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군사 사건, 침투, 암살 시도, 남북 관계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8- 15:31:32
1968년 북한 124부대가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서울에 침투하여 발생한 무장공비 침투 사건. 군경과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 사건은 향토예비군 창설과 같은 한국 안보 정책의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남북 간의 극한 대결 양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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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베트남 전쟁 확대와 한국군 파병 요청]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며 한국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한국군의 전력 약화로 이어지며 1·21 사태의 배경 중 하나가 됩니다.
1964년 8월 7일,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 참전하면서 동맹국인 한국에도 참전을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었고, 국내 방위 전력의 일부 약화는 북한의 대남 공작 활성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65
[한국,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 파병 개시]
한국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 파병을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 방위 전력이 일부 약화되면서 북한의 도발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5년 7월부터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평균 5만 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총 32만 명의 누적 파병 인원을 기록했지만, 이는 국내 방위 전력의 약화로 이어져 북한이 대남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967
[북한, 한국 해군 경비함 56함 격침]
북한이 동해에서 어로보호 작전 중이던 한국 해군 경비함 56함을 해안포 공격으로 격침시켰습니다. 이는 북한의 대남 도발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67년 1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한국 해군 650톤급 경비함 56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을 받아 침몰했습니다. 이 사건은 북한이 대남 공작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비무장지대 도발과 어선 납치 등을 일삼던 시기에 발생한 대표적인 무력 도발 사례 중 하나입니다.
[북한, 대남 게릴라 특수부대 124부대 창설]
북한이 대남 적화 공작을 위한 게릴라전 특수부대인 124부대를 창설했습니다. 이 부대는 훗날 청와대 습격을 계획하게 됩니다.
1967년 4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게릴라전 특수부대인 124부대가 대남 적화 공작을 위한 유격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창설되었습니다.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산과 상원 일대의 기지에서 적배치상황이론,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1968
[1·21 사태 이후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등 창설]
1·21 사태를 계기로 국가 안보 강화를 위해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684부대 등이 창설되고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등 전반적인 안보 강화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1·21 사태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며 대대적인 안보 강화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비밀 특수부대인 684부대가 창설되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의무화되었습니다. 또한 대통령 경호 강화를 위해 인왕산, 북악산, 청와대 앞길 등의 일반인 통행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북한 124부대에 청와대 습격 및 요인 암살 지령 하달]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가 124부대에 청와대 습격과 대통령 박정희 요인 암살을 최종 지령했습니다. 31명의 특공대가 남파 준비를 마쳤습니다.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 미대사관, 육군본부 등 주요 시설 습격 작전 준비 지시가 내려졌고, 이후 황해도 사리원에서 습격 훈련을 거쳐 1월 13일, 최종적으로 청와대 습격과 대통령 박정희 암살이 목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정찰국장 김정태가 전원 함경도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남파 특공대 31명에게 직접 지령을 하달했습니다.
[북한 124부대 무장공비, 휴전선 침투 시작]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무장한 북한 124부대 특공대 31명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로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1월 17일 새벽, 북한 124부대 소속 특공대 31명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개성을 출발,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습니다. 미2사단과 25사단의 전투지경선상 철도망을 절단한 후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너 문산 부근의 파평산, 진관사, 삼각산의 승가사를 거쳐 서울로 잠입했습니다.
[북한 124부대, 청와대 기습 실패 및 총격전 발생]
북한 124부대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500m 앞까지 진출했으나, 창의문 부근에서 경찰의 불시 검문에 불응하며 총격전이 벌어졌고 기습은 실패했습니다.
1968년 1월 21일 밤 9시 30분경, 청와대 앞 500미터 지점인 서울 청운동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 부근에서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무장공비들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이에 공비들은 수류탄과 기관단총을 쏘며 격렬히 저항했고, 총격전 끝에 도주하기 시작하며 청와대 기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유일한 생포자 김신조,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 증언]
군경 합동 소탕작전 중 유일하게 생포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침투했다고 밝혀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1968년 1월 22일 오후 7시, 군경 합동 소탕작전 중 유일하게 생포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가 육군방첩부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그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증언하며 북한의 청와대 기습 및 요인 암살 계획을 명확히 밝혔고, 이는 당시 한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북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1·21 사태 발생 이틀 뒤, 북한이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며 한반도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은 1·21 사태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원산 앞바다에서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1·21 사태와 더불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를 극도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촉발했습니다.
[1·21 사태 무장공비 소탕작전 공식 종료]
청와대 기습 무장공비들에 대한 군경 합동 소탕작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침투한 공비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 도주, 1명 생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68년 1월 31일, 도주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경기도 일원의 군경 합동수색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침투한 무장공비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 유일하게 김신조 1명만이 생포되며 1·21 사태의 직접적인 소탕 작전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1972
[김일성, 1·21 사태 북한 소행 시인 및 사과]
김일성이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비밀회담에서 1·21 사태가 북한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의 소행이었음을 시인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1972년 5월 4일, 김일성은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비밀회담에서 1·21 사태가 자신이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고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라고 시인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이는 북한이 그동안 사건 관련성을 전면 부인해왔던 것과는 상반되는 내용으로, 향후 남북 관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3
[김일성의 1965년 제2차 한국전쟁 계획 문서 공개]
중국 인민대학 교수가 평화문제연구소 기념식에서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청샤오허 중국 인민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를 공개했습니다. 이는 북한의 대남 전략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