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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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로서, 일제강점기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습니다. 해방 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6.25 전쟁을 주도하여 한반도에 큰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전후 복구와 주체사상을 통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고, 수많은 정적을 숙청하며 인권 탄압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말년에는 개혁 개방을 시도하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사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며 우상화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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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12

[김일성(김성주) 출생]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의 외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삼형제 중 맏아들 김성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생가로 알려진 평양 만경대 고향집은 조부모가 살던 집입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의 외가에서 김형직과 강반석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으며, 생가로 알려진 평양 만경대 고향집은 실제로는 조부모가 살던 집이었습니다. 그의 외가는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으며,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 장로였습니다. 그의 부모님 역시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1919

[만주 이주 및 소학교 입학]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 지린성 푸쑹현으로 이사하며 팔도구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내게 됩니다.

1919년 여덟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 지린성 푸쑹현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이후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잠시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1925

[칠골 떠나 만주 귀환 및 방황]

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골을 떠나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길림 육문중학교에 진학했으나, 부친 김형직이 사망하면서 불안정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925년 초, 김일성은 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골을 떠나 만주로 돌아갔습니다. 푸쑹 소학교를 졸업한 후 길림 육문중학교에 진학했으나, 1926년 15세의 나이에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하면서 편모 슬하에서 안정된 생활이 어려워 학교를 자주 옮기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중학교 재학 중 성적은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26

[타도제국주의동맹 조직 주장 (회고록)]

김일성 회고록에 따르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했다고 주장됩니다. 이 주장은 그의 청년기 항일 활동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1926년 후반에 화성의숙을 다녔고, 그해 10월 17일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했다고 주장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의 청년기 항일 활동 중 하나로 북한에서 중요하게 선전되는 사건입니다.

1929

[조선공산청년회 가입 및 학교 퇴학]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이 퇴학은 북한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김일성의 최종 학력으로 기록됩니다.

1929년 5월,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일경에 적발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유원중학교 중퇴를 김일성의 공식적인 최종 학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김일성은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 3월에는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의 지부동맹조직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1931

[항일 무장 단체 활동 중 체포 및 투옥]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가 해체된 후 세화군 군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나, 곧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때 얼마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30년 8월, 이종락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대원으로 가담했으며,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세금 징수원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최형우가 그에게 '일성'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1931년 1월 이종락이 체포된 후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해체되었고, 김일성은 3월 23일 세화군 군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불과 사흘 뒤인 3월 26일경 체포되어 길림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5월에 길림성 정부로 이송되었습니다.

1932

[조선혁명군 소대원 살해 및 무기 탈취 논란]

무송에서 또래들을 모아 활동하다 조선혁명군 소대원 10명을 살해하고 무기를 탈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항일연군의 범죄 행위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의지할 곳을 잃은 김일성은 무송으로 돌아가 장아청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인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의 요청으로 조선혁명군 측이 제압을 요청했고,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 소대장 이하 10명이 무송으로 파견되었으나, 김일성 일당은 이들을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 중대의 무기를 빼앗아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후일 항일연군의 범죄 행위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1936

[보천보 전투 지휘 (논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으로서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고 주장됩니다.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유일한 영토 탈환 사건으로 선전되지만, 실제 피해 규모와 김일성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1936년 7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19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고 주장되는데, 북한에서는 이 사건을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선전합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민간인 2명이 사망했고, 이어진 일본 경찰 추격대와의 충돌에서 항일연군 측의 피해가 컸습니다.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은 민간인 2명이 사망한 반면, 동북항일연군은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되어 조직이 궤멸 위기를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보천보 사건의 실제 주역인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다른 인물이며, 북한 김일성(김성주)은 이 이름을 도용했다는 '김일성 가짜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1940

[소련으로 도주 및 소련군 복무 시작]

일제의 토벌에 쫓겨 상관 위증민의 허락 없이 부하들과 함께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습니다.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었으나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고, 이후 소련군 88여단에서 복무하게 됩니다.

일제의 토벌이 계속되자 김일성은 상관인 위증민의 허락 없이 1940년 10월 23일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소만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했습니다. 국경수비대에 체포되어 한동안 투옥되어 조사를 받다가, 2로군 총사령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이후 보로쉴로프 근처 남야영에 수용되었으며, 1941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1942년 7월에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창설된 소련 극동군 제88독립보병여단(88여단)으로 이주하여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때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NKVD 비밀 요원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45

[소련으로부터 조국 귀국]

소련군 88여단 소속 항일유격대원들과 함께 하바로프스크를 출발,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을 통해 조국으로 귀국했습니다. 당시 소련군 육군 대위 자격이었습니다.

1945년 8월 초, '조선공작단' 결성에 참여했으며,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1945년 9월 중순 하바로프스크를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사흘 뒤인 9월 22일 평양에 도착했으며,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 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습니다. 당시 평양지구위수사령부 부사령관직을 맡았습니다. 국내에 아무 기반도 없던 그는 본명 김성주 대신 가명 김영환을 쓰다가, 대중 앞에 나선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취임]

소련 군정의 지도를 받아 북조선 5도행정국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 위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하고, 동시에 행정부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45년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로 취임하여 당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소련 군정의 지도를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 5도행정국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 위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선출되었습니다. 이로써 김일성은 당과 행정부를 동시에 장악하게 되었으며, 사실상의 단독 정부 기능을 하는 기관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친일 잔재 청산, 토지 개혁, 중요 산업 국유화 등을 골자로 하는 11개조 당면 과업 및 20개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1948

[조선인민군 창설]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고,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했습니다. 총사령관은 최용건이었으나 실질적인 최고 통수권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

1948년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키고 그 창설에 참여했습니다. 공식적인 총사령관은 최용건이었으나, 실질적인 최고 통수권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 이는 북한이 단독 정부 수립 의사를 굳히고 군사적 준비를 본격화했음을 보여주는 조치였습니다. 3월에는 김구의 남북협상 제안을 수용했고, 4월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1949

[스탈린과의 회담 및 남침 문의]

박헌영과 함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 문제를 문의했으나, 당시에는 군사력 우위 확보를 조건으로 공격을 만류당했습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했습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했습니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하며, 당시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소 간 38선 분할 합의가 있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한의 평화적 통일안 거부를 이유로 대남 공격 준비 필요성을 계속 주장했습니다.

1950

[6.25 전쟁 발발 및 최고사령관 취임]

소련의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을 설득해 승인을 받아 대한민국을 갑작스럽게 공격하며 한국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여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1950년 1월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끈질기게 남침 허락을 요구했습니다.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으로부터 통일 과업 개시 동의를 얻었으나 중국과의 공동 결정을 조건으로 했습니다. 5월에는 박헌영과 함께 마오쩌둥을 면담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미군 개입 시 중국 지원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을 갑작스럽게 공격하며 한국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김일성은 전쟁과 동시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여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전쟁 초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진격했으나, 유엔군의 개입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평양을 탈환하는 등 전쟁은 3년간 이어졌습니다.

1953

[한국 전쟁 휴전 및 정적 숙청 시작]

한국 전쟁이 휴전되면서 휴전선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전쟁 실패의 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려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3년간의 한국 전쟁이 휴전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휴전선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과업 성취 실패로 궁지에 몰리자 전쟁 실패의 책임을 부총리 박헌영 등 정적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이미 전쟁 전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했으며, 전후에는 박헌영의 남로당파를 시작으로 김두봉의 연안파, 허가이의 소련파, 김원봉 계열, 김두봉 일파, 최창익의 연안파, 박금철의 갑산파 등 김일성 직계 빨치산파를 제외한 다른 공산·사회주의 계파 인물들을 차례로 숙청, 제거하며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습니다.

1957

[전후 복구 '천리마 운동' 실시]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집단적 증산운동인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습니다. 1957년부터 전후 복구를 위한 집단 증산운동인 '천리마 운동'을 실시했습니다. 본래 1956년 시작 예정이었으나 내부 반대파 숙청 뒤 본격화되었으며 1960년 12월 강선제강소 방문을 통해 독려했습니다.

1960

[주체사상 확립]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김일성 개인 우상화와 1인 독재 체제 강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은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하고 이를 국가이념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는 동시에, 김일성 개인 우상화와 1인 독재 체제 강화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하여 사상 변화의 여지를 극도로 좁히고 민주화 운동과 시민 의식을 저하시키며 생산력 저하 문제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주체사상은 김일성 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1968

[자신의 생일 '태양절' 지정 및 우상화 본격화]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며 우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이는 김일성 개인 숭배 현상의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한 '1·21 사태'를 일으킨 후, 같은 해 4월 15일 자신의 생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며 우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이후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이 전 사회적으로 통용되었고, 김일성의 혁명 활동에 대한 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개인 숭배 현상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는 김일성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후 1997년에는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주체연호'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1972

[국가주석 취임 및 헌법 개정]

새로운 사회주의헌법 채택에 따라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꾸고 1인 독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1972년 5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발표하고, 7월 4일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박정희 정권과 남북 문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고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김일성 중심의 1인 독재 체제를 법적으로 공고히 하는 조치였습니다. 국가주석 취임 이후에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 사업을 추진하며 군비를 증강했습니다.

1980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 제안]

공식 성명을 통해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남북 간 대화 모색의 일환이었으나, 실제로는 정권 안정을 위한 정치적 제스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1980년 5월 동유럽을 순방하고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되었습니다.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지시하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제안과 맞물려 1985년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남북 경제회담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고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파견하여 논의를 타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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