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 작가, 사회 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12:48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작가, 사회 운동가입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하며 투옥된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 사회 비판적 시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생명 사상'을 제창하며 새로운 사상적 전환을 모색했습니다. 말년에는 정치적 행보와 발언으로 '변절 논란' 등 여러 논쟁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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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1941년 2월 4일, 김지하(본명 김영일)가 전라남도 목포에서 아버지 김맹모와 어머니 정금성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김해 김씨 경파 24세손입니다.
1954
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김지하는 아버지를 따라 원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원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합니다.
1964
[6.3 사태 참여 및 투옥]
6.3 사태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판단하고 학생 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한일회담이 굴욕외교회담이라 판단한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후배 김덕룡, 고려대의 이명박, 이재오 등과 함께 6.3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앞장섰다가 체포된 그는 투옥되어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1966
[서울대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김지하는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사회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김지하는 재학 중 4.19 혁명, 5.16 군사정변, 6.3 사태 등을 겪으며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으며,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969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지하'(地下)라는 필명을 사용했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김지하(金芝河)라 하게 되었습니다.
1970
['오적' 발표 및 투옥]
정치인,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시 '오적'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는 '오적 필화 사건'으로 불립니다.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은 '오적 필화 사건'으로 불리며, '사상계' 5월호에 실렸다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실리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100일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1973
1973년 4월, 김지하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을 통해 김원보, 김세희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1974
[민청학련 사건 연루 및 사형 선고]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74년 4월,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975
1975년 2월,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같은 해 3월 13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다시 구속되었고, 이후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이 추가로 선고되었습니다.
1980
1980년 12월, 김지하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긴 투옥 생활을 마쳤습니다.
1985
1985년, 김지하는 미국 사회연구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91
['죽음의 굿판' 칼럼 발표]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는 글을 발표하여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학생들의 죽음을 비판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91년 5월 5일,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사망 이후 분신·투신 정국이 전개되던 상황에서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학생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하며 생명 존중심에서 나온 비판이라 해명했으나,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는 결과를 낳아 많은 비난과 원성을 사게 되면서 '변절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2001
[박정희 기념관 반대 시위 참여]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요청으로 서울 시청 앞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1인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김지하는 2001년 5월 4일 서울 시청 앞에서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 등과 함께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이는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2012
[박근혜 대선 후보 지지 선언]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다시 한번 정치적 행보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2012년 11월 6일, 김지하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대선 후보를 비난하고 백낙청, 리영희 교수를 매도하는 발언으로 인해 인터넷에서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나팔수가 됐다"는 비판을 받으며 '변절 논란'이 심화되었습니다.
2013
[민청학련 사건 재심 무죄 선고]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국가보안법상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2013년 1월 4일,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국가보안법상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상금을 받으려 재심을 신청했다. 완전히 무죄를 선고하지 않은 이유는 돈을 적게 주려는 것"이라며 1월 10일 재심판결에 항소했습니다.
2022
2022년 5월 8일, 김지하 시인이 강원도 원주시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미발표 시 8편 공개]
서울 천도교 대교당에서 열린 49재 추모문화제에서 임진택에게 희곡 대신 건넨 미발표 시 8편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2022년 6월 25일, 서울 삼일대로 천도교 대교당에서 김지하 시인의 49재 추모문화제가 열린 자리에서 시인의 미발표 시 8편('교감', '헌화', '열리리', '심화', '사랑은 공경', '처용', '살아라', '하늘세계')이 공개됐습니다. 이 시들은 1999년 문화계 후배 임진택에게 희곡을 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대신 건넨 작품들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