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 정치인,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1-08- 20:07:10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독립운동가이자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인입니다. 영국 유학 후 서울시장,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민주당 구파의 핵심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대통령직을 유지하며 군부와 대립했고,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확고한 원칙주의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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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윤보선 출생]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중추원 의관 윤치소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 윤두수의 후손이며, 대한제국 명문가의 자제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해위 윤보선은 1897년 8월 26일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마을(현, 아산시 둔포면 신항1리 143-1)에서 중추원의관 동야 윤치소와 중추원의관을 지낸 전주이씨 이재룡의 장녀인 이범숙의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유아기를 잠시 한성부에서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선조는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였고, 할아버지 윤영렬과 종조부 윤웅렬은 당대의 고관이었다. 대한제국 시대 말기 개혁자 윤치호는 윤웅렬의 아들로 그의 당숙이었다.
1907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이 일어났을 때는 스스로 작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기도 했다. 이 때 그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엿듣고 한국이 일본에 진 국채를 갚기 위해 노력하나 조선 조정의 재정이 딸리므로 국민의 헌금을 바란다는 것이 보도된 이후, 국민 전체가 그 헌금을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벌였다는 것을 들었다. 어린 그는 헌금운동에 참여하고자 점심을 절식하고 그 값을 돈으로 타낼 작정을 하였다가 할머니와 어머니가 염려하게 하였다.
1913
[일본 유학 시작]
소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의 게이오 의숙과 정칙 영어 학교에서 수학하며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반일주의자가 되었습니다.
1913년 윤보선은 소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로 건너가 중학교이던 스키치의 게이오 의숙에 입학했다. 그는 게이오 의숙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2학기를 배우고 그만두었다. 모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토 히로유키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그는 신념적으로 반일주의자, 반사회진화론 주장자가 되었다. 또한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사상은 비인간적인 견해라며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군주나 통치자가 아버지이고 백성, 국민은 자녀라는 주장에도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1913년 일본 세소쿠가쿠엔 고등학교 정칙 영어 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1915
1915년 일시 귀국하여 민영환과 6촌인 민영철의 딸 여흥 민씨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15년말 게이오 의숙 2학년을 중퇴하고 부산항을 통해 되돌아왔다.
1917
[중국 상하이 망명 및 독립운동 투신]
여운형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신아동제사 및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귀국해 일본에서 돌아온 여운형을 만난 걸 계기로 여운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화민국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7년봄 상하이 도착 후 며칠뒤 항주에 요양중인 신규식을 찾아 갔다. 이후 신석우, 박찬익, 이시영, 이동녕 등 임정 요인들을 찾아가 다시 이들의 소개로 중국혁명의 중진들을 소개받았다. 상하이의 중국인 강도와 조선인 강도들의 존재를 염려한 신규식은 자신의 집, 상하이시 어양리 5호에 있는 집 2층 다락방을 마련하여 그의 거처로 주었다. 1921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어양리 다락방에서 생활하였다. 1917년 신규식이 1912년에 설립한 신아동제사의 회원이 되었다. 이어 신규식, 김규식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도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했다.
1919
[임시정부 거사자금 운반]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국내 잠입을 계획, 일본을 거쳐 동생 윤완선을 통해 국내 사재 3천원을 조달하여 상하이로 귀환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1919년 여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모금해오라는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국내 잠입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규식은 국내에 있던 이상재, 윤치호, 윤치소 등에게 자금을 보내달라고 연락을 띄웠고, 이들은 윤보선의 동생 윤완선 등에게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을 거쳐서 도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으나, 노선을 바꾸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하기 직전 그는 중국 법무장관 서겸이 주일 중국대사 앞으로 쓴 소개장을 받고 서겸의 조카이자 일본으로 유학하는 중국인 유학생으로 가장하여, 변장 후 일본 경찰들을 피해 배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 갔다. 국내에 잠입하면 신분노출을 우려해 비밀리에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재일본 중국 기독교 청년회 간부 집에 은신하며 동생 윤완선과 접촉,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활동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국내로 잠입한 윤완선은 집안의 사재 3천원의 자금을 마련해 왔고 윤보선은 이 자금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하였다.
자금을 싣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1919년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다시 피선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연령 미달로 의정원 의원 피선거자 자격이 없었으나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승인으로 20대 초반에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임시의정원 최연소 의원 선출]
21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특별 선출되어 최연소 의원이 되었습니다. 선배 독립운동가들의 지지로 피선거권을 관철했습니다.
1919년 3월 13일 그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에 특별 선출되었다. 당시 의정원 규약에는 '만 23세 이상의 한국인 남녀는 의정원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규정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는 것을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규식, 김규식, 여운형 등은 나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의정원 의원 피선거권을 관철시켰고, 심사 끝에 그는 경기도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21세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들 중 최연소자였다.
1920
1920년 10월부터는 신규식이 1917년부터 창간하던 주간잡지 《진단》지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진단에는 장졔스, 쑨원, 천두슈 등 중국 명사들의 칼럼과 논문, 기행문 등도 수시로 발표되었다. 영국 출국 전까지 신규식의 진단지 발간과 편집일도 도와주었다.
1921
상하이 생활 3년 만에 중국을 떠나 영국으로 유학하였다. 1921년 6월 경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소지하고, 중국인 유학생들 틈에 끼어서 프랑스 배로 출항하였다. 이때 선상에서 임정 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인들의 승선을 눈치챈 일본 관헌들이 호출해 중국언어로 대화하라고 시켰고. 윤보선은 간단한 단어로 대답하여 중국인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이동휘의 정체가 탄로나 하선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1930
윤보선은 1930년 12월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과에서 고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2
유럽을 여행하며 지내던 그는 생활비가 떨어지자 1932년에 귀국했다. 귀국 이후 그는 조용히 지냈다. 그의 생활은 대부분 조부모에게 문안 인사하러 찾아오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았고, 안국동 집밖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인물로 분류된 그는 일본경찰이 찾아와 그의 동향을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 고개를 숙이고 한시간, 두시간, 일본경찰이 자리를 뜰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켰다. 일본인형사는 그를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였다.
1937
1937년 아내 여흥 민씨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10년 이상 재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감리교 신자임을 들어 참배를 거부했다.
1940
1940년 1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도 그는 성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부친과 숙부들의 설득에도 고집을 부렸던 그는, 당시 그는 아내와도 사별한 상태였고 딸만 두 명 있었으므로 자녀들에게 가해질 불이익 같은 것에 쉽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다.
1945
1945년 8월 16일 그는 이인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국민당은 다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과 통합해 조선민족당이 되고 9월에 조직된 한국민주당에 흡수된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본 천두슈계의 중국 공산당을 목격한 적이 있어 평등주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 참여]
송진우의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 참여 후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위원으로 참여, 자택을 당 회합 장소로 제공하여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에 1945년 9월 16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보선은 집과 기타 비용을 제공했고, 한민당의 회합은 윤보선의 집에서 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회합장소였던 그의 안국동 사저는 안동궁 또는 안동장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한민당 총무 선출에서 떨어지자 한민당은 그를 한민당 서울시지구당을 맡겼다. 이후 그는 한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한민당 서울시당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8
[제2대 서울특별시장 취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제2대 서울특별시장으로 임명되어 문맹퇴치,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 개선 등 다양한 시책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서울시의 청결을 위해 노력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48년 12월 윤보선은 서울특별시장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다. 허정이 각의에 의해 서울시장 임명을 전해오자, 그는 서울특별시장 서울시장직을 피하려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별장에 은둔하였으며, 이를 피하려 했으나 신문을 보고 서울시장 발령소식을 접하였다. 윤보선은 당시 대한민국 내무부 내무부장관으로 있던 삼촌 윤치영과의 관계를 고려, 시장직을 피하려 하였으나 숙질간일지라도 공과 사는 구별되는 것이니 구애받지 말라는 권고를 받고 서울시장으로 부임하였다. 신문기사에 서울시장 임명 기사를 보고 마지못해 내려와 서울특별시장직에 취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2대 서울특별시장 서울 시장을 지낼 때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 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 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등의 시책을 벌였다. 각 자치구 단위로 쓰레기를 수거하여 성과가 좋은 구에 포상을 내렸다. 동시에 시내 방역 소독 활동 역시 적극 추진하고 일일이 보고받고, 위생상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청소상태 등을 직접 점검하여 청소시장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49
서울특별시장 재직 중 공덕귀와 재혼하게 되었다. 어머니 윤명사 가 덕수교회 목사 최거덕에게 아들의 혼사를 부탁하자, 최거덕 목사는 다시 한신대학교 한국신학대학장 송창근을 통해 공덕귀와 중매를 섰다. 안동교회는 윤치소 등이 주도로 설립한 교회였다. 공덕귀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의 만류로 중단하고, 윤보선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혼수는 최 목사 사저에서 마련했고, 결혼식은 1949년 1월 6일 윤보선의 안국동 집에서 함태영 목사의 주례하에 간소하게 했다.
[상공부 장관 취임]
이승만의 거듭된 제안 끝에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했으며,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는 등 모범을 보였습니다.
1949년 6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전임 임영신 장관이 상공부내의 유력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일로 뇌물수수의 누명을 쓰고 물러났으므로 윤보선은 상공부장관직을 거듭 고사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임영신이 독직, 뇌물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아무도 상공부장관직에 쉽게 앉으려 하지 않았고, 윤보선 역시 누차 사양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그에게 상공부장관직을 임명하고 허정을 통해 통보하였다. 부인 공덕귀는 '나는 어디 갔다 오다가 벽보를 보게 되었는데 "상공장관 윤보선"이라는 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하였다. 거듭된 정부의 요청에 공석으로 둘수 없다고 본 그는 상공부장관으로 취임하였다.
1950
[상공부 장관직 사임]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경질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다가 독단적인 국무회의 운영에 흥미를 잃고 장관직을 사임, 이후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상공장관이 되던 날 가족들을 모아놓고 "누구든 이권 운동을 한다면 나는 이 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장관직에 임했다. 그는 상공부 장관으로 출근하던 날부터 도시락과 함께 손 씻을 비누까지 싸들고 갔다. 그는 아내 공덕귀에게 부탁하여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고, 누구에게도 식사 대접 한번 받지 않는 고집을 보였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라고 밝혔으며, 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라고 회상했다. 상공부 장관 재직 중 두 가지 문제로 이승만과 갈등하게 되었다. 고무조합 배정사건과 경전사장 이태환 경질문제였다. 이승만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던 그는 이승만의 독단으로 국무회의가 공전하자 흥미를 잃어오던 그는 1950년 5월 9일 상공부 장관직을 사임하였다. 장관직은 5월 10일 국회에서 사직처리되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취임]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의 권유로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주로 상이군경과 전재민 구호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던 이승만은 윤보선에게 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으라고 했다. 1950년 11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막심하여 주로 상이군경과 일반 전재민의 구호물자 공급,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관계 일에 주력했다.
1952
[부산정치파동과 이승만과의 결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의 독재 강화에 대한 반감을 품고 정치적 결별을 선언, 이후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했습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윤보선에 의하면 '이 대통령의 독재가 강화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한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개정이란 당치도 않은 억지를 써서 독재의 뿌리를 내리려 하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라는 평을 내리기로 했다. 결국 그는 이승만과의 오랜 감정대립 끝에 결국 그와 결별하였다. 1952년 9월 1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사직했다.
1954
[제3대 민의원의원 당선]
서울 종로갑구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1954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울 종로구 종로갑구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는 종로 갑구에서 처음 출마했기 때문에 무척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순천씨가 여성이어서 전 유권자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동정표를 몰아줄 것인데 남자는 12명이나 되니 절대 불리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일찌감치 당선자를 예상하기도 했다.
1955
[민주당 창당 참여]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 의원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당내 신구파의 지지를 받으며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1955년 9월 18일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이 창당된 후, 그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이어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중앙당 의원부장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김도연,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5년 11월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뚜렷하게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야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당내 신구파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내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0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내각책임제 하의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민주당 구파와 신파 모두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960년 제4대 민의원은 의원내각제 및 양원제를 골자로 한 대한민국 헌법 제4호 제2공화국 헌법을 통과시켰다. 윤보선은 새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7월 29일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제5대 민의원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를 두고 '원내활동도 적고 또 야당 의원이라 선거구를 위해 해준 일도 별로 없는데 구민들의 지지와 동정이 컸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 해 8월 12일 민의원, 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재적의원 263명 중 208명의 지지를 얻어 29표를 받은 김창숙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내각책임제 개헌 뒤 실권자가 국무총리라는 점에서 그는 한때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구파 내 다른 국무총리 후보 희망자였던 김도연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상징적 지위인 대통령을 택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당적 보유를 금하였으므로, 윤보선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8월 13일 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를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직접 이름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1961
[5.16 군사정변 발생]
새벽 3시 5.16 군사정변 발생 직후 피신 통보를 받았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 등의 진압 요청을 국군 간 교전 및 북한 침공 우려로 거절하며 헌정 질서 수호와 군부 정변 인정 사이에서 고뇌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은 장도영으로부터 5·16 군사정변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속히 피신하라는 연락을 접하였다. 당시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러나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수녀원에 숨어버렸다. 이제 그의 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선택권이 쥐어졌다. 하나는 그가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고 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도력을 상실한 장면 정부를 포기하고 쿠데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셜 그린은 윤보선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가족들만 피신시키고 나는 대통령이니 죽더라도 청와대를 지키겠다고 하고는 가족들만 피신시켰다.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마셜 그린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군사 정변의 저지를 위해 UN군 병력을 동원할 허가를 받으려고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그때 장면 총리는 은신 중이어서 윤 대통령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3시간 여에 걸쳐 병력 동원을 허가해주기를 간청했으나 윤 대통령은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1962
[대통령직 사퇴]
5.16 군사정변 이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나, 군부와의 이견 차이로 결국 사퇴하고 안국동 사저에 칩거했습니다.
군사정변 이후에도 1년 이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치정화법이 제정되자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서중석에 의하면 '윤보선이 아무리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야의 배경에 관련되어서는 박정희의 구정치인 활동금지법에 반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퇴임후에는 안국동 사저인 안동장에 칩거하였다.
1963
[박정희 군정연장 반대 투쟁]
박정희의 군정연장 선언에 이윤영, 장택상 등과 함께 반대 투쟁을 전개하며 '산책시위'를 벌이고 박정희의 퇴진을 공개 요구했습니다.
1963년 3월 박정희가 구 정치인 정치활동법 제한(정치정화법)을 강행하고 군정을 연장시키자 윤보선은 이윤영, 장택상 등과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진행해 나갔다. 장면이 병으로 정당활동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야당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 출마]
야당 후보 단일화 과정을 거쳐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 경력을 지적하며 치열한 사상 논쟁을 벌였습니다.
63년 7월 그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본래 야당 단일후보로 김병로가 지목되면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해위(윤보선)라면 양보할 용의가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사퇴로 대통령 후보는 허정과 김도연의 2파전으로 압축되었지만 사전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김도연이 포기를 선언해 후보경쟁은 다시 윤보선과 허정의 대결로 전환되었다. 유세 도중 박정희의 공산주의 활동을 지적, 비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3년 9월 2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지방 유세에서 그는 '여순 반란 사건의 관련자가 정부안에 있으며 박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상 논쟁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다.
[제5대 대통령 선거 낙선]
박정희에게 15만 표 차이로 아쉽게 패배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습니다. 그는 이 선거를 '개표 부정'이 있었던 불법 선거로 규정했습니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에 해당하는 4,702,640표를 받았고 민정당의 윤보선은 45.1%에 해당되는 4,546,614표를 받아 불과 15만 표차로 윤보선이 패배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공화당이 모든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불법적인 선거로 규정하였다.
1964
[한일협상 반대운동 주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하고 장택상, 박순천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시작했습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을 굴욕, 매국외교로 규정, 장택상·박순천·함석헌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후일 역사학자 서중석은 그가 박정희와 정면으로 붙은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6.3 항쟁 지지]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인 6.3 항쟁을 지지하며 학생들을 격려했으나, 중앙정보부로부터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습니다.
윤보선은 학생 대표자들과 면담,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시위 준비 작업을 독려하였다. 1964년 3월 정부는 3월 5일 정부와 여당 연석회의를 열고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회담을 개최한다는 한일 협상 스케줄을 발표하였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 성토와 박정희 정권 성토식을 한 다음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사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윤보선은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이라며 예찬하였다. 중앙정보부는 시위의 배후로 윤보선, 장택상 등을 지목했다. 시위의 배후로 지목된 윤보선과 장택상은 정부가 보낸 사복경찰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당했다.
1965
[베트남 파병 반대 운동]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 파병을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로 규정하고 장준하와 함께 파병 반대 운동을 준비했습니다.
미국의 월남전 파병에 박정희가 호응할 것이라는 설이 정가에 돌자 그는 월남 파병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 젊은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박정희 자신이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이후 장준하와 함께 월남 파병 반대 운동도 준비한다.
1966
[박정희 정권 비판 및 반공법 혐의]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와 베트남 파병을 강하게 비판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었으나, 야당의 강력한 항의로 처벌은 면했습니다.
1966년 5월 26일 오후 윤보선 총재는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를 비판하였다. "박정희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 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월남증파가 미국의 뜻을 승인한 것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한 때문도 아닌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라고 하여 박정희의 민주적 민족주의 주장의 허구성 및 국군의 월남파병을 청장년의 피를 파는 행위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다. 윤보선의 발언은 화제가 되었고 대한민국 국회 국회와 검찰에서 다같이 문제가 되었다. 검찰은 윤보선 총재의 발언에 대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수사하고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1967
[암살 미수 사건 발생]
제6대 대통령 선거 개표 당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암살 위협에 처했으나, 박정희의 승리로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1967년 5월 김형욱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장 중앙정보부장은 대한민국 육군 육군 중령 방준모를 직접 불러 놓고는 ‘이 선거가 아무래도 위험해. 백중지세야. 까닥하다간 지겠어. 박 대통령의 혁명과업 완수와 경제계획을 완수하려면 할 수 없소. 암살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윤보선 암살을 명령했다. 표 대결에서 박 대통령이 패배한다면 ‘윤보선씨를 총으로 저격한다’는 암살 명령이었다. 방준모는 김형욱의 이 지시에 따라 개표 날 장총을 든 저격수와 함께 윤씨 집 안방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종로구 덕성여고 2층에서 비밀리에 대기했으나, 실제 개표 결과 박 대통령이 승리하는 바람에 그냥 철수하게 되었고 후일 방씨의 이런 폭로는 책으로까지 출판됐지만 국내 일간지에는 윤보선에 대한 암살미수 관련 기사가 한차례도 보도되지 않았다.
[제6대 대통령 선거 낙선]
신민당 후보로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박정희에게 116만 표 차이로 다시 패배했습니다. 박정희의 친일 및 공산주의 경력을 공격했습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은 박정희가 나왔고 야당은 윤보선이 대표주자를 하게 되었다. 윤보선은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며 여당 후보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윤보선은 선거 유세 중에 베트남 전쟁 월남전 파병을 미국 의 '청부 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윤보선의 집안을 친일파 가문이라 공격하였고, 윤보선은 박정희와 공화당으로부터 친일파로 공격받은 것에 분노하였다. 박정희는 568만 9천여 표를, 윤보선은 452만 7천여 표를 받아 116만 표의 근소한 표차이로 패하여 낙선했다.
1971
[국민당 창당]
신민당을 탈당하고 박기출, 장준하 등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 총재직에 취임했으나 김대중 후보를 불신하여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에 김대중이 선출되자 신민당을 탈당하여 박기출·장준하와 함께 대한민국 민주당계 정당 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직에 취임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는 장준하와 함께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당을 만들고 청년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게 되었다. 71년의 대선에서 윤보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후보직을 사퇴하는 대신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당시 범야권에서는 야당 후보 단일화라는 이름으로 야당 인사들은 그에게 후보단일화를 위한 후보자 용퇴를 계속 요청하였다.
1972
국민당은 유신에 의해 1972년 강제 해산당했다. 72년 10월 박정희가 유신 선포를 하자 장기집권을 위한 음모라며 규탄성명을 발표하였고, 그가 발표한 긴급조치는 모두 무표라고 주장했다.
1974
[민청학련 사건 연루 및 기소]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 관련 혐의자로 지목되어 불구속 기소되었고, 재판 결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약칭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윤보선은 비상군법회의로부터 민청학련사건 관련혐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당하였다. 다른 연루자들은 구속·기소되었으나 윤보선은 전직 대통령인 관계로 가택수사를 받았고 불구속 기소되었다. 1974년말 윤보선은 민청학련 배후 지원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 결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76
[3.1 명동 민주구국선언 참여]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 지도자들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등을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가택수사를 당했습니다.
1976년 3월 1일 새벽 윤보선은 명동성당에 도착, 앞자리에 앉아 700여명의 신자들과 함께 기도회, 김지하를 비롯한 구속 정치범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고,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석하였다. 윤보선의 주변에는 감시인이 따라붙었고, 정부 당국자와 박정희의 측근들은 계속 박정희에게 윤보선을 위험한 인물이라며 구속, 처벌해야 된다는 강경론을 펼쳤으나, 박정희도 그가 전직 대통령이자 야당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파급효과를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기를 주저하였다.
1979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최규하 총리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재야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한다. 윤보선은 최규하의 대통령직 승계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적인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윤보선은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가들과 면담, 군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실내에서 결혼식 형태로 하기로 정하고 연세대학교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정부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집회 종료 후 계엄군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1979년 11월 YMCA위장결혼사건으로 피체, 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80
[복권 및 국정자문회의 의장 취임]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복권되었고,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어 양김 단일화 등을 촉구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980년 2월 18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직 3부 요인과 각계 원로˙중진 23명으로 국정자문회의를 구성할 때,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고, 바로 국정자문회의 의장에 피선되었다. 2월 28일 최규하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윤보선, 김대중등 687명에 대한 복권조치가 단행되어, 복권되었다. 9월 국정자문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서울의 봄 당시 윤보선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불러 화합하고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윤보선은 다시 한번 힘을 합치라고 권고했지만 회의는 결렬되고 만다. 4월 28일 김영삼이 신민당 당직자와 함께 대권과 관련해 현충사를 참배하자 같은 날 김대중은 신민당 내 동교동 의원들을 데리고 현충사 부근 윤봉길 생가를 방문한다. 두 김씨에게 다시 한번 단일화를 추진시키려고 자리를 주선했지만 실패하자 윤보선도 더 이상 이들과의 접촉을 단념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해 8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다.
1984
1984년, 이전에 민청학련에 연루되었던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였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가 있었다. 전두환은 윤보선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그래서 윤보선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면, 복권시키는데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 역시 관련자 사면복권에 활약을 하였다.
1987
[6월 항쟁 진압 자제 충고]
전두환에게 6월 항쟁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 것을 충고하며 개신교, 천주교 인사들의 의견을 들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1987년 6월 22일 윤보선은 전두환에게 6월 항쟁 6.10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라는 충고를 담은 작은 메모를 보냈다. 또한 강원룡, 신현확 등의 개신교 인사와 로마 가톨릭교회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을 추천, 이들의 말을 듣고 시위대에 대응하라는 주문을 하였다.
1990
[서거]
지병인 당뇨, 고혈압, 폐렴 등으로 투병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향년 92세로 서거했습니다.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하고 가족묘에 안장되었습니다.
만년의 윤보선은 양복 한 벌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는데 조카 윤남경에 의하면 1975년경부터 당뇨로 고생하였다 한다. 1988년 5월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89년 5월 14일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에 폐렴까지 겹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 후에 안정을 되찾아 자택에 요양했으나 급성 신부전증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1990년 3월 말 다시 노환으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투병하다가, 7월초 병환에 차도가 없자 퇴원, 임종을 위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자택으로 옮겨졌다. 1990년 7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진행되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 34-2에 위치한 가족묘에 5대조·부모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국립묘지 안장 의견에 대해 독재자와 함께 누울수 없다고 반대했다 한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