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1870년)
왕족, 황족, 군인, 정치인, 교육인, 사회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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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고종의 조카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왕위 계승의 잠재적 대안자로 주목받았다. 여러 차례 왕위 옹립 시도와 정치적 음모에 연루되어 망명과 고난을 겪었으며, 만년에는 교육 및 계몽 활동에 참여했으나 친일 행적 논란도 있었다. 복잡한 시대상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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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으로 출생]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자 흥친왕 이재면의 장남으로 한성부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야심만만하여 할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흥친왕 이재면과 풍산 홍씨의 장남으로 7월 23일 한성부 종로방 운니동의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극, 호는 석정 또는 송정이었고, 이준이라는 이름은 1913년에 개명한 것이다. 고종 이명복은 그의 숙부였고,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미성년자였던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총명했으며, 남다른 적극성과 야심을 보였다.
1880
성년이 되거나 결혼하기도 전이었으나 관례를 올려 성인으로 인정받고, 자를 경극, 호를 석정이라 지었다.
판서를 지낸 홍종석의 장녀 남양홍씨와 혼례를 올렸다.
1884
[갑신정변 중 관직에 오름]
갑신정변 직전 음직으로 교관에 제수되었으며,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세자익위사 세마에 올랐다.
음직으로 교관에 제수되었고, 갑신정변 때 개화파에 의해 정9품 세자익위사 세마에 올랐다. 갑신정변 진압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그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책임을 추궁당하지는 않았다.
1885
8월 동몽교관에 제수되었고, 1886년 충량과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이재면은 고종의 친형이었는데도 고종은 형에게 4대 이내의 가까운 왕족에게 내리는 어떠한 작위, 혜택도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역시 어떤 작위도 받지 못했고, 일반 양반가의 자제와 같은 문반의 품계를 받게 되었다.
1886
[1차 왕위 옹립 시도에 연루]
청나라 위안스카이와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고종 폐위 및 왕위 옹립 대상으로 지목되며 그의 정치적 야망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고종이 러시아와 미국에 기대어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내쫓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그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
청나라의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내쫓고 이준용을 왕으로 세운 다음, 대원군을 섭정으로 내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고종이 러시아와 미국에 기대어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자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내쫓고 대원군을 내세우는 것이 청나라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그러나 아들을 내쫓고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으므로 대원군의 적장손 이준용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북양대신 이홍장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1887
[정3품 홍문관 부응교로 발탁]
무공랑 홍문관 설서 겸 경연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정3품 통훈대부로 승진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발탁되는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무공랑 홍문관 설서 겸 경연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바로 계공랑으로 승진하여 홍문관정자 겸 경연춘추관기사관, 규장각검교대교 지제교 세자시강원설서를 겸직했다. 그해 예문관 검열, 홍문관 부응교를 지냈고, 이해 12월 어머니상으로 3년간 상복을 입었다.
12월 어머니상으로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 기간 중에도 동학 농민군이나 개화파 인사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다.
1889
[탈상 후 주요 관직 역임]
어머니상 탈상 후 통훈대부 홍문관 부응교로 복직했으며,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 형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탈상 후, 그해 2월 다시 통훈대부 홍문관 부응교로 복직했다. 10월에는 절충장군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통정대부로 변경 임명되었다. 1890년 9월 사복시정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 이후 형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1891년부터 1896년 6월까지 홍문관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승정원 도승지, 1892년 이조 참의 등의 요직을 맡았다.
1892
[운현궁 폭탄테러 사건 발생]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으며, 매천 황현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지목했다.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한학자 매천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으며, 이는 1874년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라비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정치적 보복극이었다.
1894
[동학 농민군을 이용한 쿠데타 계획 실패]
할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동학 농민군을 이용하여 고종을 폐위하고 자신을 왕위에 올리려는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포착되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 이준용은 동학 농민군에 사람을 보내 연결을 시도했다. 동학 농민군이 한성까지 올라오면 자신은 진압한다는 명분하에 거병을 하고, 세인의 이목을 생각해 형식적으로 싸우는 척을 한다. 그 뒤 무능한 왕과 부패한 대신들을 척결한 뒤 동학 농민군은 자진 해산해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준용과 기타 친대원군파 인사들의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포착된다.
[명성황후 폐서 작업에 착수했으나 실패]
할아버지 흥선대원군과 함께 고종 폐위의 전초작업으로 명성황후 폐서 작업에 착수했으며,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를 설득하려 했으나 일본 측의 반대로 실패했다.
갑오경장 초두에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고종 폐위의 전초작업으로서 명성황후 폐서 작업에 착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6월 22일부터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을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제시하였으나 일본 측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일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으나 스기무라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주요 요직 임명으로 고종 감시 역할]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아문협판에 임명되어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종정경, 친군통위사 겸 정부당상, 내무아문협판에 임명되었다.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감시하는 역할을 큰아들 이재면에게 맡기고, 손자 이준용을 종정경, 친군위통위사 겸 정부 당상, 내무아문 협판으로 임명한 것이다. 종정경은 종친의 지도자라는 상징적인 관직이었고, 통위사는 수도의 가장 강력한 군영 중의 하나인 통위영을 다스리는 총책임자였으며, 내무아문협판은 내무부의 차관으로 전국 지방관을 다스리는 권한과 한성부 일대의 경찰권에 대한 통수권을 지닌 자리였다.
[내무대신서리 임명, 고종의 견제 직면]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내무대신서리에 임명되어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려 했으나, 고종의 견제로 군국기무처 의원 임명이 거부되는 등 권한 확대에 어려움을 겪었다.
군국기무처가 이준용을 군국기무처 의원에 임명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였으나 이준용의 권력 확대를 우려하고 있던 고종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그를 내무대신서리에 임명하여 내정을 장악하게 했다. 일본주차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거부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부인 남양홍씨가 사망했다. 곧바로 그의 재혼 부인이 간택, 낙점되어 12월 25일에 김재정의 딸과 재혼하였다. 부인상으로 사직한 그는 8월 27일 호위부장이라는 직함을 받았다.
[음모 탄로 및 공직 사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일본 측으로부터 항일활동을 추궁받고 공직 사퇴를 요구받았으며, 고종에게 통위사직 사직 의사를 밝히고 수락되었다.
상순 허엽, 이병휘 등에 의해 대원군과 이준용의 음모가 탄로나자, 위기를 느낀 대원군은 개화파인 경무사 이윤용의 관직을 박탈하고 이어 개화파 암살을 고종주, 김국선 등에게 담당시켰다. 10월 중순 이후 일본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들을 가지고 추궁하며 양인에게 공직 사퇴를 요구하였다. 10월 26일 이준용은 고종에게 통위사직을 사직할 의사를 밝혔고, 11월 21일 수락되었다.
[내무대신서리직 상실 및 재혼]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면서 내무대신서리직을 상실했고, 같은 달 김재정의 딸과 재혼했다.
박영효가 내무대신이 되면서 내무대신서리직을 상실하였다. 부인 남양홍씨 사망 후, 김재정의 딸과 재혼하였다.
1895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 고문, 유배형 선고]
개화파 김학우 암살 혐의로 법무아문에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압송, 혹독한 고문과 재판을 받았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개화파인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혐의로 법무아문에 체포당하였다. 궁중의 명성황후 세력과 내부대신 박영효 등과 법부대신 서광범 등이 서둘러 순검 수십 명을 운현궁으로 보내어 대원군 부부가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두들겨 패고 포박하여 경무청으로 압송하였다. 감옥에 수감된 뒤에도 그는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이준용 역모사건을 이용하여 대원군파를 일소하려는 의도에서 이준용과 그 당여들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특별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대역모반죄, 김학우 살인죄 등으로 사형 교살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별 사면조치로 10년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지에서 석방되다]
강화부 교동도 유배에서 석방되었으나 다시 투옥되었고, 6월 12일 특별사면으로 완전히 풀려났다.
강화부 교동도에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6월 2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다시 투옥되었고 1895년 6월 12일 다시 특별사면되었다.
중추원 1등의관 칙임관 3등에 임명되었으나 3일만인 9월 4일 사퇴하였다.
[을미사변 직후 석방 및 일본 공사로 파견]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김홍집 내각에 발탁되었고, 주차 일본공사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일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사람을 보내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명성황후 제거의 실패를 대비해 일본으로 도망가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강화군 교동도에 머무르다가 한성부로 갔다. 석방과 동시에 그는 한성으로 돌아와 김홍집 내각에 발탁되어 내부 협판, 통위사에 등용되었다. 일본 공사의 강요로 일본으로 유학하고, 주차 일본공사가 되었다.
[일본으로 출국, 망명 생활 시작]
정부의 명으로 영선사장 박용화, 주사 어윤적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여 12월 도쿄에 도착했다. 이로써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부의 명으로 영선사장 박용화, 주사 어윤적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했다. 12월 도쿄에 도착, 이후 도쿄의 일본공사관에서 별다른 활동 없이 주일본 대한제국 공사로만 활동하였다. 이때까지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1897
[유럽 유람길에 올라 서구 문물 시찰]
일본 도쿄를 떠나 배편으로 영국 런던에 도착, 이후 유럽 유람길에 올라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문물을 시찰하며 각지를 유람했다.
일본 도쿄를 떠나 배편으로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이후 유럽 유람길에 올라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문물을 시찰한 뒤 유럽 각지를 유람하고 1899년 1월 다시 돌아와 일본 지바현 기타조 정에서 한거하였다.
1898
[할머니 사망으로 귀국 시도했으나 좌절]
할머니 여흥부대부인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려 했지만, 대한제국 조정이 더 새로운 문물을 보고 오라는 이유로 거절하여 귀국에 실패했다.
할머니 여흥부대부인의 사망을 계기로 귀국하려 했지만, 더 새로운 문물을 보고 오라는 이유로 대한제국 조정이 거절, 귀국에 실패했다. 아버지 흥친왕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야심을 단념하고 조용히 지낼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이미 죽고 없었다.
1899
[일본 귀환 후 국내 왕위 옹립 역모 사건 발생]
유럽 유람을 마치고 일본 지바현에 머물렀으며, 국내에서는 자신을 왕 또는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장윤상 발언 사건 등 여러 역모 사건이 적발되었다. 이로 인해 고종 정부의 경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유럽 유람을 마치고 일본 지바현 기타조 정에서 한거하였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 정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전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황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살형에 처해졌다. 또한 3월에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국체를 모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 운동 가담]
일본 망명객들과 함께 순헌황귀비 엄씨의 왕비 책봉에 반대하는 운동에 가담했다. 엄씨의 출신 성분이 한미하여 왕실의 위신에 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4월 이준용은 일본 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 책봉에 대한 반대 운동에 가담하였다.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 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1900
[역모 연루 혐의로 궁내부특진관직 박탈]
안경수 역모 사건 연루 혐의로 궁내부협판 윤정구의 탄핵을 받아 고종의 칙령으로 궁내부특진관직을 박탈당했다.
안경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특진관직을 박탈했다.
[고종의 귀국 명령 거부]
고종 정부가 일본 주재 이하영 공사에게 그를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지시했으나, 그는 귀국을 거절했다.
평리원과 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월 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1901
[동생 사망에도 귀국 불가, 특진관직 해임]
동생 이문용의 사망 소식을 접했으나 정부의 감시와 체포 위험으로 인해 빈소를 방문할 수 없었고, 특진관직에서도 해임되었다.
동생 이문용의 사망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동생의 빈소를 방문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 자신을 잡아다 사형할 것을 인지한 이준용은 장시간 은신하였다. 6월 3일 특진관직에서 해임되었다.
1904
[고종의 망명자 처분 제의, 일본이 거부]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 내한 시, 고종이 그를 포함한 망명자 추방 또는 유치할 것을 제의했으나 일본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고종은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고종이 지명한 요인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이행하지 않았다.
1905
[을사조약 체결에 좌절, 친일 경향 시작]
을사조약 체결에 좌절하여 국내 인사들에게 반대 편지를 보냈으나 전달되지 않았고, 이후 일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협력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려 하자 그는 국내에 있는 유길준과 박영효 등에게 을사조약만은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이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좌절하였고 이후 일본 제국의 눈치를 보면서 적당히 협력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07
[이토 통감에게 귀국 요청 및 임의 귀국 선언]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누차 전문과 서한을 보내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며, 만약 실현되지 않으면 임의대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누차 전문과 서한을 보내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실력자들에게도 자신의 조속한 귀국 실현을 힘써 달라고 간청하였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박영효의 경우처럼 임의대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토 통감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이준용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이토 통감은 이준용에게 일단 부산에 당도해 있으면 자신이 박영효의 경우처럼 힘써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토는 내각 회의를 통해 안경수, 권형진의 의옥사건에 대한 이준용 연루건이 무죄임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이준용은 사복 일본인 경부 1인과 순검 2인의 보호하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이는 정식 귀국이 아닌 밀입국이었다.
[고종 퇴위 직후 12년 만에 귀국]
고종의 강제 퇴위 직후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망명 중 진료 시기를 놓쳐 신장병과 심장병이 악화되어 고통받았다.
고종이 퇴위하자 바로 귀국했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 정부 측에 이준용의 귀국으로 정국혼란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며 이준용의 귀국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타전했으나 무시당하였다. 순종 즉위 전날인 7월 19일 경성부에 도착한 이준용은 신변 안전을 위해 정운복과 함께 진고개의 일본인 여관에서 1박한 후에 운현궁으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타의로 한국을 떠났던 이준용은 12년 7개월간의 해외 망명생활을 마감하고 한국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망명과 피신, 은신 등으로 그는 진료시기를 놓쳐 병원에 가지 못했다. 제때 진료받지 못하여 신장병과 심장병이 수시로 그를 괴롭혔고 결국 이는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김옥균에게 충달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날 김옥균 시호 추증 기념식에 참석한 내빈의 한사람으로 김옥균 연시연 식장에 참석했다.
순종의 특명으로 죄명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퇴위한 뒤에도 고종은 그를 의심, 경계했고, 잠재적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하려 노력했다.
[숭정대부 및 육군 참장, 영선군 작위 수여]
종일품 숭정대부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9월 12일에는 영선군 작위를 받았다.
종일품 숭정대부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이 되었으며, 9월 12일 영선군의 작위를 받았다.
[영친왕 이은의 황태자 책봉으로 왕위 계승 가능성 소멸]
태황제 고종이 영친왕 이은을 순종의 황태자로 결정하면서, 그와 의화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의화군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아버지 흥친왕과 함께 일본 방문]
대한제국 육군 부장과 일본 파견 특별 보빙사절단에 임명된 아버지 흥친왕을 수행하여 보빙대사수행원의 직책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대한제국 육군 부장과 일본파견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된 아버지 흥친왕을 수행하여 보빙대사수행원의 직책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2월에 이화 대수장, 1908년 9월 서성 대수장을 차례로 수여 받았다.
1908
[돈명학교 설립 주도]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황족 자제 교육을 위한 돈명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9년에는 자신의 전답을 저당잡아 학교 건립 자금 마련을 논의하는 등 학교 발전에 힘썼다.
봄에 이지용, 이재극 등과 함께 경서우 북부 계동에 황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돈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황족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점차 문호를 개방하여 양반가 자제들, 평민 민간인의 아동들 100명 정도가 수학하게 되었다. 학교의 운영자금이 부족하자 순종은 시종관을 보내 이준용, 이지용, 이재극 등 학교 관계자 30명과 함께 돈명학교의 발전방향을 협의하도록 하였다. 1909년 6월 이준용은 자신이 소유한 전답을 저당잡아 돈 2만여 원의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돈명학교를 건립하기 위한 방안을 황족들과 논의하기도 하였다.
[교육 및 계몽 활동 적극 참여]
연흥사 건립에 동참했으며, 대동학회나 기호흥학회에 가담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사범교육을 권장하는 등 교육 계몽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흥사의 건립에 동참한다. 연흥사는 1908년경 절골(寺洞)에 개장된 극자으로 영선군 이준용과 중추원 고문 이지용이 함께 건립한 것이다. 정부 고관들이 다수 참여한 대동학회나 기호흥학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에는 다소 열성적으로 가담하여 기관지 창간호에 축사를 실었으며, 매월 50원을 보조하기로 했다. 기호흥학회월보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범교육을 권장하는 2편의 논설을 기고하였다.
[상공근무사 및 상무조합 고문 선출]
의양군 이재각이 총재로 있는 상공근무사의 총고문에 선출되었으며, 1909년 12월에는 유길준을 대표로 하는 상무조합의 고문이 되었다.
의양군 이재각이 총재로 있는 상공근무사의 총고문에 선출되었다. 1909년 12월 중구 전동 등지에서 유길준을 대표로 하는 상무조합의 고문이 되었다.
1909
[마지막 집권 야심 시도와 좌절]
친일파 이근호 형제, 이지용, 김윤식 등과 이완용을 대신하여 자신이 수상이 되려는 야심에서 정우회 결성을 계획하는 등 마지막 집권 시도를 했으나, 일본의 조선 병합이 가시화되면서 좌절되었다.
일제 측의 기밀 보고 자료에 의하면 2월경에 그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에서 친일파인 이근호, 이근택 형제와 자주 모의하며 이완용을 대신해서 자신이 수상이 되려는 기대를 품고 미리 일본의 여러 대관들과 면식을 쌓아두기 위해 조만간 일본으로 건너가리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7월경 이지용, 김윤식 등과 정우회의 결성을 계획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은 이미 한국의 일본 병합이 예상되었고, 그는 결국 좌절했다.
[대한의사총합소 총재 선출 및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참석]
대한의사총합소 총재에 선출되었고,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및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서거 50일 기념 추도회에 참석했다.
대한의사총합소 총재에 선출되었고, 12월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서거 50일 기념추도회에 참석하였다.
1910
[다양한 사회 단체 총재 및 유공사원 선임]
조양구락부 총재, 3월에는 사립 정일여숙 재단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5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유공사원에 선임되었다.
조양구락부 총재, 3월에는 사립 정일여숙 재단 총재에 추대되었고, 5월 대한적십자사 유공사원에 선임되었다.
[친일 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로 활동 및 논란]
신궁건축지를 발간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배포하는 등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로서 활동했으며, 단군을 일본 신화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에 연루되어 친일 행적 논란에 휩싸였다.
신궁건축지를 발간하여 주요 인사들에게 배포했다. 친일 단체인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에 부속되는 구도로 신궁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명단에 포함되는 등 친일 행적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최고 품계 승진 후 한일 병합으로 정치적 희망 상실]
대한제국의 최고 품계인 상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고 금척대수장을 받았으나, 곧이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든 정치적 희망을 상실했다.
정1품 상보국숭록대부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5일 종친으로 가장 높은 자품인 상보국숭록대부로 가자되었고, 마지막으로 8월 27일 대한제국 최상위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받았다. 한때 황제가 되리라는 희망은 절망과 좌절로 변했고, 그는 독서와 격구, 강연과 담론 등으로 소일하였다.
[한일합방 후 칩거 및 일본 육군 소장 임명]
한일합방 이후 왕손의 대우를 받았으나 체념하고 모든 것을 상실한 채 칩거했으며, 12월 28일 일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일본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한일 합방 이후 이준용도 왕손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체념했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칙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 공에 봉해졌고, 1911년 7월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12월까지 집밖을 출입하지 않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칩거하였다. 12월 28일 일본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일본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1911
[정악유지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조양구락부의 후원 단체인 정악유지회가 조직될 때 유길준, 이지용, 윤치오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조양구락부의 후원 단체로 정악유지회가 조직될 때, 유길준, 이지용, 윤치오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6월 16일 정악유지회의 재단 총재가 되었다.
1912
[병으로 입원 및 개인주의적 성향 심화]
병이 발병하여 총독부 의원에 입원했으며, 건강 악화와 함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고 가족애가 무뎌지는 모습을 보였다.
병이 발병하여 총독부 의원에 입원하였다. 쿠데타 실패와 암살 위협, 망명 등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가족이나 친척들에 대해 원망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가족, 친척에 대해 상당히 냉담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아버지 사망 후 냉담한 태도로 비판받고 공위 계승]
아버지 이재면이 사망했으나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아 친척들에게 호된 질책을 당했으며, 1913년에 이준으로 개명하고 아버지의 공위(公位)를 계승하여 운현궁의 종주가 되었다.
아버지 이재면이 사망했다. 아버지 흥친왕 이재면이 사망한 뒤에도 그는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등에게 호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그는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 이재면의 사망으로 1912년 9월 20일 이준용은 이준으로 개명하고 아버지의 공위를 계승하여 이준 공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실제 개명은 1913년)
1913
개명 신청을 하여 바로 허락받고 이름을 이준으로 고쳤다. 3년상 기간 중에도 그는 자유롭게 출입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외부 활동을 하였다.
1914
[쇼켄 황태후 국장 참석차 일본 방문]
쇼켄 황태후 사망 국장에 내빈으로 참석하기 위해 일본 도쿄를 방문했고, 6월 8일 귀국했다.
쇼켄 황태후의 사망으로 국장이 거행되자, 내빈의 한사람으로 출국, 경성에서 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하고 1914년 6월 8일 귀국했다.
1915
[일본군 육군 중장 임명과 병으로 인한 사퇴]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일본군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9월 11일 금강산으로 요양을 떠나며 육군 중장직을 사퇴했다.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친히 일본군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11일 병으로 금강산으로 요양을 갔고, 육군 중장직을 사퇴하였다.
1916
[딸 이진완 출생 및 이우를 양자로 삼음]
첩 전순혁에게서 유일한 혈육인 딸 이진완이 태어났으며, 아들이 없어 1917년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다.
아들이 없던 그는 첩인 전순혁이 회임하자 아들을 기대하였으나, 그에게서 딸 이진완을 보았다. 당시까지도 딸의 이름을 짓지 않는 일이 보통이었지만, 그는 서녀 딸이 태어나자 직접 딸의 이름을 진완이라 지었고,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던 첩 전씨에게 순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결국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의친왕의 차남 이우를 양자로 삼았다.
1917
[운현궁에서 47세 나이로 병사]
심장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운현궁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양자 이우가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양력 3월 22일(음력 2월 29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였다. 이에 양자 이우가 가계와 세습 공위를 이었다. 한일합방 직후에도 수년간 순종은 형식적이나마 양반들에게 시호를 내렸고, 시호를 받지 못한 관료나 학자들은 사시라고 하는 사적인 시호를 올렸으나 이준용에게는 순종의 시호도, 사시도 일체 아무것도 추서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