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연표
BC 5C
[꿀벌의 축복을 받은 탄생]
아테네의 명문가에서 태어날 당시, 잠든 그의 입술에 꿀벌들이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는 그가 훗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가진 위대한 웅변가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졌습니다.
플라톤의 가문은 부계로는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 모계로는 전설적인 입법가 솔론과 연결됩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그가 신의 아들이라고 믿어 출생 직후 아폴론 신에게 봉헌하기도 했습니다.
[어깨가 넓은 레슬러]
건장한 체격 덕분에 '넓다'는 뜻의 별명인 플라톤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지성뿐만 아니라 육체적 강인함도 겸비하여 청년 시절 레슬링 선수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의 본명은 아리스토클레스였으나, 레슬링 스승인 아리스톤이 그의 넓은 어깨를 보고 '플라톤'이라 부른 것이 굳어졌습니다. 그는 실제로 고대 올림픽의 전신인 이스토미아 경기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다퉜을 정도의 수준급 실력자였습니다.
[꿈을 태운 시인의 전향]
비극 경연대회를 준비하며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던 중 소크라테스의 연설을 듣게 됩니다. 그 즉시 자신이 썼던 시와 비극 대본들을 모두 불태우며 철학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는 디오니소스 극장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접하고 '지혜에 비하면 시는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때 불태워진 그의 습작들이 살아남았다면 서양 문학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것입니다.
[백조의 꿈과 스승]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그의 모든 가르침을 흡수합니다. 스승은 그를 만나기 전날 밤 자신의 품으로 한 마리의 아름다운 백조가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고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보자마자 '이 아이가 바로 그 백조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플라톤은 스승의 곁에서 8년간 머물며 인간의 영혼과 도덕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친척들의 권력 유혹]
아테네를 장악한 30인 찬주 정권으로부터 정치 참여를 제안받습니다. 자신의 친척들이 주도한 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잔혹한 통치에 환멸을 느끼며 거절합니다.
외삼촌 크리티아스는 당시 정권의 실세였으나 소크라테스를 탄압하려 했습니다. 플라톤은 이 시기를 통해 '권력이 철학을 만나지 못하면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BC 4C
[하늘이 무너진 독배]
스승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독배를 마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후 아테네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을 품게 됩니다.
사실 플라톤은 스승의 마지막 임종 순간에 병이 나서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미안함과 고통을 씻어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스승을 주인공으로 하는 대화편들을 집필했습니다.
[이집트 사제들의 지혜]
아테네를 떠나 이집트로 유랑을 떠나 고대 문명의 신비로운 지식들을 접합니다. 그곳의 사제들로부터 기하학뿐만 아니라 영혼의 윤회에 대한 비기를 전수받습니다.
이집트 사제들은 그에게 '그리스인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이다'라며 고대 지식의 깊이를 뽐냈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이때 배운 수학적 엄밀함을 자신의 철학적 토대로 삼았습니다.
[시라쿠사 참주와의 논쟁]
시칠리아의 강력한 통치자 디오니시오스 1세를 만나 정의의 가치를 설파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부정하는 듯한 플라톤의 태도에 분노한 왕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왕은 플라톤의 말을 듣고 '노인네 같은 소리'라며 비웃었고, 플라톤은 '당신의 말은 폭군의 잠꼬대'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이 당돌함이 그를 노예 시장으로 내몰게 됩니다.
[노예 시장의 철학자]
왕의 명에 의해 강제로 배에 태워져 노예 시장에 매물로 나옵니다. 철학자가 한순간에 짐승처럼 팔려 나갈 처지에 놓였으나 극적으로 자유를 얻게 됩니다.
당시 그는 아이기나 시장에서 단돈 20미나(약 2,000만 원 가치)에 팔릴 뻔했습니다. 마침 그를 알아본 친구 아니케리스가 몸값을 지불해 구출되었으며, 친구들은 이 몸값을 돌려받지 않고 학교 설립에 쓰라고 기부했습니다.
[지식의 전당 아카데미아]
아테네 외곽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조직적인 교육 기관을 세웁니다. 이곳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세상을 바꿀 리더를 키우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정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오지 마라'라는 팻말을 붙였습니다. 이는 감각적인 편견을 버리고 오직 이성적인 논리로만 생각하라는 엄격한 지침이었습니다.
[남장하고 찾아온 여제자]
여성의 교육이 금지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여성 제자들을 받아들입니다. 성별에 관계없이 지혜를 향한 열정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플리오스의 악시오테아라는 여성은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감명받아 남장을 하고 아카데미아에 입학했습니다. 플라톤은 이를 알고도 그녀를 쫓아내지 않고 최고의 제자 중 한 명으로 키웠습니다.
[동굴의 비유 선언]
우리가 보고 만지는 현실이 사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사상을 발표합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진리)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영화 '매트릭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은 진리를 깨달은 자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무지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지성인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페리클레스식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
자신이 태어나기 전 아테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를 비판하며 그가 상징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국가(The Republic) 등의 저술을 통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가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실제로는 시민들을 방종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한 후, 페리클레스가 구축한 민주정의 요소들을 철인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핵심적인 비판 모델로 삼았습니다.
[에로스의 재정의]
사랑이란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본질을 찾아가는 영혼의 사다리라고 규정합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용어의 기원이 되는 사상을 정립합니다.
대화편 '향연'에서 그는 원래 인간은 두 몸이 붙어 있었으나 신에 의해 쪼개졌고,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과정이 사랑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시인을 추방하라]
이상 국가에서는 감정을 자극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시인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때 시인을 꿈꿨던 그가 철저한 이성 국가를 위해 예술을 통제하려 한 것입니다.
그는 시인들이 신들을 부도덕하게 묘사하여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찬가나 군가는 허용하는 엄격한 검열관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황금 제자의 입학]
훗날 서구 과학의 기초를 닦게 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아에 들어옵니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때로는 치열하게 대립하며 철학의 황금기를 엽니다.
플라톤은 책을 너무 많이 읽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독서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훗날 '나는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두 번째 시칠리아 원정]
젊은 왕 디오니시오스 2세를 '철인 왕'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시라쿠사로 떠납니다.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자신의 이론을 현실 정치에 실험해보려 시도합니다.
궁정의 신하들은 갑자기 나타난 철학자가 왕을 조종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기하학으로 왕을 홀려 제정신을 잃게 만들고 있다고 모함했습니다.
[궁전에 갇힌 철학자]
정적들의 모함으로 제자 디온이 추방당하고 플라톤은 궁전에 연금됩니다. 왕을 가르치려 갔던 그는 오히려 왕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생사를 맡기는 처지가 됩니다.
젊은 왕은 플라톤을 존경하면서도 질투했습니다. 플라톤이 디온을 자신보다 더 아끼는 것에 화가 나 플라톤을 풀어주지 않고 감시했습니다.
[세 번째 방문과 감금]
왕의 거듭된 초청과 약속을 믿고 세 번째로 시라쿠사를 찾습니다. 하지만 왕은 약속을 모두 어겼고 플라톤은 적대적인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이때 플라톤을 살린 것은 친구 아르키타스가 보낸 구조선이었습니다. 그는 시칠리아를 떠나며 '다시는 정치에 직접 몸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곱 번째 서한의 고백]
자신을 향한 수많은 비난과 오해에 답하기 위해 자전적인 편지를 씁니다. 자신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시라쿠사에 갔는지, 그리고 왜 실패했는지를 담담히 기록합니다.
이 편지는 플라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는 여기서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이 존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아틀란티스 전설의 시작]
대화편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를 통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립니다. 고대 아테네와 싸우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초고대 문명의 이야기는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가 이집트의 지혜로운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실화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기록 때문에 지금까지 수많은 탐험가가 사라진 대륙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조율사 데미우르고스]
우주가 무질서한 혼돈에서 완벽한 기하학적 질서로 창조되었다는 우주론을 정립합니다. 신성한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를 본떠 세상을 빚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우주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았으며, 별들의 움직임에 음악적 화음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훗날 천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과 타협한 법률]
완벽한 철인 왕 대신 법에 의한 엄격한 통치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담은 '법률'을 집필합니다. 노년의 플라톤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습니다.
이 저서는 그의 저작 중 가장 길며, 결혼, 재산, 형벌 등 국가 운영의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법으로 규제하는 엄격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커리큘럼]
아카데미아의 교육 체계를 수학, 천문학, 음악학, 변증법으로 정교화합니다. 이는 훗날 서구 대학의 기초가 되는 '자유 7과'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질문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산파술적 교육법을 고수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졸업 후 각 도시 국가의 고문으로 초빙되었습니다.
[잔치 끝에 찾아온 영면]
80세의 나이에 제자의 결혼 잔치에 참석했다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을 마칩니다. 흥겨운 잔치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평생 찾아 헤매던 이데아의 세계로 떠났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죽은 후 머리맡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어린 소녀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으며 평온하게 잠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카데미아 숲의 무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아카데미아 학원의 숲속에 묻힙니다. 그의 무덤 위에는 소크라테스와 자신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고 수많은 제자가 그를 추모했습니다.
무덤 근처에는 훗날 플라톤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를 '신적인 플라톤'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유언장에 남긴 자비]
죽기 직전 남긴 유언장에서 자신의 노예 중 한 명을 자유인으로 풀어주라고 명합니다. 평생 정의를 논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종에게 정의를 실천했습니다.
유언장에는 학원의 재산 관리와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꼼꼼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삶으로 증명하려 노력했습니다.
[보존된 대화편의 기적]
그가 쓴 모든 작품이 단 한 권의 유실도 없이 완벽하게 후대에 전해지는 기적을 남깁니다. 고대 작가 중 전 작품이 보존된 것은 플라톤이 거의 유일합니다.
이는 아카데미아가 대를 이어 필사본을 관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약 25만 단어에 달하는 그의 방대한 기록은 서양 철학의 '성경'과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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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상륙한 사상]
그의 사상이 로마 제국으로 넘어가 지성계의 주류가 됩니다. 키케로 등 로마의 대문장가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을 탐독하며 로마 법과 철학의 뼈대를 세웁니다.
로마인들은 플라톤의 도덕적 엄격함에 열광했습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또한 플라톤 철학의 자양분을 먹고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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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아의 마지막 등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아카데미아가 강제 폐쇄되면서 916년의 역사가 막을 내립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공간은 사라졌어도 그의 생각은 인류의 정신 속으로 영원히 파고들었습니다.
폐쇄 당시 학자들은 플라톤의 원고를 가슴에 품고 페르시아 등지로 망명했습니다. 이 원고들이 훗날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으로 재유입되어 근대 문명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1929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
화이트헤드가 '서구 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선언을 통해 그의 절대적인 위상을 재확인합니다. 2,4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인류는 그가 던진 질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저서 '과정과 실재'에서 이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는 플라톤이 다루지 않은 철학적 주제가 거의 없으며, 후대의 모든 생각은 그의 응답이라는 뜻입니다.