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선

의사, 의학자, 교육자, 대학 교수, 사회 운동가, 정치인

num_of_likes 0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5- 11:43:07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의사, 의학자, 교육자, 대학 교수, 사회 운동가, 정치인
report
Edit

대한민국의 의학자이자 교육자로,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로 인정받습니다. 일본 교토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특히 교수들의 투표로 선출된 최초의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 대학 자치와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4.19 혁명 당시 학생들을 보호하고, 원자력 병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며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본 문서는 위키백과 윤일선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편집되었으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배포됩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96

[일본 도쿄에서 출생]

일본 도쿄에서 대한제국의 개화파 관료 윤치오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자 교육자로 성장할 기반을 다졌다.

동호 윤일선은 1896년 10월 5일 일본 도쿄의 어느 전세방에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아버지 윤치오와 어머니 이숙경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실제 출생지는 일본이지만 선대의 고향이 충남 아산이고, 아버지 윤치오와 가족이 아산에 거주했으므로 충남 아산 출신으로도 본다.

1906

[일본에서 귀국 및 신앙 활동 시작]

일본에서 귀국하여 부산항을 거쳐 고향인 아산으로 상경했다. 이후 한성부 저동으로 이사하며 정동제일감리교회에 다니게 되고 세례를 받았다.

1906년(광무 9년) 7월 24일 배편으로 귀국해 7월 26일 부산항에서 내렸다가 열차로 부산과 성환을 거쳐 아산 둔포면 신항리 고향으로 상경하였다. 윤일선과 형제들은 조부모에게서 우리말 공부를 했다. 얼마 뒤 아버지 윤치오가 학무국장에 임명된 뒤 정착하면서 저동(苧洞, 명동성당 아랫 동네)로 이사하였다. 상경 후 윤일선은 형제들과 함께 정동제일감리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얼마 뒤 본 교회 초대 목사인 최병헌에게 세례를 받고 이후 80년간 정동감리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1909

[어머니 이숙경 사망]

도쿄에서 어머니 이숙경을 여의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가 인간의 질병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의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09년(융희 3년) 겨울 도쿄에서 어머니 이숙경을 여의었다. 어머니 이숙경은 감기가 악화되어 한성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원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윤일선에게 학자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러한 유언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의학을 택해 병리학을 전공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19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 진학]

일본 제6고등학교를 졸업 후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여 의학 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시기 '뿌리'에 해당하는 기초의학, 특히 병리학을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919년 7월 일본 제6상업학교 제3부를 졸업한 뒤, 귀국하지 않고 바로 그해 9월 일본 교토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했다. 그는 '임상의학을 하느냐 기초의학을 하느냐'는 고민 끝에 임상의가 되어 환자를 치료하고 개업해서 돈을 버는 것도 좋겠지만, "질병의 근원과 싸움으로써 의학 발달의 기초가 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병리학을 선택했다.

1929

[한국인 최초 병리학 박사 학위 취득]

일본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에서 '내분비선과 과민증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한국인 최초의 병리학자가 되었다. 이는 한국 의학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심한 설사로 인해 1년간 투병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하여 공부한 끝에 '내분비선과 과민증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이 교토 제국대학 교수회의를 통과하여 1929년 1월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기는 1월 하순 우편으로 발송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 대학 출신 한국인으로는 6번째 의학박사가 되었고, 한국인 최초로 병리학자가 된 것이다.

1946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대학원장 취임]

경성대학교가 서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고, 초대 대학원장직을 겸직하며 한국 고등 의학 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1945년 경성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겸 의학부장에 선출된 뒤, 1946년 경성대학교가 서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 해에 경성대학이 국립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장에 선출되었다. 10월부터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직을 겸직했다.

1956

[서울대학교 제6대 총장 취임 (교수 직선제 첫 선례)]

교수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최초의 비관선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여 대학 자치의 새 역사를 열었다. 미네소타 대학교와의 자매결연, 연구 시설 확충 등 대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6년 문교부 장관이 된 최규남 박사는 6월 19일 자신의 후임 서울대 총장으로 당시 부총장이던 윤일선을 지명하였으며, 이에 따른 투표에 따라 총장에 임명되었다. 투표자격이 있던 조교수 이상 2백70명 중 2백 명의 교수가 출석하여 윤일선에 대한 동의 투표를 실시, 90%의 동의를 얻었다. 이는 교수들의 투표로 총장을 선출한 첫 선례이자 대학자치의 성장에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총장 재직 중 그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와 자매결연을 추진했고, ICA의 원조를 얻어 서울대학교 의대, 공대, 농대를 정비, 증축하고, 의대, 공대, 농대의 연구 시설을 도입하였으며, 3백여 명 이상의 서울대학교 교수들을 교환교수 형식으로 미국 유학을 추진했다.

1960

[4.19 혁명 시 학생 보호에 앞장]

4.19 혁명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 시위 학생들의 곁을 지키며 과잉 진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체포된 학생들의 구명에 힘썼다.

4월 19일 아침,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데모 발생 소식을 듣고 학장들과 함께 막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위가 격화되자 그는 교수들을 데리고 직접 학생 시위대 곁을 지키며 보호했고, 경찰에게 학생들에게 과잉진압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체포된 학생들의 구명과 석방을 위해 경찰서 당국과 직접 교섭하여 선처를 호소했다. 국민대학교 앞에서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1961

[서울대학교 총장직 사퇴 및 명예교수 위촉]

서울대학교 총장직을 사퇴하고 정년 퇴임한 후에도 명예교수로서 의학 교육과 연구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1961년 9월 말 서울대학교 총장직을 사퇴했고, 그해 정년퇴임한 뒤에도 196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병리학 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강사를 거쳐 1962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에 선출됐다.

1963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 취임]

한국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 도입되자 원자력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원자력 치료 연구 및 지원에 힘써 한국 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63년 대한민국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으로 도입되자 그는 원자력 병원의 초대 원장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이어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자력 병원장에 선출된 뒤 원자력원 내 방사지농학연구소를 창설하였다.

[민주공화당 창당 참여 및 정치 활동 시작]

군정에 참여하고 숙부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서울시지구당 창당준비위원장 및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3년 1월 군정에 참여하여 정구영, 김종필, 숙부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고, 1963년 2월 22일 민주공화당 서울시지구당 창당준비위원장에 선출된 뒤, 2월 26일 공화당 서울시지구당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87

[서울 자택에서 별세]

서울 자택에서 노환으로 향년 91세에 별세했으며, 한국 의학계의 태두로 평가받으며 아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만년에는 백내장 수술과 난청을 앓았다. 1987년 6월 22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2동 225의 236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91세였다. 서울정동 제일감리교회에서 발인, 장례식 후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원남리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