종플루 발생 및 한국 정부 의료 지원 의사 표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신종플루 발생을 공식 발표하자, 한국 정부는 타미플루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경색된 남북 관계의 해빙 조짐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2009년 12월 9일 조선중앙통신은 "세계적으로 ‘A(H1N1)형 돌림형감기(인플루엔자)’로 인한 인명 피해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속에 조선의 일부 지역에서도 이 신형 독감이 발생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오셀타미비르 지원 의사를 밝힌 것을 북측이 수용하는 등 남북간의 경색 국면이 풀릴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창원·마산·진해 행정통합 의사 표명]

창원, 마산, 진해 지역이 행정통합 의사를 밝히면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행정구역 통합 및 개편 논의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행정의 질과 효율을 높이기 위해 행정구역 통합 및 개편을 추진했습니다. 창원시, 마산시, 진해시 등의 지역이 2009년 12월 11일에 통합 의사를 밝히는 등 행정구역 통합 및 개편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오자와 이치로, 한국 과거사 사과]

오자와 이치로 일본 민주당 간사장이 방한하여 '일본과 일본 국민으로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있다'며 한국에 대한 과거사 문제에 사과했습니다.

2009년 12월 14일, 일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은 방한한 자리에서 "일본과 일본 국민으로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서 한국에 대한 과거사 문제에 사과했습니다. 이는 이전 자민당 정권과 다른 전향적인 태도로 주목받았습니다.

[일본 교과서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 문부과학성이 독도 영유권을 고수한 고등학교 지리·역사 과목의 새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며, 한국 정부가 '유감'을 표명하는 등 한일 간 외교 갈등이 재점화되었습니다.

2009년 12월 25일에 일본 문부과학성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고수한 고등학교 지리·역사 과목의 새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하자 정부는 '유감'을 표시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가와바타 다쓰오 일본 문부과학대신이 "다케시마(竹島)는 우리의 고유 영토로, 정당하게 인식시키는 것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자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한일본대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 단독 특별 사면]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단독 특별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이건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었으나, '재벌 특혜'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009년 12월 29일 이건희에 대해서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단독 사면을 단행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건희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삼성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면한 것이지만, 정작 이건희는 삼성 특검 당시 배임, 탈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IOC 위원 자격을 박탈당해 사면의 명분조차 사라졌으며, 대한민국 재벌 1위 이건희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010

[청계재단 첫 장학생 선발]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 환원으로 설립된 청계재단에서 첫 번째 장학생 451명을 선발하고 학비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청계재단이 지원하는 장학금은 2010년 초부터 지급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2일 청계재단 첫 번째 장학생 451명(중학생 218명, 고등학생 233명)이 선발되었습니다. 재단은 이들 학생에게 연간 141만원가량의 학비를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천안함 피격 사건 발생]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합동조사단은 북한 어뢰 공격으로 인한 침몰이라고 발표했으며, 이로 인해 남북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인 PCC-772 천안이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해군 병사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침몰 원인에 대해 각기 다른 해석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 전작권 2015년 연기 합의]

캐나다 토론토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을 통해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시점을 2015년으로 연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치였습니다.

2010년 6월 27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으로 연기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작권 연기 결정을 통해 한·미 양국이 기존의 안보 틀 내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줄 것"이라고 말하며 "한미동맹은 한국과 미국의 안보뿐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 불거짐]

MBC PD수첩 보도를 통해 국무총리실의 김종익 KB 한마음 대표 등 민간인 사찰 사실이 드러나며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청와대 개입 의혹과 함께 권력형 게이트 논란이 확산되었습니다.

2010년 6월 29일 MBC PD수첩은 영화 식코의 패러디인 쥐코 동영상을 올렸다는 이유로 2008년 당시의 국무총리실의 조사를 받은 김종익 KB 한마음 대표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사건이 확장되었습니다. 국무총리실은 한국노총 간부도 미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찰 범위에 대한 논란도 불거졌습니다. 이후 청와대가 국무총리실에 대포폰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검찰이 이를 숨기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비판이 거세졌습니다.

[광복절 축사에서 '통일세' 신설 제안]

제65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평화공동체 구축을 위한 '통일세' 신설 방안 검토를 제안했습니다. 이는 남북 관계와 통일 준비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졌습니다.

2010년 8월 15일 광복절 축사에서 이명박은 "통일은 반드시 온다"며 '통일세'를 신설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여당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으며, 민주당은 '남북 관계가 경직된 상태에서의 통일세 신설은 북한을 자극하는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한러수교 20주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아 지난 17년간 한러간 교역량이 52배 증가하는 등 양국 관계가 크게 발전했음을 기념했습니다.

2010년 9월 30일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17년간 한러간 교역량이 52배 증가하는 등 경제적 협력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국내 첫 도입, 현대차 러시아 공장 준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아세안 회의 참석 및 G20 서울 정상회의 협조 이끌어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석하여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0월 29일부터 30일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 관련 회의에 참석해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선진 7개국(G7) 이외 국가 중 최초로 열리는 G20 서울회의에서 G20 비회원국인 아세안 국가들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약속하고 아세안 의장국인 베트남을 공식 초청했습니다.

[G20 서울 정상회의 성공 개최]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환율 전쟁'에 대한 구속력 있는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한국이 세계경제 주도국가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외교적 성과로 평가받았습니다.

2010년 11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양보 없는 다툼 속에 일촉즉발로 치닫던 '환율 전쟁'을 "각국이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한다"라는 구속력 있는 합의를 이끌어 내어 성공적으로 중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10년 국내 10대 뉴스로 선정되었습니다. 외신들 또한 한국이 서울 G20 정상회의로 명실상부한 세계경제 주도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 발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국군 해병대가 즉각 대응 사격에 나섰고, 이 사건으로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여 남북 관계가 극심하게 악화되었습니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연평 부대는 피격 직후 대응 사격을 가하였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전군으로 확대 발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해병대원 전사 2명,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 2명, 중경상 3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 이후 8개월 만에 벌어진 사건으로 이로 인해 남북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2011

[아덴만 여명 작전 성공]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한 '아덴만 여명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해적 8명 사살, 5명 생포 등 단호한 대응으로 국제 사회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삼호주얼리호가 인도양 해역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되자, 정부는 몸값 지불 관행을 깨고 2011년 1월 21일 군사작전을 통해 구출작전(작전명 '아덴만 여명작전')에 나섰습니다. 총격전으로 해적을 제압하고 선박을 장악했으며, 해적 13명 가운데 8명은 사살되고 5명은 생포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해적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선례를 이번에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외신들도 "대담하고도 보기 드문 이 공격이 한국에 깜짝 놀랄 성공을 안겼다"고 평가했습니다.

[일본 대지진 발생, 한국 정부 지원 논의]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인 교민 피해 파악, 일본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 순방 중에도 일본 국민에게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했습니다.

2011년 3월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3월 11일 오후 6시 30분부터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인 교민의 피해 파악, 일본 지원 방안, 이번 사태로 인한 대한민국의 영향 등을 논의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 순방 중에도 3월 13일 아부다비 유전 개발 참여 기자회견 초반에 "일본이 겪고 있는 엄청난 재난에 일본 국민에게 애도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는 입장을 공개 발표했습니다. 또한 소방방재청은 3월 12일 선발대로 119 대원 5명과 개 2마리를 보낸 이후 3월 14일 102명의 대원을 추가 파견했습니다.

[유럽 3개국 순방]

유럽 3개국(독일, 덴마크, 프랑스)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독일에서는 통일 염원, 덴마크에서는 '녹색성장 동맹' 체결, 프랑스에서는 G20 정상회의 협력 등 다양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2011년 5월 8일부터 6박 7일 일정으로 유럽 3개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방문국인 독일에서는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에 대한 준비를 잘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 방문국인 덴마크에서는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녹색성장 동맹'을 체결했는데, 우리나라가 안보 외의 분야에서 외국과 동맹을 체결한 것은 처음입니다. 마지막 방문국인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지난해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의장국이었던 한국과 올해 의장국인 프랑스와의 긴밀한 공조 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일본 의원 독도 방문 시도 저지]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도 방문을 시도했으나,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로 입국이 불허되었습니다. 이는 한일 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2011년 8월 일본 자민당 의원 3명 등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대한민국 독도를 방문하고자 입국을 시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을 성의를 다해 돕는 등 우호적인 한일 관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권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내세우며 도발적인 행위를 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공항에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사전 입국 불허 방침에 따라 출입국 심사대 앞에서 돌려 보내졌습니다.

[무역 1조 달러 달성]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며 경제 대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무역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룬 쾌거였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 2011년 12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번째 무역 1조 달러 달성의 신화를 썼습니다. 아울러 2012년에도 2년 연속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무역이 줄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역 1조 달러 클럽 진입에 성공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으며 미국, 독일, 일본과 같이 주로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들이 달성한 위업을 세계 9번째로 달성했습니다.

2012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목표로 세종특별자치시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옛 충청남도 연기군 등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만들어진 단층제 자치단체입니다.

2012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했습니다. 옛 충청남도 연기군 전체와 공주시 일부, 충청북도 청원군 일부를 편입하여 만든 것으로, 이름은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에서 따왔습니다. 하위 행정구역에 시군구를 두지 않는 단층제 자치단체이므로 기초자치단체의 기능을 병행하는 광역자치단체입니다.

[국가원수 최초 독도 방문]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여 '대한민국의 동단을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는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8월 이명박은 독도를 방문했습니다.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이었고,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남단은 마라도, 서해에는 백령도가 가장 끝"이라 말했으며 "동해 동단에 있는 게 독도인데 동단을 잘 지켜달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환경이 파괴되지 않도록 친환경적으로 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독도는 자연 그대로 잘 지켜야 한다. 경비도 해야 하지만 환경도 잘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2013

[제17대 대통령 임기 만료 및 퇴임]

제17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로 돌아가며 5년간의 대통령직을 마무리했습니다. 그의 공식 임기는 다음날 자정까지였습니다.

2013년 2월 24일, 이명박은 17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사저로 돌아갔습니다. 이명박의 공식적 임기는 2월 25일 자정까지였습니다. 그의 후임으로는 같은 당의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내곡동 사저 의혹으로 고발]

참여연대에 의해 내곡동 사저 의혹과 관련,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되었습니다. 퇴임 직후부터 법적 공방에 휘말렸습니다.

2013년 3월 5일, 이명박은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되었습니다. 참여연대는 이명박을 내곡동 사저 의혹과 관련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으며, 이 전 대통령이 사저부지 매입 과정에서 국가 예산에 손해를 입히도록 지시하거나 방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캄보디아 총리 경제고문 재임명]

캄보디아 훈 센 총리가 이명박을 자신의 경제고문으로 다시 임명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명박은 이미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훈 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캄보디아 훈 센 총리는 이명박이 그의 경제 고문이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훈 센 총리는 전국녹색성장위원회 출범식에서 "이제 한국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시 나의 고문이 됐다"면서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나의 고문이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명박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훈 센 총리의 경제고문을 한 번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2014

[새누리당 권리당원 자격 말소]

당비를 내지 않아 새누리당 권리당원 자격이 말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2014년 7월 14일 전당대회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퇴임 후 당비를 내지 않아 2014년 7월 14일에 있는 새누리당 전당대회 때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권리당원은 월 2000원의 당비를 매달 납부해야 하는데 납부가 되지 않아 권리당원 자격이 말소된 일반 당원이 된 것입니다.

2017

[새누리당 탈당]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과 맞물려 보수 진영의 혼란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2017년 1월 1일 이명박은 새누리당을 탈당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습니다.

2018

[검찰, 구속 영장 청구]

검찰은 뇌물수수, 횡령, 배임, 조세포탈 등 혐의로 이명박에게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이는 다스 실소유주 의혹 등 오랜 기간 제기된 의혹에 대한 수사 결과였습니다.

2018년 3월 19일 검찰은 뇌물수수, 횡령, 배임, 조세포탈 등 혐의로 이명박에게 구속 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이는 다스 실소유주로 349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소송비 119억 원을 삼성전자가 대납받는 등 혐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구속 및 서울동부구치소 수감]

뇌물수수와 다스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는 헌정사상 네 번째로 부패 혐의로 구속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018년 3월 22일 오후 11시 6분께 서울중앙지검이 청구한 이 전 대통령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대한민국 헌정사상 네 번째로 부패 혐의로 구속된 대통령으로 남게 됐습니다.

[지병으로 서울대병원 입원]

구속 4개월 만에 당뇨 및 수면 무호흡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건강 문제를 호소했으나 특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외부 진료를 거부해오다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재판에서 건강 문제를 호소했으나 '특혜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며 외부 진료를 거부해왔습니다. 그러나 2018년 7월 30일 구속 4개월 만에 당뇨 및 수면 무호흡으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검찰, 징역 20년, 벌금 150억 원 구형]

다스 실소유주로 349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검찰이 징역 20년, 벌금 150억 원을 구형했습니다.

2018년 9월 6일, 다스 실소유주로 349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검찰이 징역 20년 중형에 벌금 150억 원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은 이명박이 다스를 실소유하고 차명 계좌를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보았습니다.

[1심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 선고]

1심 재판에서 16가지 공소사실 중 7가지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을 선고받았습니다. 법원은 다스가 이명박의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2018년 10월 5일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16가지 공소사실 중 7가지를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15년, 벌금 130억 원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다스는 이명박의 것이라고 판단되며, 이는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범죄였다"고 판시했습니다.

2020

[항소심에서 징역 17년 구형 및 재구속]

항소심 공판에서 징역 17년형이 구형되며 다시 구속되어 6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는 1심보다 형량이 높아진 것이었습니다.

2020년 2월 19일 항소심 공판에서 징역 17년 구형으로 다시 구속되어 6일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무죄로 판단된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여 형량을 높였습니다.

[대법원 징역 17년형 확정 및 대통령 예우 박탈]

대법원에서 징역 17년, 벌금 130억 원, 추징금 57억 8천여만 원의 원심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모두 박탈되었습니다.

2020년 10월 29일 대법원이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 원, 추징금 57억 8천여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이명박의 징역형이 확정되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연금 수령, 비서관 지원, 기념 사업 등 예우가 모두 박탈되었습니다.

[안양교도소에 재수감]

징역 17년형이 확정된 후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안양교도소에 재수감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씁쓸한 결말이었습니다.

2020년 11월 2일 이후로 징역 17년형이 확정된 이명박은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안양교도소에 재수감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사회적 경력의 사실상 최종적인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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